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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꽃을 던지고 싶다> 22. 전생의 업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30회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www.ildaro.com
 
산다는 것이, 평범하게 산다는 것조차 나에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는지, 사상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세우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준 그 날의 기억을 여전히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어렵기만 하다. 나의 운명을 선명하게 바꾸어 놓은 그 날의 기억.
 
우울한 날이면 인사동에서 고시원이 있는 대학로까지 걸어가는 길을 나는 좋아했다. 대학을 입학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사랑과 수없이 오고 갔던 그 길을 걸으며 어쩌면 잃어버린 날을 추억했는지도 모른다.
 
학원장의 부인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사동에 들렸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두운 고시원 방으로 들어가기엔 견딜 수 없이 슬픈 감정이 몰려 왔고, 짙게 나를 짓누르는 죄책감에서 조금은 가벼워지고 싶었다. 미술관이라도 들러서 전시회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사동은 밤보다 낮이 더 화려하고 번잡하다. 그런 생기 있는 낮이 나는 좋았다.

▲ “남자 때문에 많이 힘들게 살았겠다. 남자가 많다. 가엾게도 힘들었겠다. 힘든 삶을 바꾸어 줄 수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일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시회 포스터들을 살피고 있었다.
 
“남자 때문에 많이 힘들게 살았겠다. 남자가 많다. 가엾게도 힘들었겠다. 힘든 삶을 바꾸어 줄 수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목소리는 무심하게 포스터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나에게 더 나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전생에 기생이어서, 남자들을 많이 힘들게 해서 아가씨가 지금 힘든 거야. 아가씨에게 한을 품고 죽은 남자들이 너무 많아. 그 한을 풀어줘야 해. 주변에 남자 많지? 다 전생에 쌓은 업 때문이야.”
 
나는 포스터에 응시했던 시선을 거두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보았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울리는, 풍채가 있고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가진 승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옷을 보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또한 설명되지 않는, 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나의 삶의 사건들의 원인을 찾은 듯했다. 그것 말고는 저주받은 듯한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아가씨가 그래도 착하게 살아서 나를 만나게 된 것도 부처님의 은공이고, 내가 아가씨를 만난 것도 부처님의 뜻이니, 내가 아가씨의 운명을 바꾸어줄게. 제사를 지내야 해.”
“제사를 지내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내가 마침 제사를 지내려고 했어, 아가씨를 위해 한번 더 지내면 되겠어. 제사 지내러 가지.”
“신세지고 싶지 않은데요.”
“앞으로 좋은 일 많이 하고 살아.”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저주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게만 해 준다면 나는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아니, 드디어 내 저주스런 삶을 벗어나게 해줄 은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하리라. 설령 나에게 죽으라고 한다면 그것도 나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듯했다.
 
그 사람이 간 곳은 인사동에 위치한 한 여관 앞이었다.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나에게, 그는 조용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며 종업원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방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스님은 나에게 한을 품은 원귀가 많다며 자신에게 몸 보시를 하면 해결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마음 한 편으로는 ‘말도 안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래, 이렇게 해서 삶이 바뀐다면 나는 못할 것이 없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또 한번의 강간을 당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절망으로 돌아섰다. 아주 조그마한 기대. 솔직히 먼지 정도 크기의 기대밖에 없었지만 결국은 이 스님이 원하는 것도 내 몸뚱아리였을 뿐이다.
 
스님이 방을 나가고 나서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물이 났다. 내 자신이 싫었지만 정말 스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런 말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취약해진 내 상태도, 나 자신도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남자가 스님일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포기가 되었다. 내 몸에서 더러운 벌레가 기어가는 듯했다. 무엇 때문일까? 왜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내 몸을 원하는 것일까? 나는 예쁘지도 않고 섹시하지도 않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내가 전생이 기생이어서, 창녀가 될 운명이라서 그런 걸까?
 
더럽게 느껴지는 몸을 씻어내고 옷을 입고 나오려는 순간, 그 남자가 놓고 간 15만원이라는 돈이 눈에 들어왔다. 창녀가 된 것 같았다. 아니, 창녀가 되었다. 창녀가 되는 일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찾아왔다. 그 남자가 놓고 간 15만원이라는 돈이 지금도 너무 끔직하다. (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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