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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맘 때였던 것 같다. 긴 소매 옷으로 갈아입은 한참 뒤인데도, 그 날만은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가야 했다. 넓은 길 대신, 늘 하던 대로 지름길인 좁은 논둑을 따라 걸을 때마다 풀섶 가장자리에 맺힌 이슬이 한없이 맨 발목을 쓸며 떨어져 내렸다. 그래서 더 으스스 추웠던 것 같다. 그날 아침은 이렇게 추웠고, 무엇보다도 슬펐다. ‘운동회 날’인 것이다.
 
소풍 때면 그렇게 잘 오던 비가 왜 운동회 때는 절대로 오지 않는지….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운동회는 예방주사 맞는 것만큼 괴로웠던 행사였다. 달리기를 특별히 못하던 나는 출발을 알리는 화약 딱총소리도 무서웠지만, 사람들 시선으로 가득 찬 운동장에서 꼴찌, 아니면 그 다음으로 달리는 게 정말 싫었다. 도착점은 쉽게 나타나 주질 않았고, 아무리 달려도 결코 앞 사람을 앞지를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그렇게 달리다가 순간 어디론가 사라질 수 없었고, 무엇보다 멈출 수가 없었다.
 
달리기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은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살, 나는 엄마와 초등학교 1학년인 언니의 운동회에 갔다. 운동회 같은 것이 세상에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엄마와 다른 어른들과 함께 운동장 담장을 뒤로 하고 앉아 있었다. 운동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들을 구경하고 있었겠지.
 
그러던 중 한 아줌마(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학교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가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끌어내려 했고, 옆에 있던 어른들 역시 나를 일으켜 세워 뭐라 뭐라하면서 결국 내 손을 그 아줌마에게 쥐어 보냈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렇게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갔을 때는 나처럼 불려 나온 나만한 꼬마들이 꽤 있었다. 우리들은 바로 초등학교에 아직 입학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한 게임의 참가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날 우리들이 할 것은 호각 소리에 맞춰 매트리스가 펼쳐진 곳까지 달려 그 위에 놓인 사탕을 하나 집어 먹고는 다시 도착점까지 달려가는 경기였다. 뻘쭘하게 끌려 나왔지만, 뭐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달리기 신호를 기다렸을 것이고, 그리고 뛰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달리기를 특별히 못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꼴찌를 하는 정도에서 끝이 났다면 그래도 좋았을 텐데…. 저 앞으로 아이들이 달리고 있는 뒤를 쫓아, 황토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을 얼마만큼 달려 나도 사탕들이 놓여 있다는 매트리스에 도착했다.
 
이미 앞서 달려간 아이들이 까먹고 던져 놓은 사탕 껍질들이 알록달록 흩어져 있는 그 매트리스 위에서 나도 사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움켜잡을 때마다 빠샥 빠샥하며 손바닥에 잡히는 것은 빈 사탕 껍질들뿐이었고, 알맹이가 든 것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나는 매트리스 위를 무릎으로 기며 나중에는 두 손으로 사탕 껍질들을 움켜잡아 보았지만, 어디에도 사탕이 들어있는 걸 찾을 수가 없었다.
 
‘사탕을 찾아 그것을 먹어야만 갈 수 있는데….’
 
나는 그 넓은 운동장에서 엄마도 없이 혼자였고, 어디에도 사탕은 없었다. 그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던 것 같다. 거기서 기억은 더 이상 나지 않는다.
 
사탕을 하나 얻어먹고 도착점까지 뛰어갔는지, 아니면 거기서 끝이 나 다시 엄마에게로 보내졌는지, 엄마는 나를 어떻게 위로했는지, 그날 어떻게 끝까지 운동회 구경을 다 하고 집에 돌아왔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을 당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는데, 그래서 나도 어쩌면 내 의식 속에서 이날의 기억이 그렇게 깡그리 지워진 걸까?
 
그러나 나는 이렇게 어른이 된 아직도 당혹스러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매트리스 위에서 사탕을 찾았던 그날의 기분에 휩싸인다. 아무리 쥐어봐도 껍질뿐인 사탕 껍질들 틈에서 알맹이가 들어있는 사탕을 찾아 허푸거리던 그 어린 꼬마가 된다.
 
[정인진 칼럼] 그 길에서 내가 주운 건 |아직 꿈꾸어도 늦지 않다 | ‘서른살 아이’가 선물로 받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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