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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전통종이 ‘저이조’에 담긴 가치

<아맙이 만난 베트남 사회적기업> 조 프로젝트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사회적 기업 ‘아맙’(A-MAP)이 베트남 곳곳에서 지역공동체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과 모임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조 프로젝트(Zo project) 소개

 

2013년 베트남의 ‘남딘성공동체발전센터’에서 창립한 <조 프로젝트>는 베트남 전통종이 저이조(Giay Do) 장인들을 도와, 전통 수제종이를 이용한 상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하노이의 사회적 기업이다. 사라져가는 저이조의 전통을 보존하고 장인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지원하기 위해 <조 프로젝트>는 전통 수제방식에 따른 종이 제조기술을 복원하였다. 화학약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품질의 저이조를 생산한다. 이를 재료로 고급 수첩과 노트와 엽서, 벽지, 장식품 등 다양한 상품을 개발, 판매한다. 이밖에도 저이조 전시회와 상품박람회, 전통종이 만들기 체험교실과 공방 등을 운영하며 저이조의 문화적 가치를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  베트남 전통종이 ‘저이조’로 만든 <조 프로젝트>의 수공예상품들.    © 아맙

 

공정무역 꿈꾸던 청년과 베트남 전통종이의 만남

 

한국에 전통종이 한지가 있다면 베트남에는 저이조(Giay Do)가 있다. 베트남어로 ‘저이’는 종이라는 뜻이고 ‘조’는 그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 이름이다. 대형 문구점에 가면 어렵지 않게 한지를 구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베트남에서 저이조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날이 갈수록 종이 원료인 조 나무가 고갈되고, 수작업 제조 과정이 품이 많이 드는 데 비해 가격은 보장되지 않자 장인들이 하나 둘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아맙>에서 하노이의 <조 프로젝트>를 찾았을 때, 창립자인 늉 씨가 따뜻한 생강차를 내오며 사진첩을 펼쳐 보였다. 베트남 북부 박닌 성에서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저이조를 만들고 있는 장인과 가족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늉 씨는 마치 자기 인생의 소중한 보물을 보여주듯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긴 장인들의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습하고 시린 하노이의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린 아침이었지만, 저이조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우는 동안 따스한 온기가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구수정(<아맙> 베트남 본부장, 이하 수정): 한국의 한지를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베트남의 저이조도 비슷한 느낌을 주네요. 질감은 한지보다 거칠어 보이지만 색감은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  <조 프로젝트> 창립자, 쩐 홍 늉    © 아맙


쩐 홍 늉(조 프로젝트 창립자, 이하 늉): 아시아의 전통종이를 살펴보면서 특히 한국의 한지와 일본의 와시를 수집해 연구했어요. 두 나라에 비하면 베트남의 저이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까움이 컸지요.

 

수정: ‘베트남 사회적기업 지원센터’(CSIP)를 통해 <조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었어요. 수공예품이나 커피, 차와 같은 품목이 아닌 전통종이를 판매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늉: 저는 하노이에서 외상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에서 경영관리학을 전공했어요. 제 석사논문 주제는 다름 아닌 공정무역이었어요. 베트남에 돌아와 사회적 기업 <메콩퀼트>나 <옥스팜> 등의 공정무역 프로젝트에 참여해 일하기도 했지요.

 

<조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한 건 2009년인데요, 당시 제 절친 중에 베트남 전통서예의 매력에 푹 빠진 독일 교포가 있었어요. 그 친구와 함께 베트남 서예의 전통을 세계에 알리자는 당찬 포부를 갖고 베트남 서예가들을 찾아 다니며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러다 서예가들이 즐겨 쓰는 베트남 전통종이 저이조를 만났죠.

 

저이조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 눈을 뜬 저는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남딘성 공동체발전센터>와 손을 잡고 <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죠. 사업을 구상하고 정식으로 <조 프로젝트>가 출범하기까지 4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2014년에는 베트남 사회적기업 지원센터 <CSIP>로부터 올해의 사회적 기업가로 선정되어 창업 지원을 받기도 했고요.

