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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기 위한 여행길에 오른 여성들에게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 라이언 머피 감독, 줄리아 로버츠 주연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

 

줄리아 로버츠 주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지금 나는 강원도 두메산골에 있는 토지문화관에 와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름 모를 커다란 산새들이 창가로 날아와 노래를 불러주고, 방문을 열면 순한 능선의 산이 에워싼 채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곳. 소소하지만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하루 세끼 밥을 챙겨먹는 일을 비롯한 잡다한 일상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글만 쓸 수 있는 환경이 만족스럽고 감사할 뿐이다.

 

추석이 가까워오자 기혼여성 작가들 사이에서 걱정 섞인 대화가 두런두런 오고 가기 시작했다. 각종 다양한 전 부치기, 송편 빚기 등 추석 음식 준비를 거대한 해일이 오는 것에 비유한 어느 작가의 말은, 차라리 시적(詩的)이었다. 올해 추석은 지루하리만치 유난히 길지 않았던가.

 

연휴 동안 문을 닫는 식당 덕분에 다양한 햇반과 컵라면으로 일주일을 보내야 했지만, 그래서 기름진 전과 송편은 못 먹었지만, 좋았다. 오히려 더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더할 나위 없는 홀가분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리라. 추석 연휴 기간에 토지문화관에 남은 작가들은 대부분 결혼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우리들의 상황을 기혼여성 작가들은 내심 부러워하거나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명절이 끝난 뒤 이혼율이 늘어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법원행정처의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설날과 추석 전후 10일 동안에 하루 평균 577건의 이혼 신청 접수가 있었다고 한다. 명절 때 평상시보다 1.9배 많은 이혼 신청이 접수되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여성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매년 찾아오는 명절 후유증만 있을까. 여성을 남성보다 하위 존재로 상정한 채 차별하는 인습이 일상 구석구석 뿌리 깊게 박힌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싶다. 명절이면 집을 뛰쳐나오고 싶은 기혼여성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 라이언 머피 감독, 줄리아 로버츠 주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

 

이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인가?

 

라이언 머피 감독의 2010년 작 <먹고 마시고 기도하라>의 주인공 리즈에게는 명절 공포증도, 사사건건 잔소리하며 괴롭히는 시어머니도 없다. 마음만 먹으면 해외여행을 훌쩍 다녀올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도 있는 그녀는 성공한 작가다. 다만 리즈가 번 돈으로 사업을 벌였다 접기를 습관적으로 하며, 내내 자신의 꿈을 좇는 다소 철이 없는 남편 스티븐이 있을 뿐이다. 그의 뒷바라지에 지친 그녀는 한밤중에 욕실 바닥에 무릎 꿇고 흐느끼다가 신에게 도와달라는 기도까지 하며 걷잡을 수 없는 회의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진짜 자신이 원했던 삶인지 모르겠다는 회의.

 

그래서 그녀는 진짜 자신을 찾기로 결심한다.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연인 데이비드와의 관계도 삐거덕거리자 일 년 간의 긴 해외여행을 무작정 떠난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즐겁게 먹고 마시고, 인도와 발리에서는 마음을 치유하는 일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여행.’

 

듣기만 해도 즐겁고 신나는, 어찌 보면 배부른 자의 여행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심정을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리즈와 같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여성조차도 느낄 수밖에 없는 결핍이 무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었을지.

 

리즈는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진짜 같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 고백이야말로 자신의 진짜 욕망에 충실한 채 살아가지 못하는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살이 찔까 봐 먹음직스러운 피자를 앞에 두고 먹지 못하는 여자 친구에게 리즈가 “남 시선 신경 쓰지 말고 한 번쯤은 온전히 나 스스로만 위해 보라”고 충고했던 것 역시 그동안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그래서 이제부터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할 터.

 

또 모임에서 “리즈! 당신과 무슨 단어가 어울리는 것 같아요?” 라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받았을 때 난감한 표정을 짓는 그녀는 아직 진짜 자신을 찾지 못한 여성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녀가 자신과 어울리는 단어로 대답한 것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부인, 누군가의 여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좀 더 발전한 대답이, 그녀의 직업인 작가였다니!

