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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새지평

이력서를 다시 쓰는 시간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8.02.25 08:30

나를 닮은, 새로운 이력서 만들기

<나를 구성해온 일들의 기록> 마지막 이야기


※ ‘줌마네’에서 지난해 9월 <인간적으로 돈버는 힘 기르기: 나를 구성해 온 일들의 기록>이라는 이름의 캠프를 열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그래서 가시화되지 못한 여자들의 일 경험에 이름을 붙이고 당사자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내기 위한 자리였다. 그 1박2일간의 이야기를 참가자였던 오보의 시선으로 담아낸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서른 살의 한 여자가 이력서에는 담을 수 없었던, 지난 시간들 속의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나를 구성해온 일들


아침이 밝았다. 우리는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캠프의 하이라이트. 나를 구성해온 일들을 다시 쓰는 시간이에요. 어제 하루 종일 이것저것 하면서 기억을 끌어올렸으니. 간단하게 연표를 쓴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오솔의 안내에 따라 참가자들은 각자 종이를 받아들고 흩어졌다. 나는 책장 앞의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냥 무작정 써보기로 했다. 영화를 찍었던 그 순간부터.


▶ 나를 구성해온 일들을 다시 쓰는 시간. ⓒ줌마네


연도별로 내가 무엇을 했는지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리며 쓰다 보니 했던 일들과 더불어 당시에 했던 생각들도 조금씩 되살아났다. 밤마다 이력서를 쓸 때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꽉 채워지지 않은 이력서는 충실하게 살지 않은 증거라던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동안은 그 빈 칸들을 억지로 채우려고 했는데 오늘은 종이가 가득 찼다. 쓰면 쓸수록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 진행자가 마무리를 알리는 순간까지도 펜을 놓지 못했다.


▶ 캠프 둘째 날 쓴 나를 구성해온 일들의 기록. (작성자: 오보)


나는 캠프의 마지막에서야 겨우 작은 실마리를 하나 잡은 것 같았다. 그것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노란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때의 기억과 감정은 휘발되어갔다.


다시 시작


캠프 일주일 후 ‘줌마네’에서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캠프의 녹취를 풀어달라고 했다. 녹취록을 바탕으로 책을 엮어낼 생각인 듯 했다. 알바도 안 구해지고, 이력서를 보낸 곳에선 연락도 없고, 하릴없이 시간만 보낼 바엔 돈이라도 벌자 싶어 겁도 없이 하겠다고 했다. 파일을 받고 보니 장장 열 시간이 넘었다. 스무 명의 참가자들의 말을 듣고 또 들으며 글로 옮겼다. 우리가 이렇게 많은 말을 했던가. 2주간 녹취를 풀며 귀는 피곤하고 손가락은 아프고, 이어폰을 몇 번이나 후려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말들은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리고 나는 또 겁도 없이 지금 이 글을 쓰겠다고 했다. 벌써 넉 달 째다. 이력서를 쓸 때 보다 더 많은 밤을 지새웠고 괴로웠다. 이 글을 쓰는 건 나와 마주하는 시간들이었으니까. 밤마다 수많은 질문들에 둘러싸였다. 무엇보다 나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했다. 글을 잘 써내지 못할 때마다 나는 또 자책했고 그럴 때면 캠프의 마지막 날 쓴 일들의 기록을 꺼내 봤다.


캠프 후나 이 글을 쓰면서도 큰 변화는 없다. 붙잡았다고 생각한 실마리도 여전히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다만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고 후회한 수많은 시간들, 채워지지 않는 이력서의 빈칸들이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여전히 ‘일’이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또다시 나를 구성해온 일들을 써내려간다면, 적어도 지난 넉 달 동안의 칸들이 더 늘어나 있겠지.


▶ 얼마 전 스무 명의 여자들이 캠프에서 나눈 이야기를 엮어낸 책자가 나왔다. <나를 구성해온 일들의 기록>(줌마네 엮음, 2018년 1월) 구입 문의 zoomanet@naver.com


에필로그


‘줌마네’에서 한창 이 글의 마무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였다. 깜빡이는 커서에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 막 짜증이 날 무렵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뭐 하냐고 묻기에 ‘일하고 있어’ 라고 적으려다 ‘뭐 좀 쓰고 있어’라고 고쳐 보냈다. 다시 한참이 지나고 ‘줌마네’ 기획팀 하리가 작업실로 들어왔다.


“오보, 일하고 있어요?”


그제야 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일하고 있어요.”


[필자 소개] 오보: 간간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지역신문 모니터링, 스크립트 알바, 라디오 방송녹음, 다큐멘터리 연출부, 영상회사 편집부 등의 일을 해온 구직자.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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