 

친구들의 재능기부를 받아 종이사업에 뛰어들다

 

수정: 처음에 <조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늉: 수천 불의 월급을 받던 직장을 박차고 “구닥다리” 같은 종이사업에 뛰어들겠다고 하자 식구들의 반대가 거셌어요. 입만 열면 종이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저를 보고 친구들이 “제대로 미쳤구나!”하면서 낄낄대기도 했죠.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아직 구상 단계에 있을 때부터 저와 함께해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통마을에 심취한 화가 린은 현재 조 프로젝트의 디자인 실장을 맡고 있고, 저이조의 잠재력에 매료된 프랑스인 디자이너 자비에 서바스도 조력자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결국 주변 친구들의 재능 기부와 자원봉사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조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   가장 어려운 공정인 종이 뜨기 작업   © 조 프로젝트

 

수정: ‘저이’는 종이라는 뜻이고 ‘조’는 그 원료가 되는 나무 이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원래 ‘조’의 베트남어 철자가 ‘Do’인데요, 어째서 기업의 이름은 ‘Zo’가 되었나요?

 

늉: 섬세한 지적이네요. (웃음) 사실 베트남어 철자에는 알파벳 제트(Z)가 없지요. 창업 준비를 하면서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기업 이름과 로고를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조(Do)의 베트남어 발음을 그대로 살려서 영어 알파벳으로 조(Zo)라고 지어봤지요. 베트남어에는 없는 제트를 활용해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에게는 ‘Zo’가 더 발음하기 좋고 편한 장점이 있어요. 이런 취지에 걸맞게 강렬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로고도 만들어봤는데 꽤 멋있더라고요. (웃음)

 

수명이 5백년 넘는 ‘저이조’의 가치와 매력

 

수정: 저이조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줄 수 있을까요?

 

늉: 기록에 따르면 베트남 역사에 저이조가 등장하는 건 약 13세기경이에요. 연구자들은 오늘날 하노이의 꺼우저이 현, 응이아도 마을에서 최초로 저이조가 생산되었다고 보는데요. 그 후 책봉서로 유명한 옌타이 마을로 퍼져나갔고요. 나중에는 저이조의 생산이 발전하면서 장인들이 모여 사는 옌타이 마을(오늘날 하노이 떠이호 현)이 생겼어요. 이 마을에서 생산된 저이조는 왕실과 조정에 바치는 진상품이기도 했죠.

 

시간이 흐르면서 저이조의 제조기술이 다른 지방에도 전해졌죠. 하노이의 북서쪽에 위치한 박닌 성에 저이조를 생산하는 마을이 생겼고, 오늘날까지 오랜 역사를 이어오고 있어요. 한자나 쯔놈(Chu Nom, 이두와 같이 베트남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문자)으로 기록된 고문서들 대부분이 저이조로 만들어졌죠. 베트남 민화인 동호(Dong Ho) 판화를 찍던 종이, 그리고 왕세자, 왕세손, 왕후, 비(妃), 빈(嬪), 부마 등을 봉작(封爵)하던 책봉서(冊封書)도 저이조였습니다. 베트남의 역사와 고전문학, 그림들이 바로 저이조를 통해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  베트남 민화인 동호(Dong Ho) 판화를 찍던 종이로 ‘저이조’가 사용되었다.    © 아맙

 

수정: 장인들이 생산하는 저이조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늉: 전통 수공방식으로 생산되는 저이조는 여러 단계에 걸친 아주 섬세한 작업이 요구됩니다. 조(Do) 나무가 원료인데 팥꽃과나무에 속하는 수종이죠. 조 나무를 수확해 말린 후, 껍질을 뜯어내고 물에 푹 삶은 다음 회반죽에 3개월 정도 담가둡니다. 그 후 원료를 잘게 찢어 하룻밤 정도 물에 담궈 섬유가 잘 풀어지도록 합니다. 그리고 껍질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다시 2~6시간 정도 삶은 다음, 찬물로 씻어낸 후 일일이 손으로 껍질에 남은 티 고르기 작업을 합니다.