 

그러자 처음 질문을 던진 이는 리즈에게 마치 화두처럼, 쐐기 박듯 받아친다.

“그건 직업이잖아요. 작가가 당신, 리즈는 아니잖아요.”

 

결국 그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진짜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는 여자’로, 자신의 대답을 마무리하면서.

 

▶ 라이언 머피 감독, 줄리아 로버츠, 하비에르 바르뎀, 리차드 젠킨스 주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

 

타인에 의해 내 가치가 정해진다는 믿음

 

치유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언제 행복을 느끼냐는 질문을 던질 때면, 리즈처럼 난감한 표정을 짓는 여성들을 자주 만나곤 한다. 자신이 행복한 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 스스로 놀라워하는 여성들도 보게 된다. 내가 이런 것들에 행복을 느끼는구나, 내가 이런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구나, 비로소 깨달으며 환하게 미소 짓는, 심지어 눈물까지 보이는 그녀들을 볼 때면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에는 둔감함을 강요당했을지도 모를 지난 시간들이 겹쳐져 안쓰러움마저 인다.

 

심리상담가인 미리암 그린스팬은 <감정공부>(Healing through the Dark Emotions)라는 책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분열할 수밖에 없는 여성과 남성의 감정에 관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남성들은 자신의 몸을 감정으로부터 방어해야 한다는 세뇌를 당하고 있다고,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른바 남성다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감정 학대로 이어진다고 말이다.

 

그에 반해 여성은 타인의 요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교육받지만, 자기 자신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정반대로 행동할 것을 교육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또 자신의 몸을 타인의 관심과 열정을 낚는 도구로 사용하도록 교육받는다고도 주장한다. 오랜 세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들에게 주입한 성차별주의 가치로 인해, 여성들은 자신의 가치가 외모에 있으며, 특히 남자들에 의해 괜찮아 보인다고 인정받는 것에 따라 스스로의 가치가 정해진다는 암묵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왜곡된 가치로 인해 매스미디어를 통한 외모지상주의 열풍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여성의 외모는 규격화되었고 그 미의 조건에 들어맞기 위해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섭식장애를 앓고, 성형수술을 하는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행태가 바로 자신의 육체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남용하는 것일 터.

 

주인공 리즈가 진짜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까지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타인의 요구에는 민감하지만 정작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에는 귀를 막았던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여자 친구로서 말이다. 남편 스티븐에게 늘 자신을 퍼주며 돌봐주기를 자처했던 아내로 말이다. 성공한 작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 주체로 서지 못하고 늘 누군가에게 속한 객체로 살아갔기에 아마도 그녀는 진짜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니, 그동안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한 채,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 라이언 머피 감독, 줄리아 로버츠 주연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

 

‘여자가 왜 혼자 다니냐?’ 무례한 질문들

 

하지만 나를 찾는 여행 또한 순조롭지만은 않다. 왜 혼자 다니냐? 왜 결혼은 안 하냐? 언제 남자를 만날 거냐? 리즈는 여행지마다 호기심에 찬 사람들의 무례한 질문을 받는다. 그렇다. 여성에게 늘 남자가 필요할 것이라는 인식, 남편이든 애인이든 남자가 옆에 없는 여성은-특히 그 여성이 나이가 들었다면 뭔가 더 불안하고 외롭고 소외된 여성일 거라는 선입견이 세상에는 아직도 충만하다.

 

재작년 기준 우리 사회의 40대 이하 사람들 중 52.8%가 1인 가구라고 하니, 그만큼 비혼은 일반적인 생활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 비혼의 이유 또한 과거에 비해 다양해지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을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에 들어가고 싶지 않거나, 결혼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고 기른 사람, 이혼과 사별을 한 사람 등 그 범주도 넓어지고 있다.

