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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지배하지도, 지배받지도 않을 삶을 꿈꾸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3. 2. 20. 08:00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빼앗긴 자들’ 外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있는 도은 님의 연재기사입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일주일 전만 해도 찬바람이 휘몰아치며 눈이 내렸는데, 요 며칠은 햇살이 따사롭다. 봄기운을 느낀 새들도 더욱 신나게 지저귀고, 강아지도 더 높이 뛰어오르고, 안쓰럽던 병아리들도 훨씬 명랑해 보인다. 눈부신 햇살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 나도 해바라기를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겨울이 슬그머니 물러서는 이 느낌을 뭐라 표현할까. 샛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살구꽃들을 휙 스쳐서 푸른 하늘을 나는 종달새의 기쁨?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도나 도나 Dona Dona"란 노래를 불러본다. 제비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은데, ‘이유도 모른 채 팔려가는 송아지의 슬픈 눈망울’이 가사에 나온다. ‘넌 왜 제비처럼 자유롭고 자랑스럽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없는 거니(Why don't you have wings to fly with, Like the swallow so proud and free)’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제비처럼 나는 법을 배우지(But whoever treasures freedom, Like the swallow has learned to fly)’
 
<빼앗긴 자들> 어슐러 K. 르귄이 그린 아나키즘 사회  

▲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2002)은 인간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통찰력이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뛰어난 SF 환상소설이다.     
 
지난 글에 이어서 이번 글도 권력과 권위에 지배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 또 권력과 권위로 타인을 지배하지 않을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들이다. 첫 책으로는 SF 작가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2002)을 골랐다. 이 책은 작가의 상상력과 통찰력이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뛰어난 SF 환상소설이다. 1974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어 많은 상들과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뒤늦게 번역된 이 책을 나는 세 번 정도 읽었다. 인류학적 탐구와 심리학 보고서처럼 읽힐 때도 있었고, 실존 문제와 사회 철학을 아우른 아나키즘 소설로 읽혀지기도 했다. 좋은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내용이 풍성하고 진지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과 사회 구조에 대해서 여러모로 깊이 있게 상상하고 해석할 여지가 많다.
 
오래 전부터 어떤 ‘몽상가’ 인간들이 꿈꾸어온 사회 조직을 실현시킨 것처럼 보이는 아나레스 행성이 있다. 이곳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사회이다. 모두가 소외받지 않고 일하며, 필요한 것들을 나누고 공유한다. 개개인의 실존을 빼고는 개인적인 소유란 게 거의 없다. 이상적인 아나키즘 사회의 은유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쌍둥이 행성인 우라스가 있다. 이 세계는 풍요롭긴 하나 모든 것을 개인이나 집단이 소유하고 있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당연히 남녀 차별적이고 경쟁적이며 권위, 음모, 배제, 통제로 굴러가는 사회다. 이 두 행성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서로를 달처럼 바라본다. 벽을 사이에 두고 상대 행성을 바라볼 뿐 진정한 교류는 없다. 주인공인 시간 물리학자 쉐벡이 고향인 아나레스를 떠나서 우라스 행성으로 가기 전까지.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고 작가가 아나레스를 모두가 행복하기만 한 유토피아 사회로 그리는 것은 전혀 아니다. 200년 전에 우라스에 살던 아나키스트 저항자들(오도니안들)이 심한 정치적 탄압을 받은 후에 망명지로 선택한 아나레스 행성은 혹독한 자연환경에 맞서서 힘겨운 생존투쟁을 벌여야 하는 곳이다. 망명자들은 모질고 척박한 자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투해야 한다. 책 곳곳에는 뜨겁고 건조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대기근 시기 동안 굶주리고 죽어가고, 그럼에도 자신과 서로를 돕고 책임지기 위해서 애쓰는 그들 공동체의 노력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아나키스트 사회에서 일이 조직되는 방법, 예술과 교육의 역할, 사랑과 성에 관한 태도 등을 잘 엿볼 수 있다. 남녀 사이의 관계나 페미니즘적인 시선도 흥미롭다. 사실 어떤 부분들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진다(작가의 의도겠지). 돈은 전혀 필요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일한다.

