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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그랜딘의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질병으로서의 ‘자폐증’을 넘어 
 
템플 그랜딘은 주류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자폐증으로 분류하는 증상’을 경험했다고 밝힌 세계적인 가축 설비시설 디자이너이자, 동물학 교수(콜로라도 주립대)다. 동시에 시리즈 저술을 통해 자폐증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 평생을 시설에서 살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던 템플 그랜딘의 ‘자폐증’이란 이러하다. 책을 쌓아 집을 짓고 들어가서 논다든지, 장난감을 규칙과 달리 가지고 논다든지, 사람을 피해 혼자 있거나 눈을 맞추고 안기는 것을 싫어했다든지, 한없이 한 점을 응시하는 행동 등.

감각처리 과정이 다르다

저자의 경험을 포함해 비자폐인이 볼 때 더 이질적인 행동들도 있다. 대변을 블록 대신 갖고 노는 아이, 주변 환경과 구분되는 몸의 경계를 파악하기 어려워 주기적으로 자신의 몸을 때려서 어디까지가 내 몸이고 어디부터는 환경인지 알아야 하는 아이, 미동도 하지 않는 아이. 템플 그랜딘은 소녀 시절 ‘기소’(prosecution)의 발음이 멋지다고 생각해서 좋은 것을 본 순간, 감탄사를 대신해 ‘프러시큐션!’이라고 함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한다. 경계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확실히 소수자의 것인 이러한 ‘자폐증상’들은 세계가 공통적으로 지닌 규칙과 판이하게 다른 사고체계와 언어체계도 그렇지만, 그랜딘이 강조하는 ‘감각처리’가 아예 다르다는 근본적인 사안으로도 나타난다.

예컨대 자폐증으로 진단되는 어린이는 타인이 시도하는 일방적인 접촉을 감각기관이 처리하기 어려워 안아주면 몸이 빳빳해지면서 급히 빼낸다. 또 정보처리과정에서 시각과 청각의 왜곡이 심하다. 여러 소리가 동시에 들릴 때 하나를 걸러내기 어려우며, 낯선 곳에선 앞이 보이질 않는다거나, 휴방 중인 TV채널처럼 시야 가득 흰 반점이 퍼져 보이기도 하고, 원근감 문제로 계단 내려가기가 두려울 수도 있다. 보면서 동시에 들을 순 없는 “모노채널”인 이도 있다.

그는 감각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반 고흐의 그림을 예로 들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starry night”에 나타난 소용돌이 치는 하늘은 일부 자폐인이 겪는 감각왜곡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감각처리 장애를 겪는 자폐인에게는 사물의 가장자리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고 감각자극이 서로 뒤섞이는데 이것은 ‘환각’이 아니라 감각의 왜곡”임을 지적했다.

이렇듯 체계적인 ‘다름’은 사회 환경에서 고립과 불편을 야기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자폐증 분야를 스스로 연구해온 그랜딘은, UCLA의 에드워드 오니츠(Edward Ornitz)가 10년 전에 자폐인의 뇌간 이상을 밝히고 자폐증의 감각처리문제에 대한 논문을 미국 아동정신의학회지에 실었으나, 교육가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폐증 치료에서 관례적이던 주류 심리학의 행동수정(behavioral modification)방법을 고수하여 자폐인들이 직접 호소하는 이러한 감각처리 상의 불편을 무시해왔다고 고발한다.

이미지로 사고하는 것, 소와 흡사

감정 또한 비자폐인과 똑같지는 않다. 기쁨이나 전율이 없이 단조로운 이도 있고, 본인은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전기’를 최근에야 배웠을 만큼 ‘공포’가 대부분이었다고 말한다. 템플 그랜딘이 "그림으로 생각한다"고 요약한 이미지와 공간 정보에 의한 사고체계도 공포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삶의 의미가 확실해지면 공포가 줄어들 것이므로 점점 더 시각적 상징에 깊이 빠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소의 사고, 감정체계와 비슷했다. 소 역시 공포를 1차적 감정으로 경험하고 이미지, 빛, 소리 패턴으로 사고한다는 점에서 그는 소의 세계를 철두철미하게 이해했으며, 때문에 도축시설이나 사육장을 성공적으로 디자인해왔다.

비자폐인들이 보통 언어로 사물과 사상의 사고나 기억을 선형적,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과 달리 그랜딘은 시각에 잡힌 이미지와 공간 정보로 사물과 사건을 구성하고, 기억과 지식을 저장한다고 한다. 덕분에 일반 건축가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려야 가능한 시뮬레이션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가능하고, 텍스트를 기억할 일이 있으면 통째로 ‘복사’해서 머리 속에서 넘겨본다. 이러한 능력은 가축 설비의 세계적인 업적을 낳았으며 사회적 ‘적응’을 원활케 해왔다.

그러나 모든 자폐인이 그처럼 병리로 진단된 약점을 극대화하여 자아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랜딘 자신도 경험한 “환멸과 좌절뿐인 학교 생활과 교육제도”는 이런 사람을 “육성하는 게 아니라 걸러내어 낙오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언어가 사고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기준이라면, 나도 사고능력이 없는 것이다”고 말하는 템플 그랜딘.

그렇다면 이러한 다름은 왜, 누구에 의해 자폐증이라고 이름 붙여지고 ‘장애’(disable)로 분류되는가? 저자는 인간 내부 성향들이 자폐인에게는 다소 강하거나 약하게 나타난다고 표현한다. 놀이치료를 통해 자폐아동을 성공적으로 임상 치료한 <딥스>DIBS의 저자 액슬린은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격을 지키려고 조심하면서 살게 마련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질성을 도외시하기 전에 공감대를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템플 그랜딘의 에세이에도 면면이 배어있다.

