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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19) 우리의 ‘바람직한 미래’는 어디에
 

수십 년 전부터 인도여성 반다나 시바는 자유시장경제, 국가권력, 현대과학기술의 협잡인 경제개발이 사람과 자연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경제개발을 포기해야 한다면, 또 전통사회나 원시사회로의 회귀가 아니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나? 한동안 이 질문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언어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효과적인 ‘반(反)개발(지속 불가능한 개발에 대한 반대)’을 통해 ‘지속가능한 개발’로 나아가는 데서 찾고 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미래가 거기 있다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모든 개발이 파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생태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면, 충분히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면서도 전통사회의 바람직한 기초를 완전히 허물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속가능한 개발’은 무엇이고, 피해야 할 ‘지속 불가능한 개발’은 무엇인가?
 
결과가 우려되는 개발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녹색평론사  1996)
 
유럽중심과학에서 태어났고, 서구인들과 서구화된 엘리트들에 의해 시행되어온 개발은 세계의 온갖 다양한 문화를 하나의 단일 문화로 축소시키고 있다. 그것은 인간 욕구는 어디에서나 똑같다는 가정, 즉 누구나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형태의 집에서 살고, 같은 옷을 입을 필요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똑같은 시멘트 건물들, 똑같은 장난감, 똑같은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세계의 가장 구석진 곳에까지 파고 들어간다. 현대적 공동체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영어를 배울 필요가 있으므로, 언어마저도 균질화되어 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녹색평론사, 1996, ‘제 16장 개발의 속임수’)
 
일단, ‘지속 불가능한 개발’이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키고, 타락시킨다는 것에 주목하자. 누구나 세계 어디에 살건, 똑같은 욕망을 품도록 부추겨진다. 모든 이의 욕망이 동일할 때, 시장은 세계 규모로 확장가능하다. 이때 이윤추구에 도움이 되는 욕망만 키운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시장 상품을 충분히 소비할 만큼 부자가 되길 꿈꾼다. 생존적 필요에 충실한 욕망은 이제 자부심을 상실하고 열등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국가권력, 다국적 기업, 현대과학이 거대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형성하여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이윤 증대에 집중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다양성을 제거하는 ‘획일적’ 방식이다. 오늘날 그 사례는 실로 넘쳐난다.
 
화학화와 기계화를 도입한 대규모 농업의 보편화, 병충해에 취약한 종자와 제초제, 살충제와 같은 화학물질을 세계적으로 보급시키는 데 주력하는 다국적 기업들, 부자나라를 위한 수출용 작물, 환금작물 생산에 집중하고 자국의 식량은 수입에 의존하는 제 3세계, 열대우림에서의 과도한 벌목, 단일종 나무심기, 거대 댐에 의존한 물 공급, 화학약품에 지나치게 의존케 하는 다국적 제약회사, 고가의 의료장비에 의존하는 현대의료, 열등한 것은 폐기하고 우월한 것만 원하는 생명공학, 화석연료에 기댄 집약적 에너지 소비, 화석연료를 과도하게 소비하는 이동수단의 권장, 보조금을 지급해 경제개발에 힘을 싣는 정치권력 등.
 
‘단기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고, ‘우리 능력의 자연적인 한계’와 ‘부의 재분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지속 불가능한 개발’은 ‘민중의 복지’와 ‘자연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사회와 자연환경에 부정적 결과를 야기한다고 해서 놀라운 일은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환경오염으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반다나 시바가 전하는 인도의 부적절한 식림의 사례만 보더라도 그렇다. 돈이 된다는 이유로 물이 부족한 건조한 지역에 유칼립투스 단일 종만 심었더니, 물 순환에 악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토양의 영양분을 깡그리 빼앗아 사막화를 유발했고, 결국엔 다른 생명체뿐만 아니라 사람도 살 수 없는 끔찍한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방향이 잘못되고 결과가 심히 우려되는 개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장과 자연이 적대적’이라는 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지역중심적 세계관을 세우고, 생태·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라”
 
“진정으로 효과적인 반개발이 선행되어야만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 소비자 단일문화가 멈추지 않는 한 갈수록 심화되는 빈곤, 사회분열, 생태계 훼손을 막을 희망은 없다. 그러나 반개발은 그것 자체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기술적 획일성에 반대하는 것에 덧붙여 우리는 지역의 자원, 지식, 기술들의 가능한 최대한의 활용을 권장함으로써 생태적, 문화적 다양성을 적극 지지할 필요가 있다.” (같은 책, ‘제 17장 반개발’)

