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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기 힘든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

비혼여성의 가족간병 경험을 듣다③ 이혜원


※ 고령화와 비혼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비혼여성들이 부모나 조부모, 형제를 간병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개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다>는 가족을 간병했거나 간병 중에 있는 비혼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공유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드라마에서나 보는 장면인 줄 알았는데…’

 

50세의 비혼(非婚), 그리고 가난한 프리랜서 예술가. 누가 나를 소개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두 줄로 요약되는 ‘나’라는 사람. 20대 초반부터 집을 나와 독립했다가 여의치 않아서 다시 들어가기를 네 차례, 이젠 그냥 안면몰수하고 부모님 집에 얹혀서 살고 있다. 그러나 얹혀살고 있다고 말하기가 무색하게 점점 더해지는 부모라는 무게…. 어머니가 60세가 되던 해 뇌졸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던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가 교대로 병원 신세를 지고 계신다.

 

지금부터 십 몇 년 전의 일이다.

 

그 날은 집에 어머니와 나 둘만 있었다. 나는 거실에 있었는데 갑자기 안방의 문이 덜컥 열리면서 어머니가 푹 쓰러지셨다. “혜원아,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러시면서. 순간 나는 패닉에 빠졌다. 119에 전화해서 비명을 지르듯이 벌벌 떨며 주소를 불러줬다. 손이 덜덜 떨려서 휴대폰을 떨어뜨려가면서 오빠와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응급차가 왔고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새벽에 도착한 응급실은 야전병원 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와본 응급실은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과 보호자들로 북새통이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다니, 충격이었다. 안양에 사는 오빠가 가장 일찍 도착해서 오빠와 같이 이 검사 저 검사하는 곳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밤새 돌아다녔다. 뇌출혈이었다.

 

아침쯤 되니 여행 갔던 아버지와 분당 살던 여동생도 도착했다. 우리 식구들이 모두 원무과로 불려가서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류에 네 번이나 싸인을 했다. 그리고 수술비와 입원비를 낼 수 있는 상태인지, 직업이며 수입이며 조사를 당했다. ‘아, 이래서 돈 없으면 수술도 못 받는다 했구나!’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날이 밝고, 식구들과 병원에 찾아와준 가까운 친척들도 모두 일단은 돌아가고 나만 남았다.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중환자실의 가족대기실 복도에 앉아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멍하니 앉아있는데 모든 게 꿈 속 같았고 현실감이 없이 몽롱했다. ‘이게 지금 나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이 정말 나에게 일어났구나, 엄마는 정말로 돌아가시는 것일까…’

 

그 순간, 공포와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눈물이 복받쳤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사나, 나는…. 엄마 없이 나는 어떻게 산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순간이었다. 돌아가실지도 모를 엄마가 아니라, 엄마 없이 살아갈 내 걱정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오후가 되어 아버지가 오시고, 나는 눈을 붙이러 집으로 향했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욕조 옆 타일바닥에 어머니의 양말이 놓여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에서 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너무 가엾고 가여웠다. 우리 엄마,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는 건가. 가슴이 미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이때 절실하게 경험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애간장이 타 들어가던 일곱 시간여의 수술과 두 달여의 입원 기간이 이어졌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엄마를 면회하던 시간 역시 잊히지 않는 순간이다. 머리는 삭발이 된 채 온몸의 여기저기에 고무호스가 연결되어 있고 의식이 없이 시체처럼 누워있는 엄마. 그 모습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가, 도저히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곧바로 병실을 나와 버렸다. 그리곤 또 오열….

 

이때에 거의 트라우마에 가까운 충격을 받은 듯하다. 안 그래도 싫어했던 병원이 정말 쳐다보기도 싫어졌으니. 지금도 대학병원 응급실, 중환자실, 입원실 모두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된 ‘간병’이라는 노동

 

▶ 엄마가 몸이 안 좋은 후로 본인이 직접 장 봐다가 이것저것 해 드시는 아빠.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래도 엄마를 들들 볶아서 머리 염색은 꼭 집에서 하신다. 원래는 백발인 머리가 까맣다. ⓒ이혜원


어쨌건 두 달간의 입원 기간 동안 간병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내가 결혼을 안 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오빠는 딸 하나를 둔 가장이고, 새 언니는 그 아이를 돌봐야 하고 집도 멀고 몸도 약해서 대중교통으로는 여기까지 오고 가기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고, 여동생도 어린 아이가 둘이고 집도 멀었다. 결국 오빠와 여동생은 종종 병원에 왔다 갔고, 나는 아버지와 교대로 밤새 병실을 지켰다. (그래도 거의 내가 엄마 곁에 있었다.)