일자리는 개인의 선택과 각자가 특별히 지닌 흥미, 재능, 기술을 바탕으로 분배된다. 어떤 일도 강제적으로 할 필요가 없지만, 강력한 도덕률과 여론이 설득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분배된 일자리가 기대에 못 미쳐도 대다수 아나레스인들은 그걸 받아들인다. 희생을 감수하기도 한다. 물론 거기에도 여러 문제들이 있다. 평등 아래 숨은 미묘한 권력관계, 고독의 문제 등등.
 
‘어떤 사회도 인간 존재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해’
 
잘 쓰인 문학 작품이기도 한 이 소설은 개인의 실존적인 고독과 사회와의 연대 문제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사회가 잘 작동되고 있어도 개인은 자신의 실존적 고통과 죽음과 고독에 직면해야 한다.
 
“고통이란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거야”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고통은 진짜로 존재해. 고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태야. 고통이 오면 우리는 그걸 알아. 진실을 아는 것처럼 말이야. 물론 우리 사회가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굶주림과 불공평을 막는 것은 옳아. 하지만 어떤 사회도 인간 존재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해.”
 
“우리 삶의 실체는 사랑 속에, 결속 안에 있어. 사랑이 인간 삶의 진정한 상황이야. (…) 형제애는 고통을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는 걸 나는 말하려는 거야.”
 
우연히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주인공 쉐벡과 타크베르는 나중에 반려관계(우리의 결혼제도와 많이 다름)가 된다. 타크베르는 말한다.
 
“내게는 유대가 필요해. 진짜 유대 말이야. 몸과 마음과 온 생애 모든 세월의 유대. 나한테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두 사람은 ‘오랜 고독 뒤에 찾아온 친밀함과 돌연함 기쁨’을 맛보면서 ‘과거와 미래가 기억과 의도에 의해 현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이해하고 공유한다.
 
회색공기 대신 척박한 땅을 택한 이들을 위한 찬사
 
소설이 진행되면서 우라스에서 온갖 일을 겪은 쉐벡의 비판어린 평가가 나온다.
 
“당신네 우라스에는 국가와 그들의 무기, 부자와 그들의 거짓말, 가난한 이들과 그들의 비참함밖에 없어요. 여기서는 깨끗한 마음으로 올바르게 행동할 길이 없어요. 재산, 상실에 대한 두려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요. 당신들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지 않고는, 그들을 형제처럼 대해지 못해요. 오직 그들을 조종하거나 명령하거나 복종시키거나 속여야 하죠.”
 
미래의 지구를 은유하는 듯한 ‘테라’ 행성에서 온 대사의 말도 아주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세계, 나의 지구는 폐허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망가뜨린 행성이죠.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번식하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싸워댔고 죽었어요. 식욕도 폭력도 통제하지 않았어요. 우리 자신을 파괴한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세상을 먼저 파괴했죠. 우리 지구에는 숲이 남아 있지 않아요. 공기는 회색이고, 하늘도 회색, 언제나 뜨겁습니다.”
 
나는 이 책을 자유라는 비전을 선택했으나, 풍요와는 거리가 먼 세계에 정착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었다. 지배욕과 소유욕 대신 연대와 책임감이라는 이상을 품었으나, 고립되고 황량한 세계에 적응해야만 했던 이들, 그래서 지치고 수척해졌으나 당당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에게 바치는 찬사로 읽었다. 문학 작품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살짝 도교적 분위기를 띄던 인상적인 구절 하나를 인용해본다.
 
“생기 넘치는 삶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삶을 위해서는 시간을 우리 편에 두어야 한다. 시간에 맞서지 말고, 시간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내 식대로 번역을 조금 고쳤음)
 
인간을 ‘협동하는 존재’로 본 크로포트킨 

▲ <만물은 서로 돕는다>(P. A. 크로포트킨, 르네상스, 2005)는 1902년에 출간되어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인정받는 책이다.      
 
