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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장 같은 나의 공간, 고시원

[머리 짧은 여자, 조재] 나를 돌보기



아침에 50분 더 잠을 잘 수 있게 됐다. 구리 친구 집에서 강남 고시원으로 거취를 옮긴 까닭이다. 출퇴근 시간 지옥버스,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되니 여유가 생겼다. 이 여유라는 것을 담보로 한 달에 32만 원을 지불한다.

 

32만 원짜리 공간은 주거 공간이라기 보단 서랍장 같은 느낌이다. 효율적으로 물건을 담기 위해 따박따박 칸막이 쳐진 서랍장. 효율적인 싱글침대, 효율적인 옷장(이라기 보단 옷걸이), 효율적인 책상, 효율적인 의자, 효율적인 미니 냉장고! 딱 이정도 물건이 아주 효율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단잠 자는, 효율성을 싫어하는 효율적인 인간 하나.

 

▶ 나를 위한 가장 티나는 돌봄, 빨래   ⓒ머리 짧은 여자, 조재

 

‘구리에서 출퇴근이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리겠네, 수도권 사는 사람들은 다 그 정도 시간은 기본으로 들여서 다녀요.’ 면접 보는 날 사장님이 말했다. 그렇구나,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나라고 못할 것도 없어보였다.

 

짧은 기간 직접 생활해보니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산다는 게 마땅한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일주일 중 5일은 오직 임금노동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동시간은 10시간인데 출퇴근만 3시간이 걸리니 말이다. 이 불합리에 아침저녁으로 치를 떨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산다는 것이겠지. 마땅하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런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 구리를 떠나 강남 고시원에 살게 된 것이다. 나름 대안이라면 대안이겠으나 적은 월급에 월세까지 뜯기니 속이 좀 쓰렸다. 그럼에도 당장 몸이 편해지니 손바닥만 한 공간이라도 감사한다.

 

시간 여유가 생겨 다른 활동을 할 기력도 생겼다. 기력이 생기자마자 하고 싶은 건 나를 돌보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활동을 한다든지, 아니면 나를 입히고 먹인다든지, 그냥 그 정도의 소소함. 장시간 출퇴근할 때는 기력이 없어 꿈도 못 꾸던 일이다.

 

빨래를 돌린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고, 다 된 빨래는 양 끝을 잡아 각을 맞춰 탁 털어준다. 섬유유연제 향이 배어있는 빨래가 바싹 마르면 차곡차곡 접어 침대서랍에 줄 맞춰 넣어둔다. 이 고시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티 나는 일, 나를 위한 돌봄이다. 별거 아니지만 만족스럽다. 서랍장 같은 공간에서 빨래 너는 행복이라니 어딘가 우습다.

 

동네 산책이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버티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사는 곳’이 되려면 산책이 필요한 것 같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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