비자폐인에게 결핍된 것은

언어, 사고, 감각체계가 다른 외계인을 지구인이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말의 핵심은 아니며, 불편을 딛고 일어선 성공 스토리를 말하고자 함도 아니다. <딥스>가 장애를 극복하여 세계에 성공적으로 편입된 사례를 치료자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했다면, 저자는 <과연 이것은 극복해야 할 질병일 뿐인가>라는 질문을 새로 묻는다.

그랜딘은 자신을 철저히 알고 세계를 탐구해가며 가진 자원을 나누는 반면, 혹자들은 거의 자동적인 인간 상호작용의 규칙들을 외국어처럼 관찰하여 피드백 받고 습득하기에 바쁘다. 창의적이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교사들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은 그는 자폐로 진단된 학생들의 지나친 고착이나 한 가지에 몰입하는 성향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해서 건설적 행동으로 이끌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비자폐인은 그들이 이용당하거나 배신 당하지 않도록 도와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공포를 줄이기 위한 기존의 약물 치료도 거부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치료방법들도 능동적으로 활용한다.

그간 자폐증을 비롯한 정신과 질병을 언급할 때 사회는 흔히 ‘이질성’을 부각해왔으며, 자신들의 입장과 상황을 세력화하지 않을 절대 소수라는 이유로, 그들이 지닌 다름은 ‘결핍’이라고 주지시켜 왔다. 그러나 자폐인의 결핍을 이해하고 손 내밀자는 단순한 취지는 그랜딘이 보기엔 가정상 옳지 않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를 따라가 보면 오히려 그의 특별한 언어, 사고, 기억, 행동 능력이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을 지도 모른다.

그랜딘의 삶을 살펴보면, ‘자폐증’을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이질적인 사태로 보고 그저 심리외상, 선천적 장애, 뇌기능 이상쯤으로 짐작하며 그들에 관해 맘껏 상상하는 것은 위험하다. 템플의 재미있는 글들은 이러한 몰각을 흔들고, 비자폐인들에게 사고와 인성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나아가 정신증과 신경증, 성격장애와 이상행동의 분류 표준이 지닌 문제점, 마음대로 이름 붙이는 것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고민케 된다. 인권적인 차원의 발전이 이어지고는 있으나, 템플 그랜딘처럼 자신을 획기적으로 설명한 예에 비출 때 여전히 사회적으로 몰각된 ‘치료’영역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만이 간직한 소중한 자원’으로 인식

그랜딘이 자랑스러워한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마인드에서 그려보는 공간능력과 시각적 사고능력’도 자폐인의 전유물은 아니듯, 규칙을 파악하고 환경에 맞게 처리하는 논리적인 언어 능력도 일반인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의 관점에서 각 항목들이 긴 연속선상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할 뿐, 이 속성들이 자폐인/비자폐인 한 쪽엔 전혀 없거나 한 쪽에게만 완전무결하여 인간을 구분할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보다 저자는 인간 공통의 심리 기저를 탐험하고, 그것이 자신과 맞닿아 자신에게 이름 붙여졌던 자폐라는 지점과 통하는 신호들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공포다. 공포와 범불안, 불신 등이 현대인의 행동역동에 불을 당기는 것은 이상할 게 아니지만, 템플 자신은 그 모든 -병리적으로 보이거나 반대로 건설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공포를 피하기 위한 동력에 의해 이루어져 왔을 만큼 그 수위가 강했다고 말한다. 템플이 그런 ‘공포’를 넘어섰을 경우 자아 구성 방식을 어떻게 다르게 선택할 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자폐증을 ‘극복’해서 성공했기에 유명해진 템플 그랜딘의 주장은 자폐증에 대한 인식을 누그러뜨리거나 자원에 주목하는 임파워먼트를 넘어 아예 그런 <병>이 있는가를 묻는 혁명적인 사고를 담고 있다.

관습의 범주가 허용하는 것에서 자아구성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통상적으로 보기에 특이하다고 함부로 병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것에 대해, 그는 자폐인으로 이름 붙여진 현재 모습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렇기에 손가락을 까딱해서 비자폐인으로 ‘변신’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내가 아니며 나만이 간직한 소중한 자원들을 내버려야 하는 것임으로 그런 남루한 옵션들은 선택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 자신감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기초 권리인 ‘자아구성’까지 통제해 온 교육제도를 비롯한 근대적 사회 요소들을 성찰하게 된다.

어쩌면 템플 그랜딘은 감쪽같은 혁명가가 아닐까? 세계적으로 ‘자폐인’이란 꼬리표를 달고 외눈박이 사회에서 두 눈을 지닌 종족이 되었더라도 말이다. 그의 삶은 자폐증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인간 행위(behavior)와 관련된 ‘병’을 ‘정상인’의 입장에서 마구잡이로 규정하는 주체들에게 경고한다.

기존 질서가 제안한 것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자신을 구성하는 고루한 ‘일반’ 성향의 폭을 넓히는 템플의 행보는 흥미롭다. 진열장에 놓여진 재료만으로 자아라는 상품을 구성해가는 근대인들에게, 진열대 밖의 천연재료들을 손수 배양하고 내다 팔 목적이 아닌 자아를 구성하는 근대 유리창 밖의 모습, 이러한 템플의 ‘도발’은 인간 확장이라는 숨통 틔우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기에 유쾌하다. (정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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