다음 책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P. A. 크로포트킨, 르네상스, 2005)이다. 1902년에 출간되어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인정받는 책이다. 한국에서는 식민지 상황이었던 1920년대에 크로포트킨의 글들과 아나키즘 사상이 처음으로 소개 되어 신채호, 이회영, 박열 등이 활약했고 아나키즘 단체들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국 전쟁이후로는 완전히 맥이 끊겼다가 1990년대에 <상호부조론>이란 이름으로 크로포트킨의 이 책이 번역된 적이 있다.
 
나는 한참 전에 <크로포트킨 자서전>(우물이 있는 집, 2003)을 먼저 읽고서 감동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 당시 사춘기를 보내던 큰 딸아이한테도 읽어보라고 권했고, 아이도 읽고 독후감 비슷한 걸 쓰기도 했는데, 내용을 기억할 런지 모르겠다. 폴 애브리치가 지은 <아나키스트의 초상>(갈무리, 2004)은 가슴아파하며 읽었다. 모진 탄압, 체포, 억울한 죽음들 때문에.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청년 시절에는 황제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했다가 시베리아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국가에 대한 신념을 버린 사람이다. 시베리아에서 행해진 형벌제도의 참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후 동시베리아와 만주를 여행하며 정치범들과 사귀고, 소유를 비판한 프루동의 책들을 읽고, 지리학 연구에도 몰두한다. 이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갔으며 망명지 유럽 도시들에서 거의 평생을 보내다가 러시아 혁명 후 고향에 돌아갔지만 곧 죽음을 맞이한다.
 
아나키즘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프루동도 아주 흥미로운 사상가이나 여기서는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가자. 그는 지대와 소작료 등의 불로소득과 스스로 일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부자들의 재산 소유권을 도적질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소유권 대신에 임대권리 혹은 관리권을 주장했다. 즉, 인간이 일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주거, 토지, 도구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권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자연과학자, 지리학자 생물학자였다. 다윈처럼 관찰을 통해서 자연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계에 생긴 일은 인간 사회의 모델일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였다. 경쟁과 투쟁을 인정했지만, 진화의 중요한 요인에는 서로 돕는 상호부조의 법칙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 책에서 나름 실증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인간을 협동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상호부조는 작은 곤충들이나 동물들의 본능이기도 했고 자연의 법칙이었다. 이 책은 다윈주의자인 토마스 헉슬리의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1888)이란 논문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으로, 이 논문도 책 뒤에 부록으로 번역되어 있다. 본문에서 미처 말하지 못해서 뒤에 붙여놓은 부록들이 소소하게 재미나다.
 
이 책은 자연 관찰과 인간역사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도 된다. 과격하고 거창한 이론서가 아니라 자상하고 차분하고 재미도 있다. 무척추 동물들, 개미와 꿀벌, 새들의 습성들을 서술하고 있고, 원시 사회나 길드 조합 중심이었던 중세도시에서의 자발적 협동이나 근대 네덜란드 촌락의 상호부조제도도 탐색하고 있다. 인간성의 긍정적인 면모를 깊이 신뢰하는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이 시대 청년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정글의 법칙을 주입받고 자란 청년들에게 말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주장이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 그로 인한 분쟁들은 항상 미화되고 주목을 받아왔다. 지금껏 쓰인 역사도 전적으로 신권정치, 군사권력, 전제정치 그리고 최근에는 부자 계급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만들어진 방식이나 수단만을 묘사한다. (…) 우리 시대가 이룬 산업의 진보를 만인에 대한 개개인의 투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가 내리는 원인을 모르면서 진흙으로 만든 우상 앞에 제물을 바쳐서 비가 내렸다고 여기는 꼴이다. (…) 가장 낮고 학대받는 계층에 속한 비천한 사람들에게는 상호부조의 원리야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근간이 된다. 인류가 상호투쟁보다는 상호부조의 원리를 널리 확장시켜가야만 훨씬 더 품위 있게 발전해갈 수 있다.”
 
