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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력에 의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대
 
매일 매일 흘러나오는 뉴스 중 태반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들이거나 충격적인 것들이다. 예컨대, 일가족이 승용차 안에서 분신자살을 했다거나 자식을 죽이고 자기도 독약을 먹었다거나 하는 뉴스들 말이다. 그런데 그 죽음의 이유는
‘카드 빚을 감당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신용카드는 자살만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살인’도 부추긴다. 폭력에 저항할 힘이 약하다고 판단되는 여성들은 신용카드를 빼앗기 위해 달려드는 젊은 남성들에게 두드려 맞고 목 졸림을 당하고 급기야 살해되어 암매장까지 당한다.

그뿐인가, 그 얄팍한 플라스틱의 지배력은 엄청나서, 소녀들에게 소위 ‘원조교제’를 하게 만들고 젊은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감행하게 한다. ‘몸’을 팔아서라도, ‘장기’를 팔아서라도 카드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는 카드회사의 태도는, 간단히 누구라도 카드를 만들 수 있다고 친절히 안내해주던 때와 180도 다르다.

현실이 이럴진대, 신용카드를 단지 안전하게 지불을 유예해주는 ‘편리한’ 물건으로만 볼 수 있을까? 신용카드는 이제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것을 움직이는 배후에는 날이 갈수록 지독해지는 ‘소비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상대적 빈곤감 부추기는 소비사회

신용카드는 사실, ‘자꾸 욕망하게 만들고, 자꾸 사도록 만들고, 새로운 것을 찾아 바꾸도록’하는 소비주의의 전략을 가장 잘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이다.

신용카드는 ‘돈으로 무엇인가를 살 수 있는 능력(구매력)’에 의해서만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처럼 선전한다. 인간의 사랑도 신용카드를 이용해 ‘무엇인가를 사줄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고, 인간의 자유도 ‘어딘가로 떠날 자유’, ‘남을 부릴 수 있는 자유’로 표현된다. 그래서 소비사회가 권하는 그 무엇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것은 가장 비참하고 공포스럽고 한심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사실 가난이라는 것이 비참하지 않을 리 없지만 그 ‘빈곤감’이라는 것은 ‘소비사회’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상대적 빈곤감’일 뿐이다. 더 많이 가지게 될수록 욕망하는 소비 수준은 더욱 더 높아지고 상대적 박탈감 및 빈곤감은 더욱더 커진다. ‘샤넬’, ‘구찌’ 등 명품 소비율 1위 국가가 되는 사이, 그에 비례하여 우리 사회의 자살률과 폭력성은 높아져만 간다.

신용카드의 폭력성은 그렇게 ‘가공’의 욕망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그 가공의 욕망을 위해 ‘그 무엇이라도 하게끔’ 한다는 데 있다. 더군다나 정보화 사회의 진행은 신용카드를 이용한 소비주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텔레비전 채널과 채널 사이에서 달콤하고 집요하게 물건을 사기를 부추기는 홈쇼핑들과 인터넷 페이지마다 맞닥뜨리는 쇼핑몰들을 보라. 그것들의 번성으로 쇼핑 행위는 작심을 하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기분에 간단히 가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은행에 가거나 상점에 가지 않아도 자기 방에 앉아서 아주 간단히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하지 않은가.

모두가 ‘자연스럽게’ 차를 바꾸고 핸드폰을 바꾸고 명품을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이 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설파하는 소비주의의 위력은, ‘일가족 자살’이라는 파국으로 나타나는 한편, ‘10억 만들기’, ‘짧은 시간에 부자가 되기’등 희망에 부푼 ‘돈 모으기 열풍’으로도 나타난다. 10억을 만들기 위해 모든 시간을 다 바쳐 일하거나 부동산과 증권 투기를 한다거나, 아니면 다단계판매에 모든 걸 건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거기다가 예전과 달리 ‘돈을 버는 것’, ‘부자가 되는 것’은 윤리적으로 매우 훌륭한 일이라는 식으로 철저히 긍정적으로 해석되는 ‘물질만능주의’가 그 열풍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열풍 또한 파국으로 끝나기가 쉽다. 얼마 전에 1년 안에 10억을 만들기는커녕 전 재산을 탕진해버리고 만 부녀가 동반자살을 한 뉴스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생기있는 삶’을 위해 성찰해야 할 것

문제는 그런 수많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소비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더욱더 크게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더 이상 ‘검약’이나 ‘청빈’은 미덕이 아니다. 검약과 청빈의 미덕을 생각하고 성찰할 만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초고속 소비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적 불평등이나 국가기구에 의한 폭력 등 여타 사회문제에 민감한 젊은이들조차도 ‘소비주의’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희박한 듯 보인다.

그러나 ‘소비주의’의 폭력은 그 어떤 폭력보다 교묘하고 그래서 더 위험하다. 소비주의는 ‘자기존중’과 ‘힘’을 가장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며, 자기의 가치와 잠재적 힘을 따르는 대신 획일적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욕구를 쫓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용카드는 그런 획일적 ‘모노컬처’의 가장 충실한 도구가 된다.

쓰지 않는 물건을 사게 하고, 멀쩡한 물건을 버리게 하는 그 대량소비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지구는 계속해서 약탈당하고 파괴당하고 있다. 또한 획일적인 소비문화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드는 폭력적인 소비주의 때문에 풍요의 시대를 구가하는 수많은 이들이 절망적인 고통에 내몰리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점점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전지구적인 소비주의의 폭력적인 정체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은 지구생태계나 우리의 ‘생기있는 삶’을 위해서나 절실하게 필요한 일 아닐까. 
이윤숙일다는 어떤 곳?

    [녹색시선] 가난을 밀어버리는 ‘신화’ / 윤정은 2005/03/29/
    [녹색시선] 자가용차 없이 살 수는 없는가? / 이경신 200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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