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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라는 이름으로 겪는 병원생활

비혼여성의 가족간병 경험을 듣다⑥ 권모


※ 고령화와 비혼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비혼여성들이 부모나 조부모, 형제를 간병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개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다>는 가족을 간병했거나 간병 중에 있는 비혼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공유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갑자기 나한테도 닥친 일

 

“등산용 지팡이라도 좀 찾아와 봐.”

앉지도 눕지도 못한 엄마가 힘이라곤 없는 목소리로 날 불러놓고 겨우 말했다. 식구들이 아침밥을 건너뛰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엄마가 일곱 시가 훌쩍 넘은 시각에 이부자리에서 말씀하신다는 것부터가 겁나는 일이었다.

“내 팔 잡고 일어나봐. 도저히 못하겠어?”

나는 부축을 해보겠다면서 엄마를 조심조심 일으켜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떤 자세를 시도해도 엄마는 못 일어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고관절 쪽이 이상한 것 같다는 말은 엄마가 며칠째 해오던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전날에도 엄마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실 때 특히 다리에 힘을 못 주겠다면서 기다시피 하는 동작으로 방 밖을 나왔었다. 그때 당장 병원에 모시고 가야 했는데 오후에 다시 좀 괜찮아졌다는 말씀만 듣고 어영부영 시간을 끌고 말았다. 자책이 들었다. 그러나 넋 놓고 자책만 하고 있기에는 사태가 너무 중해 보였다. 어디라도 모시고 가야 하겠는데 거동을 못하시니 119에 전화를 해봐야 하나?

 

하필이면 아버지도 집을 비우셨던 참이라 잠깐은 혼자 허둥대다가 일단 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다른 자식이 하나라도 더 와서 이동하는 편이 불안해하고 있을 엄마한테는 나을 것 같았다. 당장 집에 좀 와줘, 엄마가 못 걸으셔. 동생을 불러놓고는 스마트폰으로 이른바 ‘폭풍 검색질’에 돌입했다.

 

하필이면 6월 6일 현충일. 공휴일인 탓에 엄마가 다니시던 동네 병원들은 죄다 문을 닫았다. 병도 휴일이라고 쉬면 얼마나 좋을까. 일단 공휴일에도 문을 여는 최대한 가까운 정형외과가 있는지 찾아봤다. 몇 가지 검색어를 동원한 결과 다행히 한 군데가 뜬다. 전화를 걸었더니 병원 직원이 일러준다. 진료가 오후 한 시까지니 최대한 빨리 오라고. 그때가 열한 시 반쯤이었다. 마침 도착한 남동생은 엄마를 번쩍 들어 올려 업고는 차로 이동했다. 우리는 곧바로 정형외과 주소를 ‘내비’에 입력했고, 내달렸다.

 

15분쯤 지났을까.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시간 반가량을 남겨놓고도 빨리 오라고 재촉하던 병원 직원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퉁명스러웠는지 알 것도 같았다. 다들 나처럼 ‘공휴일 진료 정형외과’를 검색창에 넣어보고 온 이들일까. 예상보다 훨씬 많은 환자들로 병원은 몹시 북적거렸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데스크에 가니 오늘 진료 접수는 끝났단다. “조금 전에 전화로 문의했을 때 빨리 오라고 하셔서 빨리 왔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싸움이라면 사랑싸움이고 키보드 싸움이고 간에 모조리 자신 없어 하는 내가 어느새 정색을 하며 따지고 있었다. 절박함이 통했는지 상대는 한없이 인심을 써주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럼 어머님까지만 받을게요”라고 한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 몇 분 뒤에 병원 문을 열고 절뚝거리면서 들어오는 환자는 돌려보낸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싸움을 잘 못하는 나는 초진 환자 정보란에 엄마 생년월일을 기입하면서 어쨌거나 한숨 돌렸다.

 

40~50분 정도 흘렀을까. 드디어 엄마 차례다.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진료 절차가 빠르게 돌아간다. 청력이 좋지 않은 엄마를 위해 크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씀해주시는 선생님이 새삼 고맙다. 그렇긴 한데 엑스레이 촬영을 진행하고 나서도 의사는 염증이 우려된다는 말 외에는 속 시원한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내 귀엔 대학병원에 가보시라는 말만 분명하게 들렸다.