 

하지만 비혼을 대하는 사회적인 인식은 여전히 너그럽지 않다. 여전히 비혼(非婚)은 뭔가 모자라는 비정상 취급을 받을뿐더러, 기혼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유예된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태반이다. 가난해서 결혼을 못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자발적인 비혼인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7년 전 혼자 시골로 이사하던 날, 이삿짐센터 남자는 왜 혼자 사냐? 결혼 왜 안 하냐? 무례하리만치 질문이 많았다. 그리고 결혼이란 제도가 나에게 안 맞는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의 잣대에 의해, 무책임하고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여성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 ‘여자니까 그렇지’ 하는 여성혐오가 비혼여성들에게는 이중으로 부과되어 있는 셈이다. 여성인데다 결혼제도 밖의 여성이라니! 지극히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바라볼 때 이 여성들은 문제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주범일 뿐만 아니라 여성을 순종적으로 길들이려는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에 편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이기적이고 까칠할 것이라는 편견도 여지없이 작용한다.

 

▶ 라이언 머피 감독, 줄리아 로버츠, 하비에르 바르뎀, 리차드 젠킨스 주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

 

불완전한 자신을 용서하라

 

그러나 기혼과 미혼이라는 양 축으로만 달리던 시대가 깨져버린 지 오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이 아닐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을 용서하는 일, 불완전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행복은 애써 먼 미래에서 찾는 게 아닌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다’는 영화 속 대사는 그래서 세계 이혼율 1위를 자랑하고, 그것도 모자라 세계 자살률 1위도 놓지 않는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제발 이제는 외피를 보지 말고 본질을 보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발리에서 만난 스승 케투가 리즈에게 해주는 충고 역시, 비혼여성에 대한 편견의 잣대로 무장한 우리 사회의 굳은살을 녹이는 깊은 울림의 말이다.

 

“때로는 균형이 깨져야 삶의 더 큰 균형을 잡을 수 있어요.”

 

또한 진짜 나를 찾아 나선, 그 험난하지만 눈부실 여행길 위에 서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해주는 귀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더 잘 읽기 위한 영화미학]

 

▶ 라이언 머피 감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06년 세계 40여 개국에서 출판되어 700만부나 팔린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영화 내내 흐르는 이탈리아와 인도, 발리의 문화와 자연풍광은 그 자체로 너무도 풍성하고 아름답다.

 

첫 여행지인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달콤한 게으름’을 보며 그동안 자신을 몰아세운 채 일하고 소진했던 삶을 되돌아보게 된 리즈는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집착하며 자신 안의 허기를 관계를 통해 채우려 했던 스스로를 깨닫게 된다.

 

오래전 로마황제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아우구스테움에 가서 한때 찬란했던 역사의 한 공간이 화재와 노략질로 파괴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투우장으로, 노숙자들의 쉼터로 변하는 것을 목도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하지만 파괴가 끝이 아닌 새로운 변화로 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남자와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늘 두려워했던 자신을 직면하는 계기가 되는데, 리즈가 아우구스테움을 보고 데이비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그녀가 조금씩 성장해감을 알 수 있다.

 

변화가 두려워서 고통에 안주하는 우리와는 달리 혼돈의 세월을 견뎌내고 변화에 적응하며 재난과 약탈을 극복한 아우구스테움을 보면서 느꼈다는, 파괴가 선물임을- 파괴가 있어야 변화가 있음을 깨달았노라는 편지글을 통해서 말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난 리즈가 기도와 명상을 배우며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 건너간 인도의 신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인도의 여러 신 중에 파괴의 신 시바가 가장 추앙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파괴만이 창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이탈리아의 아우구스테움에서 리즈가 발견한 파괴의 미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시바신의 형상인 마하칼라가 검은색을 띠고 있고 이 검은색이 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색으로, 모든 존재를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도 리즈의 심리상태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을 터. 인도에서 기도하며 그동안 힘들었던 것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임을 알게 된 리즈는 비로소 스스로를 용서하며 자신 안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신은 내 모습 그대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지막 여행지인 발리에서 리즈는 자신과 같은 이혼의 아픔을 지닌 남자 펠리프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힘겹게 구축한 내면의 평화가 또다시 남자로 인해 깨어질 것이 두렵다. 그러나 그녀가 용기 내어 펠리프와 동반하는 삶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발리에서 만난 스승 케투의 ‘때로는 균형이 깨져야 삶의 더 큰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조언 덕분.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진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여행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깨달음의 과정으로 여기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함께 전해주고 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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