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밥 짓기, 무려 밥 짓기[머리 짧은 여자 조재] 아직은 이벤트, 밥 지어 먹기 부모님의 별거 이후 집에서 눈에 띄게 침체된 공간은 주방이었다. 새삼스럽고 진부한 스토리다. 주방이 곧 엄마의 공간이었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엄마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의 주식은 라면이 됐다. 내 몸의 3할은 라면이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직접 반찬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어쩌다 한 번씩 찌개를 끓이거나 두부조림 같은 간단한 반찬을 만들었다. 엄마는 가끔 연락해서 그 소식을 듣고 ‘잘 했다’고, ‘네가 여자니까 그렇게 가족들을 챙겨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여자니까, 누나니까 집안을 살뜰히 챙기라는 충고는 페미니즘의 ‘페’자도 몰랐던 시절에도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내 행동은 의도와 상관..
‘과정형’ 인간[머리 짧은 여자, 조재] 어제보다 오늘 더 새해가 됐다고 조금 들떴다. 어제나 오늘이나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 새로운 다짐을 할 에너지를 얻는 것만으로도 그저 기분이 좋다. 올해는 ‘조금 너그러워지기’를 목표로 삼았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너그러워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일상 관계에서의 걸림 때문에 피로를 호소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가지 단어로 사람들을 지레 판단하고 마음속으로 벽을 치기 바빴다. 물론, 때에 따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관계 차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터지는 사건사고에 질려버린 상태이다 보니,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조차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가 꽤 있었던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