 

▶ 대학병원에 온 날, 이때부터 온갖 검사가 시작됐다. ⓒpixabay.com

 

별수 없이 우리는 정형외과에서 떼어준 서류를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다음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나와 큰언니, 아버지가 동행했던 이날부터 온갖 검사가 시작됐다. 나는 엄마가 탄 휠체어를 밀며 차갑고 낯선 병원 검사실을 정신없이 찾아 다녔다. 문득 그전까진 휠체어를 밀어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몹시 서툰 동작으로 휠체어를 밀면서 때때로 엄마를 당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더 딱해지는 순간은 검사실에 들어간 이후였다. 염증 수치를 측정하는 검사 때는 통증이 심할 거라고 주의를 들어둔 이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픔을 참기 힘들어하며 몸을 떨었다. 웬만큼 아프기 전까지는 티도 안 내는 엄마가 저 정도면 얼마나 힘든 걸까 싶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정형외과에서는 검사 결과로 볼 때, 정작 고관절 부위에는 이상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염증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오니 감염내과 협진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들려줬다. 우리는 다시 감염내과로 가서 접수를 마치고 의사의 진료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림 끝에 만난 감염내과 의사는 왠지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로 우리를 대한다. 걷지 못하는 환자를 앞에 두고 의심되는 원인에 대한 말은 전혀 없이 일단 입원해서 검사를 더해보자고 하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보호자더러 정신 사나우니 한 분만 계시고 다른 분은 좀 나가달라며 언짢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도저히 그에게 엄마의 건강에 대해 상담할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엄마한테 묻고 싶어졌다. ‘엄마, 우리 뭐 잘못했어? 왜 저렇게 고압적이야?’

 

결국 언니와 나, 아버지는 엄마를 다른 병원으로 옮겨 입원시키자는 결론을 내렸다.

 

병원이라는 어려운 곳

 

제대로 간병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의 과정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먼저 길게 풀어놓고 말았다. 그런데 나한텐 환자를 돌보는 일 이전부터 보호자라면 흔히 병원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과정이 또 하나의 거대한 난관이었다. 갑자기 혹은 서서히 환자가 되어버린 가까운 이를 지켜보기, 그리고 환자를 대신해서 쩔쩔매며 병원을 알아보고, 입원수속을 처리하고, 의사의 진찰결과를 듣는 일 등은 모두 마치 어려운 시험 같았다. 그건 앞으로 예상치 못한 고비에 수차례 봉착하게 될 보호자가 맞아두는 일종의 예방주사 격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지난하게 이어질 ‘돌봄’의 일상으로 돌입하기 전에 맷집은 다지고 쓸데없는 기대감 따위는 내려놓게 도와주는 절차였던 것이다. 환자를 직접 돌보는 일은 아니지만 이 과정 역시 또 다른 측면에서 매우 어렵고 성가시다. 병원 직원을 대하는 순간엔 이유도 모른 채 내가 ‘을’이 되어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럴 때면 궁금해졌다. ‘의료비 부담은 부담대로 짊어지고서 우리, 왜 이렇게 자주 굽신거리기까지 하니?’

 

옮긴 병원에서도 모든 절차가 순조로웠을 리는 없다. 거동이 불가능한 엄마는 일단 응급실에 들어가 주사를 꽂은 채 대기했다. 원무과에 가서 5인실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달라는 내게, 직원은 언제 병실이 날지 알 수 없다며 1인실과 2인실도 기다려보란다. 그러면서 병실 비용이 걱정돼 망설이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치료는 해야 될 거 아니에요?” 하고 쏘아붙인다. 결국 강요와 핀잔 사이의 그 무엇에 넘어가 2인실까지 대기하기로 했다.

