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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육아 담론, 아빠는 ‘부재 중’ 
 
▲접근성 :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양쪽에 비슷한 정도의 접근성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아이들과의 교류가 부모 중에 한쪽에만 치우치고 제한되어 있진 않은가?
▲경계 : 우리 부부는 아이 눈에 부모로서 훌륭한 '팀'으로 비치는가? 우리 부부는 아이 아빠 혹은 엄마로서 상대방을 충분히 존중해주는가? 가정 내에서 우리 부부만 공유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 있는가? 아이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 잘 지켜지는가? 혹은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부부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가능하진 않은가?
▲결속 : 엄마와 아들 사이에서 아버지가 배제되거나 아빠와 딸 사이에서 어머니가 배제되는 일은 없는가? 
           -『왜 사랑하길 두려워하는가』 (한스 옐루셰크 저, 김시형 역) 중에서 -

 
우연찮게 EBS의 '부모60분'을 여러 편 보게 됐다. 아이가 5살이 됐는데도 엄마역할이 쉽지는 않은 터였다. 남들의 육아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이 방송에서 적잖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데 지치고 분노에 휩싸인 상태였다. 엄마의 상태가 고스란히 아이에게 되갚아지는 형국이어서 엄마도 아이도 우울했다. 엄마들은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 방송을 봤을 때 일단 나만 아이 문제에 힘들어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사례를 보며 '엄마되기'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그동안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반가웠다. 그런데 세 편 네 편, 이 방송을 보고 있노라니 차츰 아이의 떼쓰기와 우울을 해결하는 방법이 다시 엄마만의 숙제가 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모60분이 아니라 엄마60분?

▲ 책으로 발간된 EBS '부모60분'. 육아상담 프로의 인기는 여성들이 직면한 육아스트레스를 반영한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일과 가정을 양립하느라 혹은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느라 혼이 나간 엄마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라고, 함께 즐기라고 충고하곤 했다.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줬는데 그 숙제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 하찮게 치부해서 거론하지 않았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떼 쓸 때 지혜롭게 처리하는 방법, 어린이집을 싫어하는 아이와 교감하기, 밥투정하는 아이의 대처법 등 참고할 만한 실질적인 정보들이 쏟아졌다. 엄마들은 좀 더 참아야하고 좀 더 관용을 베풀어야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아빠는 열외로 치부됐다. 아빠와 친교를 맺는 방법 등이 제시됐지만 아빠의 적극적인 '협조'가 보이지 않았을 때 해법은 종종 헛돌았다.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어느 날은, 전문가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 엄마에게 남편과 함께 상담을 받을 것을 권했다. 아이가 셋이었는데 엄마는 전업주부였다. 남편은 늘 10시 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일하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아빠는 워커홀릭인 셈이었다. 직업이 대기업 연구기관 연구원이라 했다. 전문가의 상담요청에도 그 남편은 언제나처럼, 시간이 없어서, 프로그램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전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남편을 향해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남편도 선택을 해야 한다고, 회사는 늘 인력의 100%를 쓰려고 추동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가정을 위해서는 스스로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70대 30 정도로 가정에 할애를 했다면 이제는 60대 40 정도로 조정을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나머지 30도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그녀의 남편이 들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아내의 방송 소식을 알았다면, 다시보기를 통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내용을 챙겨봤다면, 본인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아이와 아내에게 보인 그의 무관심이 그동안 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됐는지, 그 방송이 인식의 계기가 됐다면 이 부부에게 희망은 다시 피어날 수 있었으리라.
 
어쨌거나 이 방송은 순전히 '엄마'들을 중심에 둔 프로였다. 상담을 요청하는 것도 엄마, 해법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사람도 엄마였다. 부모라 함은 분명 아빠도 포함되는데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사람은 노상 '엄마들' 뿐이었다. 남편들은 늘 부재중이었다. 부모60분이 아니라 엄마60분이라 함이 타당하다. 무엇보다 이 방송시간대는 평일 오전 11시대, 일 나가는 아빠들은 도무지 볼 수가 없는 때다. 주요 시청자를 엄마, 그것도 전업주부를 겨냥한 프로다.
 
성격 좋은 남자, 여자가 만든다?
 
사실 엄마의 육아 스트레스는 남편/아빠와의 관계로부터 생겨나기도 하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엄마들의 구조란 아빠들의 구조 아래에서 구축되기 마련 아닌가.
 
내가 육아문제를 다룬 방송들을 보며 기대한 것은, 어떻게 하면 아이와 아빠, 엄마의 관계를 균형 있게 조절해 나갈 것인가였다. 어떻게 하면 도통 육아에는 관심이 없는 남편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행동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조언이었다. 그의 각성이 있다면 엄마의 짐은 조금 편안해질 텐데 말이다. 엄마가 행복하면 그 행복이 아이에게 저절로 흡수될 수 있을 텐데.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한 쪽으로 치우친 구조는 그대로 놔두고 눈앞에 있는 문제만 해결하려 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더 심각한 것은 부부 문제를 호소하면, 아내 입장이 아니라 남편 입장을 보라고 종용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아내의 말 한마디가 남편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책에서는 이런 명제를 내놓기도 했다. '아침에 자리에 누운 채 남편을 출근시키는 아내는 절대로 그 남편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또 <성격 좋은 남자는 여자가 만든다>라는 책도 있다. 전업주부인 동생은 이런 책들을 보면 육아는커녕 남편을 잘 못챙겨준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이런 책들은 남편에게 쏟아놓을 불만들을 원천봉쇄한다.
 
얼마 전, 즐겨보는 한 신문에서 나와 유사한 문제로 상담을 자청한 사람이 있었다. "혼자 돈 벌고 애 보고 집안일까지… 열 받아요" 라며 어느 30대 전문직 여성이 호소해왔다. 3명의 전문가가 각기 처방을 내렸다. "남편을 기다려주세요. 계속 남편을 수동적이라고 보시는데, 어쩌면 앞날이 불안해서 머뭇거리거나 지나치게 신중한 사람일 수 있어요"였다. 동시에 가장 쉬운 집안일부터 도움을 청해보라고 조언했다. 분노를 소통의 에너지로 바꾸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머지 두 전문가의 조언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고개 숙인 남편에게 용기를 주라거나 남편 스스로 선택하도록 정리해주라고 충고했다. 여성에게 감정노동을 더 많이 하라고 채찍질하는 꼴이다.
 
여성이 가정 울타리를 넘어 사회를 향해 남편과의 문제에 소리를 내지른 것은, 소통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녀는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의 입장을 존중하고, 그녀 편에서 남편을 바라봐주길 바랐을지 모른다. 한 마디로 적절한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녀를 대신해 남편을 깨우치게 할 각성제를 처방해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요는 그녀의 각성이 아니라, 남편의 각성 말이다.
 
부부문제나 육아문제에 있어 언제나 도마에 오르는 것은 엄마나 아내, 여성들이다. 남편/아빠가 볼 수 있는 시간에, 들을 수 있는 구조에서 남편 역할 혹은 아빠 노릇을 중심에 두고 담론을 펼쳐야 할 것이다. (김은혜)

* <일다>는 전주 <여성다시읽기>와 협력 관계를 맺고 콘텐츠를 교류하기로 하였습니다. <여성다시읽기>는 올해 19년 된 전주 지역 풀뿌리 여성모임으로 여성주의 문화비평지 "여성다시읽기"를 계간 발행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여성다시읽기’ 2011년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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