 

부모님의 간병에 대한 부담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에게 온 것에 대해, 나는 오빠와 여동생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때로는 서로 곱지 않은 시선과 침묵이 오가긴 하지만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온 건데?’ ‘너만 바쁘냐?’ ‘그럼 돈이라도 더 내든가.’ 따위의 말들은 삼키고 그냥 서로 모른척하고 낮은 목소리로 할 말만 하고 지내는 정도이다.

 

어머니의 머리에는 호치키스 같은 가는 쇠심이 박혀 있었다. 엄마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들도 모두 같은 처지였다. 그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었고, 계속 이어지는 크고 작은 검사들을 받으러 휠체어에 탄 엄마를 모시고 이곳저곳 다니는 것도 많이 힘들었다. 그 넓은 병원을 이리저리 물어가며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원 초에는 소변줄에 연결된 소변통을 계속 갈고 24시간 옆에 붙어서 이런 저런 심부름과 화장실 모시고 가기, 머리 감기기, 몸 씻기기 등등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침 일곱 시에 도는 의사들의 회진을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의사들이 회진을 돌 때 보호자들은 병실 밖 복도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마치 군부대에 시찰 나온 사령관 같았다. 제일 앞에서 온몸으로 엄격함과 권위의 아우라를 내뿜는 신경외과 과장이 거침없이 휘젓고 걸어오고, 그 옆과 뒤에서 일반 의사들과 레지던트들이 뛰듯이 걸으며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아, 맞다. 촌지를 줬던 것도 기억난다. 회진을 돌 때, 과장은 엄마에게 몸 상태에 대해 별 말도 해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곤 했다. 엄마가 뭔가를 물어봐도 듣는 둥 마는 둥 대꾸도 안하고 지나치는데, 뒷주머니에 뭔가를 찔러주면 다르다는 얘기를 주위에서 해주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우리는 뭔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 아버지가 봉투를 레지던트 편으로 과장에게 전달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회진에서는 엄마가 질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엄마 어깨를 툭툭 치며 뭔가 위로의 말 한 마디를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그 위로 한 마디가 150만 원 짜리였다.

 

때때로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건물 밖을 천천히 걷다 보면 응급실에서 들려오는 고함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에 기분이 참 심난했던 기억도 있다.

 

이렇게 두 달이 지나서 엄마는 퇴원을 했다. 하지만 머리 속 혈관이 복잡한 형태로 터지는 바람에 안정이 되면 또 한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후로 또 수술과 입원….

 

‘너 없으면 어떡하니’ 분노와 연민이 교차하는 일상

 

그 후론 이제 아버지의 차례였다. 4~5년 전 새벽에 간질 발작으로 응급실행 이후, 후두암으로 입원과 수술이 이어졌다. 나는 계속 병간호를 전담하다시피 해야 했다. 지금은 어머니가 신장, 심혈관 이상과 그에 따른 부정맥까지 질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서 이제는 입술이 늘 파란색으로 들떠있고 5분도 걷기 힘든 상태이다.

 

이러는 가운데 부모와 나의 관계는 갈수록 애증으로 얽히고설켰다. ‘너하고 같이 사니 좋다’ 라든가 ‘너 없으면 우리끼리 어떻게 살았겠느냐’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나마저 부정맥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다. 나에 대한 부모의 의존의 말과 태도들을 정말 견디기가 힘들다.


