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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11) 
 
“벌써 20년입니다. 1991년 5월…. 그때 군 복무 중이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마음의 짐이었고 어두운 구석이었습니다. 20년이 다 가도록….”
 
한 친구가 김귀정 열사의 추모음악회를 홍보하면서 소셜네트워크에 올린 글이다. 김귀정은 1991년 5월 25일 충무로 거리시위에서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대학생의 이름이다. (당시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김귀정 열사는 노태우 군사정권의 공안통치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망 후 추모 2주기를 맞아 민사소송이 제기됐으며, 이후 법원에서 국가의 과잉진압 책임을 인정했다.) 그 친구가 잊고 있던 김귀정 열사를 기억하게 해주었다. 그 사건이 벌써 20년이 되었다는 데 나도 좀 놀랐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그 해 봄에는 정말 많은 학생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그들이 다 누구였는지 지금은 기억에도 없지만, 김귀정 열사를 또렷이 기억하는 건 그녀가 있던 현장에 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배를 복대로 칭칭 감고 편한 바지와 헐렁한 남방으로 갈아입고 옛날처럼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맸다. 그렇게 그날 집회에 나서는 난 어느 때보다 의연하고 비장한 모습이었다. 당시 나는 임신 8개월이었다.
 
임신을 하면서 채 몇 달 다니지 않은 공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급진적인 학생운동가들은 공장 등 열악한 노동현장에 취업하여,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의식 교육과 민주 노동조합 설립운동 등을 함께하였다.) 그만하라고 말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체력에 부쳤고 작업환경도 좋지 않아서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장 활동을 중단했다고 해서 사회운동을 포기한 것이 아닌데, 임신한 상태로 어떤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열심히 자기 활동을 하는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출산을 기다리는 일이 일상이 되어갔다.
 
무엇보다 남편이 편안하게 사회운동을 할 수 있도록 시댁의 대소사나 소소한 일들은 내가 맡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누구든 해야 할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어머니의 생신이나 시누이 아이의 돌을 챙기는 것이 어떤 사람의 ‘운동’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운동권 출신 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은 남편을 대신해 시댁을 챙기는 것이 그녀들의 ‘활동’이 되고, 집안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임무’가 된 경우도 많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그 여성들은 자아실현이나 운동가로서의 활동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때는 나도 이렇게 해야 하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상황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건 아닌데….’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고,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내게 아무도 손을 뻗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살다 죽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직도 내가 건재하다는 걸, 여전히 사회의 변혁을 위해 왕성한 활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꾸만 고립되어 가는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힘들었다.
 
그러던 중,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충무로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오랜만에 가두시위에 참여해서인지 흥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시위대에 끼어 구호를 외치고, 최루탄 연기 속에서 캑캑거리면서 시위대를 쫓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식의 가두시위가 내가 찾고 있던 출구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내 시위현장에 도착했을 때의 흥분은 가라앉았다.
 
어스름 저녁,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한 역에서는 구토를 하기까지 했다. 그 후에도 몇 번을 내려 승강장에서 숨 고르기를 반복하면서 겨우 돌아갔다. 그리고 밤새도록 배가 뭉쳐 고생을 했다. 어떤 만족감도 느끼지 못한 가두시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도 아닌 곳을 ‘기웃거렸다’는 마음이 들면서 더욱 슬퍼졌다. 무엇보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가두투쟁에 나가는 비장함과 처절함이 싫었다.
 
그날 저녁 한 여학생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꽃잎 같은 목숨이 또 스러지고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오랫동안 출구를 찾지 못했다. 이제 집에서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아들을 꼭 낳는 것이 내 ‘중요한 임무’에 덧붙여졌다.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서 빠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20년 전 그날, 가두투쟁에 나가기 위해 신발 끈을 묶던 그녀를 지금은 웃으면서 바라본다. 그녀 뒤로 꽃잎이 진다. 5월, 꽃이 지고 있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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