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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 ‘삽입’ 공식은 없다…21장의 합의문

<이상성욕자? 선량한 변태들의 목소리> 2화. “좋았어?”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게 좋아?”


※음란함, 이상함, 혹은 폭력적이라는 선입견의 베일에 덮인 채 야동을 비롯한 미디어에서 왜곡된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는 bdsm에 관하여, 기록노동자 희정 님이 성향자들을 만나 그 목소리를 담은 기록을 4회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여자가 좀 그렇지 않나?


아람은 태어날 때 여성이라 성별을 지정받았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여성’이 있음을 의심했다. 그럼에도 아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여자’였다.


“여자가 그러면 좀 그렇지 않을까?”


뭐가 좀 그렇다는 건가. 아람은 일찍이 자신의 성향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알았다. 소꿉놀이를 상명하복 인형 줄 세우기로 하고, 친구들을 놀리면 즐거웠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 정체가 bdsm인 것을 알았다. 물론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달랐다. ‘해볼’ 생각은 못했다.


▶ 본디지(bondage, 신체를 끈 등을 이용해 결박하는 플레이)


아람의 성향은 도미넌트(지배)-새디스트(가학). 소위 펨돔이라 부른다. 지시하고, 우위에 서고,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여자가 그래도 되는 걸까?” ‘여자로써’ 아람이 해본 적 없는 역할이었다.


되돌아보면 아람의 관계 맺기는 수동적이었다. 섹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상대가 조르면 마지못해 하는 정도?”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이 성적 행위에 적극적인 모습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침대에서만이 아니다. 여자가 ‘나대는’ 일은 일상에서도(공적-사적 영역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했다.


푸잉 또한 그랬다. 푸잉은 마조히스트(피학)인 자신의 성향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너무 ‘변태’ 같았다. 그래서 자신을 모르는 척 굴었다. 일상이 삐걱거렸다. ‘정상’이라 불리는 성적 행위에 감흥이 없었다. 감흥 없는 일을 하려니 번잡했다. 그래서 피했고, 때로 “잠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나중에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달라져’ 같은 소리를 듣긴 했어도, 비난 받진 않았다. 여자가 성적 행위에 관심이 없는 건,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젠더가 bdsm을 만날 때


그에 비해 분홍마늘의 경험은 좀 다르다.


“남자로 길러진 경험이 있어서 그런 존재들과 자라다 보니까. bdsm 같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누군가 때렸는데 웃으면 ‘너 마조냐?’ 농담하고. ‘너 게이냐’와 별 다르지 않는 조롱인데. 그런 조롱에서 관련 정보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거죠.”


젠더퀴어(남성과 여성으로만 분류하는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을 벗어난 정체성)인 분홍마늘이지만, 사회가 지정한 성별은 남성이었다. 덕분에 더 손쉽게 bdsm 정보를 접했다고 했다. 20대 중반이 넘어서야 bdsm라는 존재를 알게 된 푸잉과는 달랐다. 여자가 이래도 되는가로 고민하던 아람과도 다른 경험이다.


물론 여기에서 분홍마늘의 퀴어 정체성을 배제한 채 말할 수 없다. 특정 성향을 수월하게 받아들였던 까닭은 남성 젠더의 특성에만 있지 않다. 분홍마늘은 bdsm 성향을 받아들일 수 있던 이유를 “팔 부러졌는데 손가락 다친 것쯤이야”라고 표현했다. 남자를 사랑하는구나를 알았을 때, 자신이 남성이 아닐 수 있겠구나를 깨달았을 때, 그때 팔이 부러졌다. 그에 비해 손가락이 다친 정도의 특정 성향 발견은 충격이 크지 않았다.


여하튼 젠더가 혼재하여 살아가는 덕분에, 분홍마늘은 “남자로서 길러진 경험”을 나름 객관화시켜 볼 수 있게 되었다.


