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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밥 짓기, 무려 밥 짓기

[머리 짧은 여자 조재] 아직은 이벤트, 밥 지어 먹기



부모님의 별거 이후 집에서 눈에 띄게 침체된 공간은 주방이었다. 새삼스럽고 진부한 스토리다. 주방이 곧 엄마의 공간이었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엄마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의 주식은 라면이 됐다. 내 몸의 3할은 라면이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직접 반찬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어쩌다 한 번씩 찌개를 끓이거나 두부조림 같은 간단한 반찬을 만들었다. 엄마는 가끔 연락해서 그 소식을 듣고 ‘잘 했다’고, ‘네가 여자니까 그렇게 가족들을 챙겨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여자니까, 누나니까 집안을 살뜰히 챙기라는 충고는 페미니즘의 ‘페’자도 몰랐던 시절에도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내 행동은 의도와 상관없이 곧 가족 돌봄과 연결됐다.


한동안 반항심이 생겨서, 귀찮아서, 바빠서, 여러 이유를 대어가며 밥을 지어먹지 않았다. 늘 그렇듯 라면을 끓여 먹거나, 고기를 구워 먹거나,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이어졌다. 아쉬웠다. 사실 이것저것 사다가 적당히 재료를 다듬고 좋아하는 맛으로 음식을 만드는 일은 내가 꽤 즐거워하는 일 중 하나였다.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어 그런 일을 제쳐두기엔 아까웠다.


얼마 전부터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가족 돌봄에 큰 의지가 없으니, 다른 가족들이야 먹든지 말든지 내가 좋아하는 걸 직접 만들어 먹기로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마트에 들렀다. 장보기부터 난관이었다. 집에 어떤 식재료가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일단 필요한 걸 다 샀다. 애호박, 콩나물, 청양고추, 양파 등등. 집에 와 냉장고를 뒤지니 삭아서 물이 흐르는 호박, 누런 파 따위가 나왔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 일상이 아니라 이벤트가 되니 식재료들이 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리 없다.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장보기부터 남은 재료 손질, 그리고 뒷정리를 포함한 총체적인 무엇. 그 총체적인 과정을 따라가기엔 나는 아직 허술한 데가 많다. 기어코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남은 재료를 봉지에 대충 담아 냉장고에 때려 넣었다. 애호박은 아마 다음 이벤트 때 폭삭 주저앉은 채로 발견될 것이다.


고작 밥 짓기고, 무려 밥 짓기다. 단번에 좋아지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지금은 시간 여유가 있으니 차분히 시도해볼 예정이지만, 바빠지면 또 언제든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은데 나 하나 챙겨 먹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이 정도 안일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미지의 냉장고 ⓒ조재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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