 

낮에는 함께 있었던 언니들과 아버지도 귀가를 하고 나와 엄마만 병원에 남았다.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있자니 일단은 2인실이라도 어서 났으면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사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내 몸이 불편하면 변덕도 죽 끓듯 한다. 변명 같지만, 환자용 의자 역시 불편해 보였던 터라 엄마를 한시 바삐 옮겨드리고 싶었다. 결국 응급실에 들어온 지 열 시간이 훌쩍 지난 늦은 밤에야 침대가 있는 응급병동에 자리가 났다고 연락이 왔다. 그 연락은 곧 본격적인 간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엄마는 응급병동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일반병실로 갈 수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서도 갖가지 검사는 계속됐다. 아침 일곱 시경부터 정형외과, 감염내과, 류마티스내과에서 번갈아 회진을 왔다. 교수님부터 레지던트까지 여러 선생님들이 다녀갔지만, 엄마가 걷지 못하게 될 정도로 통증이 심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들을 수 없었다. 검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말은 반복해서 들었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날들이 길어지겠구나 싶어 초조해졌다.

 

일단 시간이 되는 식구들이 돌아가며 못 걷는 엄마 곁을 지키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당장은 시간을 내기가 가장 수월한 사람이 나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효도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웬만하면 바쁜 척하지 말자고 다짐해봤다.


▶ 병실이 답답해질 때면 엄마는 산책을 나가고 싶어 했다. ⓒ권혜원


진통제를 투여한 덕에 엄마는 아주 힘겹게, 그리고 천천히 침대 밖으로 나와 한발씩 뗄 수 있게 됐다. 그래 봤자 몇 걸음 못 가 다시 돌아오기 일쑤였지만, 일단 화장실을 가는 일 정도는 한결 쉬워졌다. 엄마의 보호자는 소변 양을 측정할 의무가 있었다. 엄마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따라 가서 해야 하는 이 일이 내 경우 낮엔 별로 귀찮은 줄 몰랐는데, 밤에는 좀 달랐다. 나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고 편집 일을 프리랜서로 한 이후론 늦게 잠드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병실은 야행성 인간에 친화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한밤중에도 갖가지 소음이 커튼을 넘나들곤 하는 그 공간에서 보호자는 언제나 일찍 자둘수록 유리하다.

 

한편 엄마는 평소에도 일찍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며 나와는 달리 밤중에 한번은 꼭 깬다. 이렇게 엄마랑 내가 다른 수면 패턴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나는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병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식사는 못해도 수액은 종일 맞고 지내던 터라 엄마는 병원에서도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밤중에 한 번은 꼭 깨셨다. 그러면 나 역시 자동으로 기상했다. 그 순간 나는 좀비 같아진다. 몸은 일어났지만 눈은 거의 감은 채로 오물처리실에 가서는 소독되어 있는 소변통과 플라스틱 변기를 가져온다. 그러고는 플라스틱 변기를 양변기에 끼우고 기다린다. 용변을 마친 엄마는 침대로 돌아가고 나는 소변통에 소변을 옮겨 담고 양을 확인한다. 측정 후 소변 통을 오물 처리실로 다시 가져가서 헹구고는 소독통에 집어넣는다.

 

이 절차를 끝내면 병실로 돌아와 일지에 소변량을 기록한다. 습관이 들기 전에는 오물처리실에서 병실로 돌아온 후 기록하는 것을 깜빡하고 바로 다시 잠든 날도 있었다. 다음날 일지를 확인하는 간호사가 환자 분 소변 안 보셨냐는 질문을 하면 그때서야 아차 하면서 나는 또 작아졌다.

 

기록까지 끝내고 다시 잠에 빠져들면 새벽 네 시 반쯤 간호사가 엄마의 체온을 측정하러 들어와 한 번쯤 더 깨기 일쑤였다. 열이 오르지는 않았는지 알려주고 나가는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눈인사라도 하고 나면 문득 피곤이 절절히 느껴졌다. 다른 사람한테는 별일 아닐 수 있을 이 일에 적응하는 데 나는 시간이 좀 걸렸다. 밥보다 잠을 좋아하고 컨디션 난조도 잘 먹기보다 푹 자기로 해결하는 나로서는 밤에 두 번 정도 깨는 것이 꽤나 고역이었던가 보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분들 옆을 지키는 보호자가 혹시라도 이런 날 보게 된다면 얼마나 철없어 보일지 말이다. 치매 같은 질환으로 몇 년 동안 밤낮없이 끝도 보이지 않는 고생을 하는 보호자가 들어도 내 투정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겠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분명 투덜거리면서 신선놀음 하는 수준일 거다. 그러나 그때 나로서는 밤을 지내기가 꽤 고단했다. 그만큼 나는 준비가 안 된 보호자였던 것이다.