“남성집단에서 있다 보면 그런 이야기들은 심심치 않게 듣거든요. 나는 때리고 묶는 거 까진 괜찮을 거 같아, 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런데 나를 때려줬음 좋겠어, 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남성들은 ‘맞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아람이 ‘때리는 여자’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배욕과 거침. 이것은 ‘남성’에게 주어진 성별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다. 마초, ‘짐승남’이라는 말이 남자들 사이에서 욕이나 비하가 아닌 것처럼. 그러니 성적 판타지라며 입 밖에 꺼낼 수 있다. 하지만 ‘맞고 싶다’는 내비칠 수 없는 욕망이다. ‘남자다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미디어는 bdsm의 ‘변태성’을 강조하거나 희화화시킬 때, 때리는 여자-맞는 남자의 구도를 선보인다. 그것이 기본 성별에 대한 인식(능동 남성-수동 여성)까지 비틀어 더 ‘비정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나 묻는 질문 “좋았어?”


물론, 여성들은 ‘때리건 맞건’ 어느 것도 입에 담을 수 없다. 여자가 특정한 욕망을 내비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성별 규범에, 그러니까 ‘여성다움’에 어긋난다.


예전에 비해 여성의 욕망이 허락되긴 했다. 혼전 순결을 요구하는 건 낡은 문화로 취급되고, 드라마 속 ‘즐기는’ 여성도 꼭 악역으로 나오진 않는다(물론 주인공은 할 수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찾아다니지 않는 대신, 침대에서 그렇게나 묻는다.


“좋았어?”


여성우위 시대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 현대 여성들임에도 이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다. ‘싫어’는커녕 ‘좋지 않았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왜 남자들은 꼭 좋았냐고 묻는 걸까? 여자들끼리 모이면 한탄한다. 왜냐고? 이유야 단순하다. 남자들은 질문하는 족족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으니까. 그들이 ‘좋지 않아’라는 답을 들을 것을 걱정했다면,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묻거나 대화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아?”


어떻게 하면 좋아?를 묻고 그에 따르는 것이 관계에 있어 동의와 합의다. 그런데 도무지 연애를 하며 묻질 않는다. ‘오빠 믿지?’로 시작해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로 향하는 연애의 진도. 그런 측면에서 아람에게 ‘일반 연애’란 합의되지 않은 일의 연속이었다.


“남성들하고 ‘일반’적인 연애를 했을 때, 더 강제로 당한다는 느낌이었어요. 은근슬쩍. 해도 되지? 묻지 않고, 일단 눕히고 나서. 안 돼. 위험한 것 같아. 싫어. 그렇지만 여기서 싫다고 하면 날 사랑하지 않니? 이럴 것 같아서…”


아람은 bdsm이 폭력적이라고 비난받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마치 여자가 강간을 즐기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도 질색이다. 오히려 아람에게는 ‘일반’ 연애에서 벌이지는 일들이 더 폭력적이고 강제적이었다.


“bdsm은 적어도 ‘나 이거하고 싶어’ 라는 걸 합의를 한 뒤에 이뤄지니까. 저는 오히려 합의가 안 된 관계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쓰다듬는 것도 합의를 거쳐야 한다


여기 ‘연애’ 관계를 의심하는 인물이 또 있다. 제리는 ‘연애’를 수평적 관계라 생각하지 않았다.


“연애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 권력을 상대에게 더 주게 되잖아요.(흔한 말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그게 단순히 감정 문제만이 아니라, 연애를 하게 되면 여자가 약자가 되더라고요. 여자는 사랑을 할 때 이렇게 해야 한다는 스테레오 타입이 존재하니까.”


남녀가 연애를 한다는 말은 현실에서는 많은 부분 남성에게 통제권을 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통제권의 다른 말은 ‘리드’이다. 리드를 하는 건 주로 남성. 여성은 남성의 리드에 따라가며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연애 과정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행위들을 합의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누가(어떤 젠더가) 그것을 이끌어야 하는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건 제리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런 불평등 관계를 어떻게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하여 찾아봤다. 그러다 bdsm를 알게 됐다. 지배하고 훈육하는 자가 있는 관계. 두 사람 간의 역할을 ‘드러내놓고’ 존재하는 관계에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다양한 bdsm 범주 안에는 분명 권력 차가 존재하는 관계가 있다. 주종, 그러니까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관계. 이들 사이의 권력 이양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을 전제로 한다. 아무 때나, 절차 없이, 침대로 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 E L 제임스의 베스트셀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표지. 특히 중년여성들에게 인기를 모은 성인용 할리퀸 로맨스물로,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bdsm 관련 소설이다.