내가 고양이를 집에 데려와서 정을 주기 시작하자 두 분은 고양이에 대해 질투 섞인 말들과 태도를 보였는데, 그 역시도 참기 힘들었다. 한편으로는 안됐고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기도 한데, 또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강하게 소리치고 있으니 내 마음은 지진이 났다가 다시 봉합되었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 김치냉장고 안에 있는 각종 건강식품들. 부모님은 건강식품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다.   ⓒ이혜원

 

얼마 전 어머니가 패혈증 증세를 보며 또 응급실에 갔을 때, 놀랍게도 이젠 병원 응급실 정도는 별것이 아니게 느껴졌다. 심지어 부모님이 당장 돌아가신다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침착하게 잘 보내드려야지’ 라고 평소 많이 다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의존적인 모습과 당당하게 ‘이젠 너에게 해 준만큼 받아야겠다’는 태도, 또 어떤 때는 눈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며 한없이 초라해지는 모습을 번갈아 보이는 엄마. 그럴 때마다 분노가 치밀다가 연민에 빠지다가 하는 내 모습에 나 스스로 적응이 안 될 지경이다. 그때마다 ‘의연하자, 의연하자’ 속으로 계속 외친다.

 

내게 의존하는 부모,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은 나

 

이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두 가지 결심을 하게 됐다. 첫째는 병원에서 죽지 않겠다는 것, 둘째는 비혼 여성들과 길냥이들의 주거공동체를 꾸리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마를린 호리스 감독, 1995)을 다시 보게 되었다. 기억 어딘가에 남아서 종종 떠오르곤 하던 영화였다.

 

영화에서 안토니아가 의도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안토니아의 집에는 동네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그 사람들을 모두 품어주던 안토니아와 딸들. 그리고 그 집안에 계속 딸들이 태어나는 설정도 감독의 의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게는 그것이 고대의 모계 공동체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비혼 여성들과 길냥이들의 주거 공동체의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마당을 개방해서 길냥이 들의 급식소를 만들고 실내의 방 하나는 아픈 아이들을 위한 격리 공간으로, 계단이나 옥상 같은 공용 공간에는 길냥이들이 마음껏 뒹굴고 그루밍하고 늘어져 낮잠도 자는 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서 무언가 남기고 떠나야지 하는 다짐. 이 도시에서 발붙일 곳 없이 쫓겨 다니고 피해 다니며 가장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생명들.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외롭고 고독한 생명들. 그들에게 나의 고독과 외로움이 투사된 것일까. 나는 길고양이들이 너무나 가엾고,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 내가 키우는 고양이   ⓒ이혜원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혹은 제도적으로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나에게 참 먼 나라 일처럼 느껴진다. 왠지 나의 영역이 아닌 것 같은…. 그래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뭔가를 바란다면, 의료만이라도 무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누구도 나에게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의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부담과 책임은 견디기 힘들다. 나 역시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다. 그저 태어나서 적당히 살다가 질병이 생기면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갈 때가 되었다 싶으면 적당히 또 가고…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그저 작고 소박하게, 춤추고 즐기며 살고 싶을 뿐이다.

 

십 수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의료비는 이젠 평소에도 관리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집의 규모를 줄여서 지금의 집으로 이사하면서 모아두었던 돈도 거의 바닥이 나고 지금은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그 돈으로 병원비를 댄다고 들었다. 나도 나름대로 힘닿는 대로 약간의 돈을 보태기는 했으나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의존하는 것에는 경제적인 부분도 큰 몫을 차지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기에, 내가 더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내 고양이들 병원비 대는 것만도 벅찬 상황이다. 길고양이들 사료가 배달 오면 엄마 몰래 들여다 놓아야 한다. 사료가 올 때마다 “그 돈 있으면 나나 줘라” 하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어야 하니 말이다.

 

지금의 나에겐 ‘때’-엄마의 불안한 정서와 하나가 되어 정신적 노예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함께 분리 독립하려는-가 오기를 기다리며 그저 참고 견디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가족에게는 답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예전에는 “아” 하면 “어” 하고 맞받아 쳤지만 이젠 그저 침묵한다.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라는 깨달음이 온 후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외엔 없다는 것을. 어떤 일이건 닥치면 헤쳐 나가고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며 사는 것. 이것이 내가 부모를 대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인데 왜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내가 다시 독립을 하게 된다면 여동생 가족(여동생과 조카 둘)이 들어와 살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면 내 마음이 좀 놓일 텐데…. 그런데 조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오빠네와 같이 살게 될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새언니가 시부모와 같이 사는 걸 극도로 싫어하니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 어찌 될는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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