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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링하버항을 백조처럼 날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자리잡은 나라, 호주에 가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효진

[필자 김효진님은 장애여성네트워크에서 일하고 있으며, 일다 편집위원입니다. –편집자주]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날씨라는 것과 캥거루가 많은 나라라는 것 말고는 호주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여행의 목적은 ‘장애인 인권교육의 현황’에 대해 배우겠다는 것. 그러고 보니 호주에 대해 들은 바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논의될 때마다, 이 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는 호주가 언급되곤 했으니까….
 
그것이 우리 12명의 일행이 호주를 찾은 이유였다. 1990년대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아래 ‘장차법’)이 시행되고 있으니, 우리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장애인 인권현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호주는 편의시설이 비교적 잘 되어 있었다. 야생동물원 화장실도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었다. 단, 장애인화장실이 남녀공용인 것은 의외였다.    © 권민혁

다민족의 나라, 호주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내린 시드니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밟는 순간 공항 직원들의 여유 있는, 다소 답답한 태도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공항 직원들만의 특징이 아님을 여행 기간 내내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9시에 문을 여는 상점의 경우 9시 10분이 되었는데도 준비 중이라는 이유로 판매를 거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땅이 넓고 자원이 풍요로워서 절실하고 급할 것이 없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시드니의 풍경과 사람들은 의외로 낯설지 않았다. 다민족의 나라답게 다양한 피부색, 머리카락, 눈동자의 사람들이 제각기 개성 있는 옷차림을 하고 섞여 있는 탓이었을까. 초겨울의 날씨인데도 민소매를 입고 다니는 흑인이 있는가 하면, 차도르를 칭칭 감은 이슬람 여성도 눈에 띄었고, 두터운 겨울코트를 걸친 백인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국말 덕분에 더욱 그곳이 지구 반대쪽 남의 나라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시드니의 풍경은 한 마디로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출발 전 가이드가 대단한 기대를 안고 호주에 가면 실망이 크다는 말을 왜 그리도 강조했는지 알만했다. 드넓은 대지, 제멋대로 우거진 나무들에서 사람의 손이 크게 닿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래도 장차법이 시행되고 있는 나라답게, 어딜 가도 편의시설만큼은 잘 되어 있었다.

 
코알라와 캥거루, 그리고 악어 등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동물원도 휠체어 접근이 얼마든지 가능했고, 휠체어를 타고 케이블카도 탈 수 있었다. 시내 웬만한 식당도 휠체어가 접근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 야경을 보기 위해 올라간 시드니 타워(?) 매표소 앞에 설치된 자판기는, 휠체어 탄 장애인이 누르기 쉽도록 버튼이 아래쪽에 있었다. 아, 이 세심함이라니!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먼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감탄사가 터졌다.


‘다민족장애인권리보호협회’에서 중국장애여성 슈, 코디네이터 수잔과 함께. (왼쪽이 필자)   © 권민혁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장애인들의 문제


그렇다고 호주에 사는 장애인들에게 문제가 전혀 없을 리는 없다. 호주 장애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다민족장애인 문제인 듯했다. ‘다민족장애인권리보호협회’(Multicultural Disability Advocacy Association of NSW)에서 그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은 호주에서 사는 다민족장애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다. 특히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복지서비스와 연계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열살 때 호주로 이주해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이 단체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중국인 발달장애여성 슈의 이야기도 직접 들어보니, 다민족장애인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단체의 지원으로 10년 만에 장애아를 목욕시킬 수 있는 시설이 딸린 주택을 마련하게 된 어느 가족의 사례를 들었다. 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도 제도 밖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며, 제도를 보완하고 바꿔나가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시드니가 속해 있는 NSW 주의 장애인위원회(Office of the Disability Council of NSW)에서 일하고 있는 더기 허드(Dougie Herd, executive director)는 공무원 신분인데도, 호주의 장애인제도를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고 그곳 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을 진정으로 가슴 아파하며 바꾸고 싶어하는 ‘진정한’ 장애인당사자였다.

 
장애인위원회는 NSW 장애인 정책과 제도 전반을 자문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 5명의 공무원과 15명의 장애인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애인위원은 장애부모를 포함해서 전원 장애인이며, 분야별로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자문 및 정책 제안을 하고 있다 했다.


▲ NSW 장애인위원회에서 일하는 더기 허드와 그의 파트너인 시각장애여성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     © 권민혁

7월 WYD(World Youth Day)라고 하는 세계청년대회(세계 가톨릭 청년들의 축제)를 앞두고 교황을 비롯해 전세계 50만 명이 호주에 모이는데, 이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장애인위원이 직접 파견되어 있다는 것이 좋은 사례였다. 50만 명의 군중 중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자문을 해주고 있다고 하니, 말뿐인 복지가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복지를 위해 그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더기는 아직도 부족한 호주 장애인들의 복지현실에 대해 핵심을 얘기해준 뒤 “한국은 어떻습니까?”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머나먼 나라 한국에서 찾아온 우리 일행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 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려 하는 태도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배려와 유머가 빛났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휠체어 장애남성 두기와 그의 파트너인 시각장애여성. 서로를 배려하며 존중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둘은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멋진 장애인들이었다.

 
달링하버항 구석구석을 누비다

 
짜여진 일정을 모두 마친 넷째 날 밤, 일행 중 8명은 모노레일을 타보기 위해 밤길을 나섰다. 전날 밤 이미 모노레일을 경험한 사람이 있어 그의 안내에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전동휠체어가 세대, 수동휠체어가 두 대였지만 모노레일을 타는데 아무 걸림이 없었다. 수동휠체어라고 해서 누군가 밀어줄 필요는 없었다. 속도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동휠체어의 한쪽을 잡고 2인 1조가 되어 달리니 만사 오케이였다.

 
일행 중 목발도 안 짚고 휠체어도 타지 않지만 보행이 많이 힘든 바람님은 전동휠체어의 뒤에 올라타고 함께 달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리가 되어주고 운전기사가 되어주었다. 관광용인 듯한 그 작은 모노레일 안에서 우린 서로를 마주보며 괜히 웃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 우리는 전동과 수동이 2인 1조가 되어, 달링하버항을 누비고 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 전윤선

모노레일에서 내려 여전히 2인 1조가 된 수동과 전동은 그날 밤 하버항 구석구석을 폭주족처럼 누비고 다녔다. 수동휠체어를 탄 채 전동휠체어를 잡고 달리던 중 일행 중 누군가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백조 같아!”

 
비로소 여행의 진수인 자유로움을 마음껏 맛보는 순간이었다. 잠시 하버항 한구석에 모여 앉은 우리들. 일행 중 CCM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빈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바다와 별과 자유가 있는 그곳에서 들은, 제목도 알 수 없는 그 노래는 지금까지 들어본 노래 중 가장 감동적이었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기를….

 
호텔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잠시 서있는데, 택시 기사가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우리를 응원하였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렇게 힘을 받을 수 있기를….


2008/07/08 [11:59]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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