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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교육관련 연구모임에 다녀왔다. 내가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채식과 금연을 존중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소통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모임이라, 열린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서일까? 아무튼 잘 알지 못하는 타인들이 서로의 차이-채식과 금연만이 아니라 종교적 차이, 경험의 차이 등-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시간을 들여 먼 거리를 이동해가며 그 모임에 참석하는 동기가 되었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개인
 

추천서- 존 버닝햄의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비룡소, 1998) 삽화

낯선 사람들의 모임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만남에서조차 흔히 차이는 무시되기 십상이다. 모욕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의 생일을 고기집에서 축하해주는 혈연가족 이야기나, 동성애자에게 끊임없이 결혼상대자를 소개해 주려 애쓰는 친구 이야기는 전혀 낯설지 않다. 다수의 생각과 행동방식,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가족과 친구, 동료를 포함한 자신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 받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만 해도 ‘유유상종’하려고 애쓴다. 기왕이면 정치적 입장이 같고, 내 또래면서 채소를 즐기고 담배는 피우지 않는, 산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좋다. 가치관이건, 취미이건, 식습관이건, 비슷한 사람과 만나는 것이 불쾌할 일이 없어 속 편하다.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면 아무래도 불편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불쾌해지거나 화가 날 때도 있으니 말이다.
 
‘서울 사는 **고 동창생 모임’, ‘수원 사는 30대여성의 산악모임’ 등과 같이, 흔히 모임이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도 서로 쉽게 통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공통요소를 가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이상으로 여러 다른 점들을 지닌 개인이라는 점을 놓칠 수 없다. 여전히 많은 차이가 서로 부딪칠 여지는 충분히 있다. 그 차이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임은 잘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상 우리 모두는 제각기 다른 개인이다. 그래서 그 다양한 차이는 언제 어느 때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유사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여 지내기 편안하고, 차이가 크면 클수록 갈등은 증폭되어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이를 수용하는 건, 세상의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
 

존 버닝햄 "깃털없는 기러기 보르카"(비룡소, 1998) 삽화

그 사람이 누구이건, 다른 사람과 인간관계를 형성해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자유와 욕망이 제한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 맺기는 기본적으로 불편함을 전제한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혐오하며, 모욕을 주거나, 배제한다. 결국 이들은 소수의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변질시키고, 다양성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자유, 욕망이 한계에 부딪치더라도 그들을 견디거나 이해하려 애쓰며 관용한다.
 
물론 후자의 경우라도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차이가 난다. 달라서 싫지만, 모른 척하거나 내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차이라면 그 차이를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상대방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상대의 다름에 나 자신을 열어둘 수도 있다. 즉, 달라서 호기심을 가지며, 대화를 통해 소통하려 애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서로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노력도 가능하다. 때로는 나의 세계, 즉 나의 생각과 행동, 습관과 가치관이 변화를 겪기도 한다. 결국 다른 사람을 향해 내 세계의 문을 조금 열어 두거나 활짝 열어 젖힐 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와 다른 사람과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달리 말해서 -그 관계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호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록 나의 자유가 줄어들고 내 욕망이 억제된다고 할지라도, 유아론적인 내 세계에 갇히지 않고, 낯선 다른 세계와 만나 세상의 진실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의 인식과 행위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겨난다. 이 변화는 나를 새로이 형성하고 성장하도록 도울 것이다. 게다가, 내 속에서 그동안 놓쳤거나 감춰두었던 작은 차이들에게 숨쉬며 날개를 달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내게 또 다른 자유를 만끽하는 즐거움과 여유를 안겨줄 것이다. 결국 다른 이를 내 삶 속에서 내치기보다 껴안음으로써 더 풍부하고 힘 있는 삶을 펼쳐나갈 수 있다.
 
지체장애를 가진 친구를 얻어 그 친구의 눈높이로도 세상 보는 법을 배우고, 각국의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 우리와는 다른 문화들을 접하고 알아가며, 페미니스트 친구를 사귀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가는 동안, 내 삶이 얼마나 넓고, 깊고, 생기를 얻었던가. 뿐만 아니라, 내 속의 작은 차이를 드러내고 그 차이를 타인들과 공유하면서 내 삶이 또 얼마나 풍요롭고 자유로워졌던가.
 
타인의 차이를 견디기만 해도

 

존 버닝햄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하지만 다수의 지배적 가치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여전히 다름을 못 견디는, 아니 견디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타인의 다름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혐오하고 배제하는 것에 수치심은 없다. 오히려 자신의 작은 차이를 부끄러워하며, 감추는 데 익숙하다.

 
교육연구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의 태도, 즉 내게 피해가 없으니 인정해도 무방하다는 그들의 태도에 내가 감동하기까지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 속에는 차이에 대한 적극적인 호기심도, 진지한 물음도, 깊이 있는 대화도 없다. 참된 이해의 노력이 없다 보니, 자기 변화를 이끌어낼 깊은 성찰은 기대하기 어렵다.
 
비록 이처럼 차이에 대한 소극적 태도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세상은 폭력적인 말과 생각, 몸짓, 행동을 피해 굴러갈 수는 있을 것이다. 갈등에서 비롯되는 적당한 긴장과 불협화음의 조화 속에서 인내의 미덕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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