 

‘엄마, 더 아프면 우리 자매사이 금 가겠어’

 

사실 올해 6월 전까지는 ‘간병’이라는 단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끔 누군가 병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들을 때 나에게도 빠르게 늙어가는 부모가 있음을 문득 절감하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엄마는 체질이 약한 편이긴 해도 그동안 건강검진 결과에서 큰 이상이 발견되지는 않았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다니시는 아버지만큼은 아닐지언정 건강관리도 꽤나 부지런히 하고 계셨다. 작년에 교통사고로 팔을 다치시긴 했지만 회복하신 후에는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니 병원에 들어오기 직전에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이나 그 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데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엄마가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한 때에도 새로 벌인 일이 있다는 핑계로 득달같이 병원으로 모시고 가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의외로 쓸데없이 낙천적인 구석이 있고 준비성마저 부족한 30대 후반 막내딸은 70대 초반 엄마가 병원 신세를 지는 상황에 대해 이전까지는 정말이지 아무런 채비를 해두지 못했었다. 심적으로도, 물적으로도.

 

▶ 잡생각을 키워준 이 보호자용 간이침대를 그리워할 날도 올까? ⓒ권혜원


나는 일주일에 세 번쯤 사무실로 나가는 식으로 일하고 있었고, 내가 출근해 있는 동안에는 주로 언니들과 아버지가 엄마 곁을 지켰다. 밤잠도 나 혼자 일주일 내내 설쳤던 것은 아니다. 주말엔 언니들이나 동생이 병실에서 자곤 했다. 그러나 주중에는 내가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모양새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다음날 해야 할 일에 대해 특히 신경 쓰였던 어느 날엔 병원에서 쪽잠 자는 게 영 내키지 않아 ‘주중에 와서 자줄 사람’을 가족 대화방에서 모집해보기도 했는데, 모집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언니들은 멀리 살고 있거나 가까이 살아도 입시를 앞둔 아이, 학원을 데려줘야 하는 아이, 밥 때를 챙겨줘야 할 아이들이 있었다. 대개 모성은 효심을 이긴다. 우애쯤이야 거뜬히 이기게 마련이고. 물론 언니들은 엄마한테 참 잘했다. 그저 평일엔 등교하는 애들을 돌봐줘야 했을 것이다.

 

한편 동생은 정규직으로 주5일 꽉꽉 채워 출퇴근하고 야근도 제법 자주 하는 처지다. 역시 한 가정을 이뤘고 비교적 튼튼한 돈벌이를 하고 있다. 누구도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하지 않지만,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어쩌면 당시가 그런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유일하게 아이가 없고 정규직 직장인도 아닌 내가 ‘미안해’ 혹은 ‘니가 고생이 많다’라는 말을 듣는 날이 늘었다.

 

실토하건대, 진짜 피곤해서 내 방, 내 침대에서 자고 싶었던 날 밤엔 지금은 없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나도 어떻게든 결혼이란 걸 해서 자식도 낳아둘 걸 그랬나’ 같은 잡생각까지 해봤다. 오죽했으면. 또 어느 밤엔 곤히 잠든 엄마 얼굴을 보면서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물론 속으로. ‘엄마, 절대 더 아프면 안 돼. 언니들이랑 나 정도면 진짜 사이좋은 편인데 엄마가 지금보다 더 아프면 자매사이 금 가겠다.’

 

이제 입원은 그만했으면…

 

가장 답답한 건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도 엄마의 병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뽑고, 촬영을 하고, 더 비싼 장비로 또 다른 촬영을 해대도 좀 더 지켜보자는 답변 외엔 별 소식이 없었다. ‘별 이상 없겠지’ 하는 믿음과 ‘발견하기 어려운 암 같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하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떤 때는 통증의 원인이 이렇게 안 밝혀져도 되나 원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에 겨워 쿨쿨 곯아떨어지는 내가 너무 우습기도 했다.

