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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내를 감추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를 읽고 



“부모님은 아세요?”

 

살면서 동성애자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바글대는 공간, 이를테면 학교, 대중교통, 대형마트, 시청을 비롯한 관공서, 병원…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곳을 다니면서 동성애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권력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권력, 원한다면 영원히 무지할 수 있는 권력이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동성애자인 것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걸 알 수가 있겠냐고 반박할 수 있겠다. 사실 정체성이라는 건 부러 감출 필요도, 드러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감춘다면, 당연히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몇 달 전, 이십대 초반부터 십 년 동안 여자친구를 만나왔지만 자신이 레즈비언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사람과 마주했다. 그 사람은 초면인 나에게 “부모님은 아세요?”라고 물은 뒤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그들에게 버림받는 것이 너무 두렵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별다른 커뮤니티 활동 없이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연애 사실을 숨기며 지내서 그런지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인정 집단은 부모인 듯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을까 봐 불안에 떠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 부모가 “동성연애 하지 마!” 호통 치면 내 사랑을 포기할 건가?

 

내 경우는 ‘내 정체성을 왜 부모에게 말해야 하지?’라는 마음으로 산 지 너무 오래되었다. 나는 부모에게서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한 지 오래되었고, 내 사생활을 어디까지 공유할지는 전적으로 내 의지와 선택이라고 생각해왔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솔직히 나는 부모가 내 정체성을 ‘이해’하거나 ‘수용’할 거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괜히 말해서’ ‘심려’를 끼치느니 말하지 않는 편이 ‘효도’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엔 나 같은 선택을 하는 친구들이 꽤 있는데, 가끔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중 극히 일부는 부모에게 동성애인을 소개시키고 함께 경조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내 눈에 그건 너무나 ‘비현실적인’ 일이다. 내 부모에겐 내 정체성 자체가 비현실적일지 모르겠지만.

 

레즈비언 딸의 사생활을 알게 된 엄마의 속내

 

▶ 소설 <딸에 대하여>(김혜진, 민음사, 2017) 표지 이미지 


가끔 “동성애를 혐오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좀 불편하다”거나 “내 자식만 (동성애자가) 아니면 된다”고 말하는 호모 포비아들을 본다. 그들은 자신의 언행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남의 인생을 난도질한다. 그런데 내 부모가 그런 사람이라면? 내 가족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아니란 걸 확인할 마음도 없다. 두렵기 때문이다.

 

자식 입장에선 부모의 입장, 부모의 속내는 늘 ‘짐작’의 대상이 된다. 지난 9월에 출간된 소설 <딸에 대하여>(김혜진, 민음사, 2017)가 눈길을 끄는 건 이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딸과 딸의 동성애인과 한 집에서 살아가는 중년 여성이 화자로 등장한다. 레즈비언이 비중 있게 등장하는 국내 소설은 많지 않을뿐더러 주인공이 레즈비언이 아니라 레즈비언의 엄마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에는 내내 짐작하던 ‘부모의 내면’이 펼쳐진다. 엄마가 ‘딸애의 사생활’을 알고 싶지 않은 것처럼, 딸 입장에서도 솔직해서 더 잔인한 ‘엄마의 속내’를 알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 소설에선 레즈비언 딸은 기어코 자신의 사생활을 엄마 눈앞에 드밀고, 레즈비언 딸의 엄마는 꽉 억눌린 자기 속내를 드러낸다.

 

“저 애들과 지내는 동안 내가 또 무엇을 보게 될지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순간과 장면 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 내가 상상하고 짐작한 바로 그것들을 똑바로 봐야 하는 것. 어쩌면 내가 각오한 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두려운 모습일지도 모르는 어떤 것.

 

마땅히 감춰져야 하는 것들이 드러나고 마침내 내가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 오겠지. 하필이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누군가는 그럴 만한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런 시시껄렁한 속담을 소곤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럴 만한 이유도, 원인도, 잘못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속수무책 보고 싶지 않은 것들에 노출되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엄마는 두렵다. 내가 낳은 아이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 삶이 어떤 건지 내가 알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꼴을 보는 것도 두렵고, 그걸 본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도 두렵다.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두렵다. 개인의 두려움은 사회적 혐오와 맞물린다. 내가 두려워하던 엄마의 두려움이 펼쳐진다. 그런데 엄마의 두려움은 이게 끝이 아니다.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삶에 대한 두려움

 

이 소설은 주인공의 딸에 대한 이야기와 주인공이 요양원에서 돌보는 ‘젠’이라는 여성의 이야기가 양축을 이룬다. 젠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유럽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후엔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평생을 허비한 사람”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 하나 낳지 못한” 탓에 요양원에서 국가 보조금으로 연명하며 “기저귀도 잘라 쓰는” 대접을 받는다.

 

주인공은 젠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정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젠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불사한다. 그것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생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외곽까지 내몰리는 젠의 모습에, 딸의 미래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부당해고를 당한 동료를 위해 기꺼이 거리에 나서는 딸, 남들보다 많이 배운 딸, 하지만 자신처럼 육체노동으로 노년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딸….

 

이 작품을 두고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칭하는 리뷰들을 보았는데, 이 말을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 불만스럽고 조심스럽다.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여성은 아니다.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과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은 다르고, 자식을 낳은 여성과 낳지 않은 여성은 다르다. 어떤 조건을 갖추었는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여성일 수밖에 없다. 다르다고 해서 손을 잡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간극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배타심을 애써 누르며,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대해야 한다.

 

작품 안에서 화자는 딸과 딸의 애인, 그의 친구들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놀랍게도 그들 중엔 결혼한 사람들도 있다. 직장도 있고 가족도 있는 사람들. 그들은 뭐가 아쉬워서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걸까.”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독자 눈엔 훤히 들여다보는 속이지만, 이 같은 말들이 쉽사리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다. 이 뜨거운 자갈 같은 말들이 기어코 터져 나올 때, 돌에 맞는 사람에게 생채기가 생기는 것은 물론 그 말을 뱉은 이의 내면도 만신창이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10년 전 “페미니스트를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을 마주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저 페미니스트인데요”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페미니스트가 천 명쯤 있냐”며 무식하고 용감하게 물었고, 나는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내 주변에는 온통 페미니스트니까 천 명보단 훨씬 많지 않겠냐”라며 비아냥거리며 답했다.

 

그때에 비해 페미니스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아졌는지 더욱 척박해졌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페미니스트를 본 적 없다”는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었을 줄 안다.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사람을 대면한 적 없을지라도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혹은 그의 친구가 ‘페미니스트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동성애자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람에게 “제가 동성애잔데요”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내 정체성을 이야기할 만큼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커밍아웃 하는 순간 그가 나를 때릴지, 외면할지, 앞에선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여놓고 뒤에선 역겹다고 욕할지, 어디 가서 내 정체성을 함부로 떠벌리지 않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거래처 사람이, 직장 동료가, 내 가족이 내 정체성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나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음은 두려움을 키우고 침묵으로 이어진다. 이 두려움은 당사자들만의 문제인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이겨내야 하는 문제인가.

 

성정체성이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가까운 이들로부터 ‘이해’받을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시시각각 변하는 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데, 타인이 “다 이해한다”며 격한 포옹을 하면 어색할 것 같기도 하다.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그저 좀 더 ‘조심스러워’지자는 것이다.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모르지 않은가. 내가 아직도 이성애자로 보이니?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웃음을 터트릴 텐가, 눈살을 찌푸릴 텐가. (kook)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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