아나키즘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 <아나키즘 이야기> 

▲ <아나키즘 이야기>(박홍규, 이학사, 2004)는 쉽고 흥미롭게 아나키즘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아나키즘이 철저히 무시되어온 나라도 드물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논의된 사회철학이나 어떤 사회 사상사에서도 아나키즘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한국이란 나라가 워낙 국가주의, 중앙집권주의, 권력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 기계주의가 막강하게 퍼져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그러니 <아나키즘 이야기>(박홍규, 이학사, 2004)를 구해서 읽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박홍규 선생이 지은 다른 많은 책들처럼 이 책도 쉽고 흥미롭게 아나키즘을 소개하고 있다.
 
맨 처음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이란 노래가사로 시작해서 온갖 아나키즘을 다룬다. 왜 아나키즘이 오해를 받았는지, 그 기원은 무엇이고 어떤 유형들이 있는지, 어떤 대단한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는지, 아나키즘이 주장한 인간론과 사회론은 무엇인지, 아나키즘과 예술은 어떤 관계인지, 교육과는 어떤 관계인지를 훑어볼 수 있다. 아나키즘과 생태주의 그리고 페미니즘과의 관계도 살짝 언급이 된다.
 
“아나키즘은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자고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너무나 비자연적으로 살고 있다는 점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나키즘은 그러한 생각과 생활 태도에 도전한다.”
 
“아나키즘은 모든 억압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반항 정신에서 비롯된 분노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 반항은 인간의 본능이다. 지렁이조차 밟히면 꿈틀거린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세계에서도 복종과 체념만큼 명예롭지 못하고 어리석으며 비열한 성격 내지 관습은 없다.”
 
“경제적 생산의 문제는 성장에 관한 문화적 강박관념, 무한한 팽창에 대한 희망, 무한히 사고 버리도록 소비자를 유도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사유재산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생겨난다. 문제는 우리의 의식이 아니라 국가이고 사회구조이다. 바로 아나키즘이 대결하는 국가이고 사회이다. 그 대결을 기피하고 양심이나 초월 따위의 관념에만 젖어서는 어떤 근본적인 해결도 불가능하다.”
 
참으로 솔직하고 당당하다. 청년들이 한번 읽고서 토론해보길 바란다. 수많은 질문들이 솟아오르고 의문이 들 것이다. 사는 게 무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사회가 대체 어떻게 만들어져 온 것인지 등등.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을 살펴보다 

▲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숀 쉬한, 필맥, 2003)은 풍부한 역사 지식, 현대 아나키즘 운동 현장에 대한 생생한 관찰, 독특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진 책이다. 
 
마지막 책은 2003년 영국에서 나온 책이다.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숀 쉬한, 필맥, 2003). 놀랍게도 바로 그 해에 한국에서 번역되었다. 그렇게도 아나키즘을 구박하더니 왜 갑자기 관심을? 이유는 가장 민감한 시대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은 첫 시작부터 바로 1999년 시애틀에서 벌어진 세계화 반대 시위, 2000년 체코 프라하에서 벌어진 국제통화기금(IMF) 반대 시위, 2001년 캐나다 퀘벡에서 벌어진 반자본주의 시위의 아나키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폭력의 옷을 벗고 축제화한 아나키즘이 새롭게 등장했다고 본다. 폭탄이 아닌 춤추고 노래하는 저항,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위 등등.
 