제리는 합의할 내용이 담긴 21장짜리 계약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방대한 합의에 동의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긴 시간에 거쳐 상대와 대화한다. 이런 절차가 생소하다면, 영화 <50가지 그림자>(E L 제임스의 베스트셀러 로맨스 소설을 영화화한 것)를 떠올려보자. 주인공들이 처음으로 행위를 하기 전에 무엇을 하는가. 식사를 하며 계약서를 검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21장의 방대한 계약서까진 아니어도, 보통 bdsm 관계에서는 행위 전 합의를 거친다. 롤을 정한다. 어떤 플레이를 할지. 어떤 관계를 맺을지. 일회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행위를, 어떤 수위에서, 그리고 언제까지 할 것인지. ‘행위 중지’를 선언하는 세이프워드(safe word)를 정하는 것은 필수이다. 명확한 합의는 bdsm 행위의 기본 중 기본이다.


“우리 같이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는 쓰다듬는 것도 합의하고 한다고. 우리가 변태라면, 합의 변태들인 거죠. 저는 그런 부분이 좋아서 하는 건데, 비난을 받는 건 씁쓸하죠.”


“좋았어?”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게 좋아?”


합의는 안전을 위해 강조되기도 한다. 플레이에 따라서는 피를 보거나 호흡을 통제당하기도 한다. 물리적 손상만이 아니다. 통제와 복종 영역이 있다 보니 정신적 고통도 느낄 수 있다.


그런 위험한 짓을 굳이 왜? 라는 의문이 든다면 익스트림 스포츠를 떠올려보자. 스카이 다이빙이나 모터사이클 같은. 위험을 감수하고도 즐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동의-합의 절차의 의미를 안전에서만 찾는 것도 제대로 된 이해는 아니다. 제리 입장에서는 누굴 복종시키거나 복종해야 하는 일상의 문제이기에, 사람간의 관계와 감정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섬세한 약속들이 필요하다.


오직 침대에서만의 관계를 원할 경우에도 섬세함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냥 ‘일반 섹스’를 할 때는 굳이 하고 싶지 않지만 의무적으로 해주거나 즐기는 척 굴어도, 여기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가 않은 거예요. 조금이라도 행위가 나의 욕구나 동의에 어긋난다면 그 순간 (감흥 없는) 고통, 폭력이 되어버리니까요.”(푸잉-마조히스트)


bdsm라 통칭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플레이와 성향들의 갈래가 있다. 저마다 다르다. 그러니 표준이 없다. 기승전 ‘성기삽입(사정)’이라는 공식이 없다는 말이다. 섹스 행위나 성애의 개념을 넣지 않고 지배-피지배 플레이가 행해지기도 한다. 섹스를 동반하더라도 꼭 성기삽입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여성 도미넌트와 남성 서브미시브의 관계를 그린 웹툰 <어차피 인간은 다 변태야>(작가 장미)를 참조해 보자. 도미넌트 장미는 옷을 벗지 않고 행위를 하기도 한다. 서브미시브 백구와의 관계가 섹스로 마무리되지 않은 적도 많다. 그러니까 경우의 수가 많다고 해야 할까.

▶ 저스툰에서 연재 중인 장미 작가의 <어차피 인간은 다 변태야> 중. 도미넌트 장미와 서브미시브 백구의 관계를 다룬 웹툰이다.


푸잉이 이전 관계에서 즐기는 척 구는 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순서가 빤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성기삽입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채롭다. 솔직해야 한다.


