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땐뽀걸즈가 주는 메시지

‘여고생’ 프레임을 다시 생각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돌이켜보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확실히 상큼하진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탈학교’를 외쳤지만 그걸 지지해 주는 사람도, 응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담임선생님 중에 한 분이 의례적인 상담을 받으러 간 어머니한테 “얘는 해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한참 나중에 전해 들었다.

 

무엇이 그렇게 학교를 좋아하지 않게 만들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교실을 가득 채운 40명의 학생 중 하나이고, 나는 분명 남들과 다른데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굉장한 나르시스트였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치곤 매우 조용히 학교를 잘 다녔다.

 

그렇다고 학업에 열심히 임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학교를 다녔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고등학교 때가 특히 그랬다. 시간상으로 보면 고등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더 남아있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의 기억이 있을 뿐 고등학교 시절의 특별한 기억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땐뽀걸즈>에서 출연진들이 환하게 웃으며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눈물을 흘린 건, 부러움의 눈물이었을까?

 

▶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땐뽀 동아리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땐뽀걸즈>(이승문 연출) 포스터

 

<땐뽀걸즈>(이승문 연출, 2016, 현재 극장 상영 중)는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니며 ‘땐뽀’ 동아리 활동을 하는 고등학생들과 그 동아리를 지도하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담긴 다큐멘터리다. 일본 청춘 영화들이 생각나는 화사한 화면의 색감은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학생들의 웃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찰 때는, 약간 우려가 들기도 했다. 영화가 이 ‘여고생’들을 어떻게 그려내고자 하는 걸까, 다분히 여고생을 소비하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춤을 추는 여고생들의 모습을 담았다고 하길래 자연스럽게 TV 브라운관을 장악했던 여성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춤추는 여고생들의 꿈’ 이런 말을 들으면 교복을 입고 아기자기한 춤을 추는 여성 아이돌이라는 공식 같은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땐뽀걸즈>도 여고생들의 그런 부분을 조명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땐뽀걸즈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화면에 담긴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나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이승문 연출의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 중에서


<땐뽀걸즈>의 주인공들은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물론 처음에는 선생님이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말을 건네기도 한다) ‘땐뽀’를 추고 있으면서도, 그 춤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어쩌면 급격하게 나빠진 거제의 경제 상황의 영향으로 가족을 멀리 떠나보내거나 가족 부양에 일부 힘을 보태야 하는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어떤 반짝이는 꿈을 꾸지 못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그 답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그 지점이 바로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여고생들을 어쩔 수 없이 꿈을 잃은 소녀들로 묘사하지 않고, 꿈을 좇아 뭐든 해야 하는 소녀들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물론 땐뽀걸즈에게 아예 꿈이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은 댄스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고, 그걸 위해 땀 흘리며 늦은 밤까지 연습을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만을 위해 다른 일들을 희생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소녀들로 조명하지 않는다. 눈물 흘리며 꿈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수하고 여린 소녀들로 조명하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쫓아다니며 무언가를 담아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어디에선가 서서 지켜봐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담아낸 화면들이 땐뽀 동아리에 들어오고 나서 학교에 잘 나오게 되었다며 ‘이번 달은 한 번밖에 지각 안 했어요’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인물의 모습, 법적 성인 없이 생활하기 때문에 월세도 직접 벌어야 해서 알바와 동아리 활동을 병행하는 인물이 고기집에서 틈틈이 스텝을 밟으며 연습하는 모습, 그리고 또 취업 준비를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 준비를 하는 모습 등이다.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기도 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고, 고마운 사람에게 그 감정을 어색하게 표현하기도 하는 인물들의 모습도 나온다. 그런 인물들을 보면서 ‘여고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내가 하는 고민들을 그들이 하고 있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나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여고생과 내가 크게 다를 일이 없다. 여고생, 청소년기라는 건 누구나 겪는 과정이고 한 때 나도 그들이었고 또 그들도 내가 될 테니까. 개개인의 각자 다른 경험을 무시하고 퉁치자는 게 아니라 어린 여성, 청소년 여성, 여중생, 여고생에게 자꾸 어떤 프레임을 씌우고 있지 않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얘기다.

 

▶ 다큐멘터리 <땐뽀걸즈>의 한 장면

 

<땐뽀걸즈>를 보고난 후에 계속 이 영화가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뭔가 마음에 짚히는 게 있는데 그게 뭘까 한참을 고민했다. 영화를 곱씹으며 생각하다가 어느 여성 아이돌의 노래 가사에서 나의 풀리지 않았던 무언가에 대한 이유를 찾았다.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 그래야 네가 날 더 좋아하게 될 걸. 태연하게 연기할래. 아무렇지 않게. 내가 널 좋아하는 맘 모르게”, “그저 바라보고 있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지. 조금만 더 다가와요. 내 맘 알아줘요.”

 

이 노래 가사로 대변되는, 흔히 말하는 요즘 어린 여성들의 태도라는 걸 땐뽀걸즈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땐뽀걸즈>의 인물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줄 알고,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성취할 줄 아는 주체성이 있다. 지금의 많은 여고생에게 씌워진 프레임에는 없는 그것이 땐뽀걸즈에는 있었다. 땐뽀걸즈가 특별했던 것일까? 아니면 여고생 프레임이 잘못된 것일까? 구글에서 ‘여고생’이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들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포털 사이트에서 여고생이라는 단어와 함께 뜨는 연관 검색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후자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 것이다.

 

성적으로 대상화를 하거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리고 때 묻지 않는 순수함을 지닌 존재로 미화시키거나. 어린 여성들을 대거 출연시켜놓고 꿈을 위해서라며 체중계에 오르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남자들에게 건전한 야동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현실이 잘못이라는 걸 알 것이다.

 

▶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땐뽀' 동아리 학생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땐뽀걸즈>(이승문 연출)

 

영화의 마지막에서 눈물이 났던 건, 내가 가지지 못했던 추억이 아쉽거나 그들의 싱그러움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사실은 미안함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웃는 모습이 예쁜 그들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건데 싶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행에 대한 배우들의 고발 이후, 리즈 위더스푼이 얼마 전 ‘우먼 인 헐리우드’(Women in Hollywood) 행사장에서 발언했다는 내용이다.

 

“여기 있는 어린 여성들에게, 당신의 인생은 다를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가 당신의 뒤를 지켜줄 거니까.”

 

지켜준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아직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땐뽀걸즈의 환한 웃음에서, 더 많은 땐뽀걸즈가 나올 수 있고 그게 가시화될 수 있도록 그래서 더 많은 여성들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그걸 전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받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땐뽀걸즈는 진행 중이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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