 

그러다 드디어 엄마 병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류마티스성 다발근통이란 생소한 질환에다 혈관염이 의심된다는 설명이 전혀 희소식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가족들은 한층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쨌든 진단을 듣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한시름 놓을 만했다. 엄마가 앓는 병이 흔치 않은 탓에 진단도 그토록 오래 걸린 것 같았다. 이날 이후로는 엄마도 마음이 더 편해져서인지 한결 편하게 몸을 움직였다. 스테로이드 약 때문인지 식욕도 나아졌다. 이 역시 약 부작용을 염두에 둬야 하니 좋은 일만은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마음이 좀 놓였다. 적어도 지켜보자는 말만 들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무력하게 놓여 있기보단 나았다. 그때 나한테는 그리고 엄마한테는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병이었다. 내과 선생님들은 엄마 병의 원인은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말도 전해줬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입원한 지 3주가 되어갈 무렵 퇴원해서 외래 진료로 추이를 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뛰기는커녕 걷기도 무리였던 엄마가 뛸 듯이 기뻐했다. 엄마도 나도 즐겁게 짐을 쌌다. 희귀질환 산정특례를 위해 갖춰야 하는 서류를 기다리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해낼 만했다. 결국 엄마는 그렇게나 고대하던 귀가의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 엄마가 퇴원하던 날은 날씨도 좋았다. ⓒ권혜원


약간의 반전이 있다면 그렇게 기분 좋게 퇴원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엄마가 다시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외래 진료 날 혈액검사를 한 결과 간에 이상이 생긴 사실을 알게 됐다. 같이 갔던 나는 응급 상황이라는 말을 듣고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하며 또 다시 입원 절차를 밟았다. 처방받은 약이 간에 무리를 줬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엔 엄마가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약을 잘 챙겨 드신 탓에 다시 병원신세를 지는 셈이다. 화가 났지만 화내는 일보다는 엄마를 돌보는 일이 더 급했다. 지난번처럼 거동을 못하는 처지는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어쨌든 원치 않는 생활은 다시 시작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엄마는 팔에 주사를 꽂은 채로 답답한 병원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다른 환자가 앓으며 내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깨는 일 없이 집에 가서 푹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일 것 같다. 일일드라마가 나오는 휴게실 텔레비전 대신 우리 집 텔레비전으로 이 채널 저 채널 맘대로 돌려보고 싶기도 하겠지. 그래도 엄마는 샤워나 머리감기는 물론 옷 갈아입기에 필요한 요령도 이제 제법 터득한 것 같다.

 

나도 이번엔 조금 더 능숙하다. 이전에 이미 겪어둬서인지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가 한밤중에 소음을 내도 예전처럼 짜증을 내지 않는다. 환자, 보호자, 전문간병인 모두 짠해서 항의할 마음이 나질 않는다. ‘꿀잠’에 도움 되는 수면 자세도 어설프게나마 터득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병원에서 자고 나서 출근하는 것도 처음보다는 좀 적응된 느낌이다. 다행이다. 물론 엄마가 거동하는 데 별 문제가 없기 때문에 나도 적응을 보다 쉽게 하는 중일 것이다.

 

얼마 전에 엄마 옆 침대에 계시다 증세가 급격히 악화돼 딸도 못 알아보는 채로 병실을 옮긴 환자처럼 거의 모든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잃은 이를 돌보는 일은 아직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오히려 보호자보다는 그런 환자의 입장에 몇 십 년 후의 나를 대입해 생각해보기가 더 쉽다. 현재 추세로는 새롭게 가족을 이루고 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니까 내가 혼자 살다가 늙고 중병에 든 상황을 생각해보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가족의 간병은 겪지만 가족의 보호를 받지는 못할 가능성에 나는 뭘, 어떻게 대비할 수 있을까?

 

너무 우울한 질문인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병원은 사람을 때론 우울하게, 때론 비겁하게, 또 때로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병원은 사람을 단순하게도 만드는가 보다. 일단 내일 아침 병원식사엔 엄마가 좋아하는 갈치조림이 반찬으로 나오면 반갑겠다 싶은 걸 보니. 뼈는 너무 많지 않은 갈치면 좋겠다. 너무 싱겁지는 않게 나오면 더 좋고.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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