이 책은 단순한 해설서나 개론서 이상으로 풍요롭고 현란하다. 전공이란 틀에 꽉 갇혀서 남들 한 이야기들을 그대로 베껴먹고 사는 상아탑 학자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숀 쉬한은 역사, 철학, 문학 여행기를 쓰는 사람이라고 한다. 유명한 여행서 ‘론리플래닛’도 여러 권 썼다나. 하여간 아나키즘에 대한 풍부한 역사 지식, 현대 아나키즘 운동 현장에 대한 생생한 관찰, 독특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고서 글을 쓴다. 재미나게 읽었다. 새로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저자의 주장에 다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다.
 
중앙집권주의를 비판한 프루동에서 슈티르너에 이르기까지 고전적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푸코나 촘스키 같은 현대 아나키스트들의 사상도 소개하고 있는데, 푸코를 아나키스트로 보는 견해는 여기서 처음 읽었다. 또 니체와 마르크스의 어떤 부분도 아나키스트로 해석하고 있어서, 이 장도 흥미롭게 읽었다.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게 신선했다.

그리고 영국 디거스주의자들, 러시아 마흐노, 스페인 시민전쟁, 간디, 68년 유럽 학생운동, 마인호프, 사파티스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엿볼 수 있다. 또 영화나 문학에 나타난 아나키즘 사상이나 미학도 많이 나온다. 빌헬름 라이히의 성 해방 사상, 윌리엄 블레이크, 섹스 피스톨스 같은 록 그룹 소개들도 재미나다.
 
(하지만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다. 문장은 그런대로 읽히는데, 인명 번역이 엉망인 게 많다. 예를 들어, ‘어슐러 르귄’을 ‘우르술라 르갱’으로, ‘존 저잔’을 ‘존 저전’으로, 테오드르 카진스키의 ‘유나버머’를 ‘유나보머’로 번역해놓은 것은 좀 그랬다.)

 '상상해봐, 소유도 탐욕도 굶주림도 없는 세상을'

글을 마무리 하면서 프루동의 유명한 글과, 이 문체를 본떠서 숀 쉬한이 현대 사회가 어떻게 국가와 자본에 의해 관리되는지를 묘사한 대목을 인용하고 싶다.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활동하고 거래할 때마다 기록되고, 등록되고, 세금이 부과되고, 날인되고, 측정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평가되고, 허가되고, 인가되고, 경고를 받고, 금지되고, 선도되고, 교정되고, 처벌받는 것이다. (…) 사소한 저항을 해도 억압당하고, 벌금물고, 멸시당하고, 괴롭힘 당하고, 추적당하고, 학대받고, 구타당하고, 무장 해제당하고, 투옥되고, 재판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당하고, 추방되고, 희생되고, 팔려가고 배반당하는 것이다”(이상 프루동 글)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되고, 캠코더에 녹화되고, 감시당하고, 감독당하고, 문서화되고, 분류되고, 항목별로 나눠지고, 암호가 부여되고, 사진 찍히고, 인가되고, 디지털화되고, 바코드가 찍히고, 범주화되고, 할인 카드화되고, 사은품 카드화되고, 유전자 기록이 보관되고, 폐쇄회로 화면에 잡히고…….”(이상 숀 쉬한 글)
 
이 문장들을 읽다보면 숨이 막히고 답답해진다. 존 레논의 이매진을 크게 부르던지, 아님 속 시원한 문장을 하나 더 써야만 할 것 같다.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상상해봐, 어떤 소유도 탐욕도 굶주림도 없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세계를 공유한다고.”
 
“아나키즘은 학설이 아니다. 사상과 행동의 역사적 경향이다. 이 경향은 계속해서 새로워지고 발전하는 수많은 길을 가지고 있으며,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 길이다.” (노엄 촘스키) 나도 그러하리라고 믿고 있다. 진정성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이토록 가득한데 어찌 그러지 않을까.  (도은)

   <빼앗긴 자들> 어슐러 K. 르귄, 황금가지
   <만물은 서로 돕는다> P. A. 크로포트킨, 르네상스
   <아나키즘 이야기> 박홍규, 이학사
   <우리시대의 아나키즘> 숀 쉬한, 필맥  

      여성주의 저널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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