 

가장 어려운 공정은 종이를 뜨는 작업인데요, 나무 섬유를 미세한 틈으로 된 대발과 이를 지탱하는 발틀로 건져 지면을 만듭니다. 섬유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얽히게 여러 층으로 만드는 작업을 반복하고, 압착하여 물기를 빼고 말린 후에 한 장씩 벗기는 작업을 하면 저이조가 완성되죠. 아주 복잡하고 긴 과정을 너무 간단하게 설명해 드렸네요. (웃음)

 

<조 프로젝트>의 장인들은 껍질을 삶을 때 소다회나 가성소다와 같은 화학약품을 일절 사용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베고 말리고 삶고 담그고 찢고 두들기고 섞고 뜨고… 이렇게 수없이 많은 공정을 거쳐 생산된 저이조는 아주 가벼우면서도 질기고 오랜 시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저이조는 습기에 강하고 좀이 슬지 않기 때문에 그 수명이 500~700년에 이르기도 해요. 게다가 저이조는 소음과 더위를 막아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대량생산된 값싼 종이에 밀려 설 자리를 잃다

 

수정: 그런 저이조가 거의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늉: 제가 <조 프로젝트>를 만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5년 전 박닌 성을 처음 찾았을 때 이미 저이조를 만드는 장인들의 대부분 몰락해버리고 몇 명 남아 있지 않았어요. 전통방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데는 손이 많이 가고 품도 많이 드는 반면 소득은 턱없이 낮은 탓에, 사람들이 더 이상 종이를 생산하지 않게 된 거에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값싼 종이에 밀려 저이조가 설 자리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하지만 저이조의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인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중국인들이 베트남 북부의 조 나무를 싹쓸이하다시피 해서 원료를 구하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러다가 머지않은 장래에 저이조를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  학생들과 함께하는 ‘저이조’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   © 조 프로젝트

 

수정: 장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늉: 전통적인 저이조 생산마을이 밀집해 있던 박닌 성은 최근 들어 아주 빠른 속도로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장인들은 이제 더 이상 종이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기 힘든 상태였고요, 기술을 전수받아 그 뒤를 이어갈 후계자도 찾기 어려웠죠.

 

저는 장인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조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함께 일할 것을 끈질기게 설득했어요. 현재 박닌 성에는 저이조를 생산하는 장인들이 두세 가구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2018년까지 <조 프로젝트>는 박닌 성의 종이 주문량을 확대해 장인들의 소득을 현재의 두 배 이상 높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이조 장인들 “예술가로 대접받은 건 처음”

 

수정: <조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데 4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고 했는데요, 지금까지의 성과가 있다면요?


늉: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것은 장인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보장해주어서 저이조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저이조를 현대에 맞게 실용화하는 작업이 필요했지요. 지난 4년간 <조 프로젝트>는 저이조를 이용해 다양한 아이템들을 개발해내는 데 주력했어요. 그 결과 수첩, 명함, 달력, 사진첩, 그림소품, 갓등, 성냥갑, 책갈피 등 다채로운 상품들을 통해 저이조의 틈새 시장을 개척해낸 게 가장 큰 성과라고 봅니다. 최근에는 호텔이나 식당 등에서 안내책자, 표지판, 메뉴판 등을 핸드메이드(Handmade)로 제작해 달라는 주문도 늘고 있어요.


▲  <조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열린 ‘저이조’ 장인과 민화 화가와의 만남 프로그램   © 아맙

 

수정: <조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늉: <조 프로젝트>는 예술가들과 결합해 저이조를 활용한 예술작품으로 회화, 미술공예,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전시회를 기획해왔어요. 한번은 하노이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회에 십여 명의 장인들을 초청해 저이조 만들기 시연을 선보였는데요.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웠지만 “평생 종이를 만들며 살아왔지만 이렇게 예술가로 대접받은 건 처음”이라며 감격하던 장인들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학생들과 저이조를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도 있어요. 한 장의 저이조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학생들이 노트, 수첩, 엽서를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지더군요. 앞으로 <조 프로젝트>는 저이조의 전통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원래의 목적에 더 충실할 계획입니다.

 

언젠가 먼 미래에는 베트남에 종이박물관을 건립할 꿈도 갖고 있어요. 54개 민족으로 구성된 베트남에는 저이조뿐만 아니라 소수민족 고유의 다양한 전통종이들도 찾아볼 수 있지요. 오랜 세월 ‘저이조’가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품어주었다면, 이제 우리가 저이조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지켜줘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 기록 정리: 권현우 (아맙 공정여행 팀장)

 

<아맙> 카페: http://cafe.daum.net/doanhnhanxahoi  연락처: 070-7554-5670 (베트남 사무소)

<아맙> 후원 계좌: 신한은행 110-313-503660 (예금주: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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