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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국에도 다양한 가족들이 살고 있다
 일기장에서 그루터기 모임의 기록을 뒤적이며  
 

[일다는 장년층 레즈비언들의 삶과 진솔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 ‘그루터기’ 회원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그루터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35세 이상 여성이반모임입니다. –편집자 주]


때는 2007년 12월 22일 토요일.

 
그루터기 송년회가 있는 날이다. 세 번째 뵙는 선배들의 모습이 너무 다정해서 마치 이모들을 만나는 기분이다. 저녁 먹기 전에 농구를 하자고 밖에 나갔다. 처음에는 하기 싫다던 사람들이 승부욕에 불타 놀라운 협동심을 발휘했다. 역시 근성 있다니까.
 
저녁시간이 되었다. 1박 2일이라 거나하게 취할 줄 알았지만,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먹거리 앞에서 이야기 꽃을 피울 뿐, 술에 흥청거리는 이가 없다. 00선배 커플이 준비해온 샐러드 맛에 황홀할 뿐이다. 다음 송년회 때는 나도 뭔가를 싸와야지.
 
식사가 끝나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여성이반 영화라는데 배가 불러서 졸다 보다 졸다 했다. 어둑어둑해지니 다들 길게 누워 소곤거리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멀리서 피자가게를 하는 선배들이 늦게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케이크를 준비하고 촛불을 켰다. 생일인 분들은 축가합창에 행복해 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정든 이들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밤이 깊자 하나 둘씩 쓰러져 잠들고, 체력 좋은 사람들은 대선 결과에 대해 토론을 했다. 나는 그 곁에서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튼 시민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에요….” 중얼거리며 어느새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산책을 다녀 오신 분들이 주워온 잣을 까서 한 움큼을 만든 다음 애인과 후배들에게 먹여주셨다. 아하, 이런 분위기 마음에 든다.
 
아침을 먹은 뒤 송년회 계획표는 버려진 채, 씨름판이 벌어졌다. 이불을 두툼하게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제일 약해 보인다는 나와 00이 먼저 시작했다. 내가 꼴등이다. 차츰 결승으로 올라가며 다들 예상한 대로 최강자가 가려지는데, 그래도 나는 처음 보는지라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운동을 끝내고 다들 편안히 앉아서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소재는 무서운 이야기였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 틈바구니에 자신의 성격과 직업, 과거사의 조각들이 담겨 있어서 그 사람을 엿보게 한다. 각자 직업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지만, 공통된 상처도 있고 공통된 관심사도 있다.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꿈꾸어 볼까? 선배들이 운을 떼본다.
 
그로부터 6개월 후, 2008년 6월 22일.
 

2008년부터 그루터기 주말농장을 시작했다.

그루터기 주말농장에서 잡초를 뽑는 날이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모 일이지만, 고구마 밭에 가서 무럭무럭 정도가 아니라 정글을 이루고 있는 잡초를 없애기로 했다. 나는 낫을 준비해 갔다. 편한 옷과 모자, 수건, 썬 크림, 물, 간식, 돗자리…. 준비물도 많다.

 
밭에 도착하니 부끄럽다. 다른 밭에서 일하는 분들이 그동안 우리 밭을 보며 얼마나 웃었을꼬. 고구마 잎이 보이지를 않는다. 잡초를 키우는 줄 알 거다. 선배들은 벌써 용맹하게 일을 시작하고 계셨다. 좋아. 해보자.

 
자신이 맡은 고랑을 다 해치우면 다른 사람 고랑으로 간다. 앞에서 베고 뒤에서 뽑는다. 오후 3시에 시작한 일이, 노을이 지평선에 가득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다들 녹초가 되었다.

 
이제 고구마가 고구마가 아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고구마가 고구마가 아니다. 그것은 음, 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시간이다. 삶이 베어있는 겸손한 시간들. 한 선배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제 농산물 살 때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어.”

 
왜 농사짓는 대안학교가 세워졌는지 알 것 같다. 세상사람들 모두 농사를 지어봐야 한다. 특히 정치인들, 사기꾼들은 선거에 나가기 전에, 또 감옥에서도 농사를 짓게 해야 한다.

 
일 끝내고 함께 식당에 갔다. 마침 생일 가까운 분들이 있어서 축가를 부르고 케이크를 먹었다. 당연히 고구마 케이크다.

 
부동산 일을 하는 분들에게 재테크 이야기를 주워듣고, 촛불시위 이야기도 뜨겁게 나누고, 강아지 키우는 이야기도 즐겁게 오갔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미 수확한 상추와 쑥갓을 나누고 다음 모임에서 토론할 동성애 관련 책들도 나누어 빌렸다.

 
몸은 고단하고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꼭꼭 찼다.

 
서로에게 꿈을 꾸게 하는 가족

 
6월 29일은 00선배의 생일이라고 집에 초대를 받았다. 선배의 집은 오래된 아파트여도 나무가 많아서 좋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나는 살구를 줍느라 지체했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노랗게 익은 살구가 후두두 떨어져 자꾸 뒤돌아 보게 된다.

 
근처 마트에서 오미자차를 사서 들고 갔다. 문 앞에 도착하니, 맛있는 냄새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회와 싱싱한 과일들, 매운탕, 마카로니그라탕, 새우튀김, 꽃빵과 고추잡채…. 내 작은 위장이 원망스러웠다.

 
식사를 마친 후 근처 공원에 산책을 갔다. 잘 꾸며진 공원에서 아이들이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다녔다. 아기들은 잉어에게 먹이를 던졌다. 부들과 연 같은 물풀들이 자라고 붓꽃, 나리꽃, 부처꽃도 하늘거렸다. 그늘 아래에서 할아버지들이 치매예방 놀이에 빠져계셨다. 사진을 근사하게 찍는 선배 한 분이 바쁘게 셔터를 누르셨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보내는 행복에 겨웠다.

 
나이 들면 마당이 있는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는 선배, 그 집에 놀러 가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자는 친구, 그 집 지하에 소음방지벽을 만들고 그루터기 밴드를 꾸려 연주를 하자는 후배.

 
가족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은 외연을 가진 말이다. <두 엄마>를 쓴 무리엘 비야누에바 페라르나우가 살고 있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여기 한국에서도 다양한 가족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외면하고 침묵하지 않으면 서로에게 꿈을 꾸게 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다. 2008/09/29 일다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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