 
‘지속 불가능한 개발’을 반대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만약 ‘지속가능한 개발’이 해법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노르베리-호지는 자연과 사람을 존중하려면 ‘지역중심적 세계관을 세우고, 생태·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의 세계화에 맞서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에 집중하여 지역경제의 자립을 유도해야 한다. 가족, 공동체, 즉 지역적 인간관계의 결속을 다지면서 지역문화를 지켜나가야 한다. 침술, 동종요법, 약초와 같은 자연요법을 존중하고. 토착적 지식을 전수할 뿐만 아니라 지역 연구자를 우대해야 한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교통수단에 의지하기보다 자전거와 걷기를 통해 이동하고, 화학비료가 아니라 퇴비를 이용하고, 숲을 유지해서 나무와 동물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으면서 식량도 생산하고 땅도 살리는 농업을 한다면, 숲을 물론이요, 토양과 물, 종 다양성뿐만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도 보전할 수 있다.
 
또 ‘라다크 프로젝트’에서 보여주듯이, 태양열을 이용한 온수, 오븐, 난방, 온실과 같이 전통을 파괴하지 않는 기술개발, 지역자원에 의존한 기술개발에도 주력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개발과 공모하는 과학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태양, 바람, 바이오매스, 수력과 같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개발, 이용하는 것은 현대과학기술이 지속가능한 개발에 기여할 수 있는 사례로 본다.
 
자연친화적이고 자립적인 도시, 어떻게 가능할까? 
 
▲앨런 와이즈먼 <가비오따쓰> (랜덤하우스코리아) 

 
다행히도, 세계각지에서 수입한 먹을거리가 마트나 슈퍼에 넘쳐난다고 해서 우리 식단이 다양하고 풍부해졌다고 만족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재래시장에서 이전이라면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지역 농수산물이 점차로 줄어들어, 더는 구하기도 힘들어진 것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지역 식단의 다양성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문화·생태적 차이가 있는 각 지역에서 먹을거리가 유사해진다는 것 자체만 보아도 다양성의 파괴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다.
 
노르베리-호지가 지적하는 대로, ‘지역에 기반을 둔 자급경제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더 많은 자원착취와 더 많은 기술력, 더 큰 시장, 더 큰 이윤을 향한 무자비한 추진력”으로 괴물처럼 자라고 있는 세계경제 앞에서 사람과 자연이 다양성을 지키며 살아남을 길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미 사막화되어 더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가기 어렵게 된  황무지에서 어떻게 살 길을 찾을 것인가? 콜롬비아의 생태도시 ‘가비오따쓰’처럼 과학기술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황무지에서 현대적 과학기술을 동원해서 풍력, 태양열 재생에너지를 만들어내고 펌프를 만들어 깨끗한 물을 퍼 올리고 수경재배로 먹을거리를 생산하며 살 길을 찾으면 될 것인가?
 
하지만 이미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내쫓겨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무수한 사람들을 구해내기에 ‘가비오따쓰’의 공동체로는 역부족인 듯하다. 날이 갈수록 비대해지고 있는 도시, 그 속에서 강제된 가난으로 고통 받으며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빈민들의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미 지역성도 상실하고 세계화의 물결 속으로 떠밀려가고 있는 획일적인 거대도시에서 지역중심주의, 문화·생태적 다양성을 어떻게 실현해낼 것인가?
 
여전히 도시에는 “개발의 한복판에 머물러 있어 개발의 정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단 도시만이 아니라 시골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맹렬하게, 거침없이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지속 불가능한 개발’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지속가능할 것처럼 행세한다. 경제개발의 환상에 빠져 덧없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반개발’ 프로젝트가 의미를 갖는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인구의 절반이 대도시에 몰려 살아가야 한다는 우리의 가까운 미래를 염려하며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생존할 길을 모색하는 데 있어, 지역중심주의와 생태·문화의 다양성이란 원칙을 공유한다고 해도, 여전히 막막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도시화, 산업화에 완전히 삼켜지지 않은 지역이라면 모를까, 이미 생명체들이 거의 떠나버린 황량한 곳, 비자립적이고 획일적인 거대도시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 가야 하나?
 
어쩌면 실패하더라도, ‘가비오따쓰’의 사람들처럼 정답을 알지 못한 채 혼돈 속에서 지금 당장 무엇이든 시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대안은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퍼 올릴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경제개발의 산물인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 도시인의 눈에는 ‘지속가능한 개발’이 열어 보이는 길이 모호하기만 하다. 자연친화적이고 자립적인 도시, 어떻게 가능할까? 질문은 계속된다.
 
[필자의 다른 글 보기] 경제개발이 자연과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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