사람 저마다의 성애와 욕구가 조율되는 과정이 바로 합의와 동의다. ‘무릎 꿇고 묶이고 맞고 삽입당한다’ 같은 매뉴얼이 늘 존재하는 곳은 bdsm 영역이 아닌, 성기삽입이라는 표준을 지니고 있는 남성지배문화가 소비하는 포르노 영상 안이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폭력일 뿐이다. (bdsm 성향자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를 통해 경험된 ‘합의의 연습’은 일상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관계에 있어 자신을 소극적이라 했던 아람은 자신의 성향을 인정하고 플레이를 행하면서, ‘일반’ 연애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썸탈 때부터 성향이나 취향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성관계나 연애 스타일에 대한 대화를 많이 하고, 스킨십을 할 때도 서로 조심하고. 그런 게 많이 생겼어요. 전에는 상대가 원하면 그냥 따라가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저의 주체성이 생겼다고나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물을 줄 알게 된 것이다. “좋아?”가 아닌 “어떻게 하는 게 좋아?”를.


bdsm의 기본은 ssc(안전한, 제정신의, 상호합의)


이들의 이야기가 모든 bdsm 관계를 설명해주는 건 물론 아니다. 음지에서 일어나는 위험한 일들을 뒤로 하고 달콤한 이야기만 하고 싶진 않다. 양지에서 사랑의 달콤함을 이야기하지만, 음지에서는 불법촬영물을 찍고 그것을 상업화하다 못해 카르텔을 형성하는 한국 현실에서는 더욱 말이다.


합의와 동의 절차는 관계맺음에 있어 상식 중 상식이다. ‘일반’ 관계에서도, 아니 어디에서나. ‘삽입 시 피임기구 사용’ 정도의 기본 상식이랄까. 그러나 알다시피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다. 우리는 섹스 도중 콘돔을 빼는 남성들을 안다. 피임을 하지 않겠다고 우기는 남성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안다. 상식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특정 젠더가 가지고 있다. 그 힘이 다른 젠더에게 위험이 된다.


bdsm 관계에서 그 위험이 더 커 보이는 이유는 당연하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과 하는 섹스는 복불복이다. 그런데 bdsm 성향자들이 파트너를 어디서 만날 수 있겠는가? 아웃팅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서, 소개팅으로 만나겠는가.


또 하나, 그 ‘정상’이라는 일반 섹스의 첫 경험도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자칫 더 위험할 수 있다. 왜? 처음이니까. 경험도 정보도 부족한 상황이다. bdsm 성향자들 또한 제대로 된 정보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은 무려 21장짜리 계약서를 가진 제리지만, 초반에는 bdsm 관계의 기본인 ssc(안전한safe. 제정신의sane. 상호합의consensual)조차 몰랐다. 이를 지키지 않은 파트너도 만난 적이 있다.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실제 필요한 정보는 음지에 가두고, 각종 매체에서는 묶고 때리는 이미지로만 bdsm를 소비한다. 그럴수록 위험은 커진다.


제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직접 찾아야 했다. 대부분 해외 사이트에 있었다. 그러나 제리처럼 해외 사이트에서 정보를 찾아 국내에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양권  자료를 읽을 수 있는가는 단지 언어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언어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 경제-연령-학업 등이 모두 연관된 문제다. 정보를 가진다는 것은 현실 권력과 분리된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빠질 수 없는 것이 젠더 격차다. 이런 류의 정보는 남성이 접근하기 더 좋다. 세상이 남성의 성에 더 관대하기 때문이다. bdsm 정보 또한 대부분 남성(특히 남성 도미넌트)을 기준으로 선별되고 구성된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정보에서 배제되는 집단도 있다. 레즈비언 등 소수 성적 지향을 가졌을 경우, 아웃팅 위험으로 인해 개개인의 경험마저 공유하기 쉽지가 않다. 이러한 정보(권력)의 불균등은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위험을 초래하는 것은 플레이 자체가 아니다. 밧줄을 사용해서, 촛농이 뜨거워서, 회초리가 등장해서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기획된 불평등이 위험을 가져온다. 젠더 권력 차가 대표적이다. 불평등은 어디에나 나쁘다. 정보와 제어 장치를 가질 수 없는 음지에 들어오면 더 나쁘게 발현되기도 한다. 결국, 고민해야 하는 것은 불평등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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