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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 안하고 뭐하고 지내니?’

[나의 알바노동기] 쓸모없는 존재라는 무기력 벗어나기


※<일다>는 청년여성들의 가감없는 아르바이트 현장 경험을 기록합니다. “나의 알바노동기”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돈이 없으면 몸이 고생하는 구나!

 

열다섯 살 무렵 내가 마치 새장에 갇혀 있는 새처럼 느껴졌다. 학교에서 “학생답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고, 숙제도 잘해야 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어야 착한 학생이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무조건 공부만 잘하고 선생님들이 정해준 ‘학생의 모습’대로 살면 나는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잘못한 거니까 맞는 게 당연하고, 성적대로 이동식 수업을 하는 게 당연한 공간인 학교가 점점 싫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를 그만둔 친구들이랑 어울리게 되었는데, 자유롭고 억압 받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도 학교를 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집도 안 들어가게 되면서,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거리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 거리 생활을 하며 돈이 없으면 정말 몸이 고생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찜질방에 갈 돈이 없어서 한겨울에 건물 옥상에서 잠든 적도 있다. 50원이 모자라서 컵라면을 사먹지 못해 뽀그리를 먹는 일들도 있었다. 친구들이랑 같이 살 때는 반찬이나 양념장이 없어 남의 집 항아리에 있는 된장을 훔친 적도 있다. 된장 국물로 밥을 말아 먹었다. 돈이 없어서 겪어야 했던 시련들은 이런 것 말고도 많았다. 갈 곳이 없는 서러움과 배고픔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돈이 없으면 정말 몸이 고생하는 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됐다.

 

불안정한 생활, 지킬 수 없었던 다짐

 

거리생활 6개월 째, 지칠 때로 지쳐 있던 나에게 친구가 ”그렇게 밖에서 고생하지 말고 청소년 쉼터에 가봐~ 거기는 숙식 제공도 해준대”라고 말했다. ‘숙식을 제공’해준다는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1388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안산에 있는 한 쉼터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쉼터에서 생활하면서 당장 숙식은 해결이 되었지만 퇴소 후가 걱정이었다. 내가 있었던 공간은 단기 쉼터라서 최대 있을 수 있는 시간이 3~6개월이었고 그 이후에는 나가야 했다. 퇴소 전에 돈을 모아서 방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지원 받는 동안 돈을 많이 모아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생각대로 돈이 모아지지 않았다. 쉼터에서 지낸다 해도 필요한 물품이나 차비, 속옷, 계절마다 입는 옷값 등은 내가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려서 알바를 할 수 있는 곳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면접을 보러 갈 때마다 업주들이 “어린애들은 개념이 없어서 말도 안하고 그만두거나 지각을 밥 먹듯이 했는데, 너는 안 그럴 수 있니?”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다르게, 쉼터를 나오게 되었을 때나 갑작스러운 상황이 생길 때면 일하는 공간에 미리 말을 못하고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내가 상황을 설명해도, 돌아오는 얘기는 내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당장 그만두면 어쩌냐!” 라는 꾸중이었다. 그런 상황들을 겪으며 나는 늘 떳떳하지 못하고 항상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 갈매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나이를 속이다, 거짓말을 하다

 

카페, 서빙, 공장 등등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면접을 많이 보러 다녔지만 대부분 떨어지고 말았다. 열여섯이라는 나이가 문제가 됐다. 면접 본 후에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나이가 어려서 안 되겠네요”, “경력이 많이 없어서 힘들겠어요” 였다. 나이를 속이고 운 좋게 면접에 합격한 적도 몇 번 있다. 그런데 부모님 동의서를 요구하거나 보건증을 요구했다. 나는 집에서 가족과 지내고 있는 게 아니었고, 또 나이를 속이고 면접을 본 거라서 자료를 제출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빙 알바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아르바이트 조건은 이랬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 10시간! 나이는 17살부터 가능.’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가야 했지만,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당장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이를 속이고 면접을 봤다. 면접에서는 “열 시부터 시작하는데 학교는 그만둔 상태냐”, “아르바이트 경력은 있냐”, “전공은 무엇이냐” 등을 물어봤다. “나이는 몇 살이냐”는 질문에 “열일곱 살이에요”라고 거짓말을 했다.

 

겨우겨우 그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엔 나 말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진짜’ 열일곱 살 언니가 있었다. 나는 나이를 속이고 일을 시작한 거라서 자연스럽게 그 언니한테도 나이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 언니랑 소소한 얘기를 할 때마다 난 거짓말을 해야 했다. 언니는 “너희 학교는 실업계냐 인문계냐”부터 시작해서 내가 모르는 고등학교 얘기를 했다. 그때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둘러대기 바빴다. 학교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학교에 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안한 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친구들 어디 학교 다녀?”라는 그 언니의 질문에 엉겁결에 “OO중학교 다니고 있어요” 라고 말해버렸다. 내 나이를 들키고 만 것이다.

 

나는 지금껏 내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고 해명을 해봤지만, 그 언니는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데 동갑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에 화가 많이 나있었다. 나는 그 언니가 사장님한테 내가 나이가 어리다는 걸 말할까봐 두려워서, 그 날 도망치듯이 나와서 더이상 일을 나가지 않았다.

 

사장님은 내가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급여를 못 준다는 식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일한만큼의 돈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그 언니를 다시 만나기도 부끄러웠고 가게에 가서 따질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그냥 ‘내가 손해 보고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다. 나의 떳떳하지 못했던 알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양심을 팔아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정말 힘들었다.

 

대부업의 늪…삶이 어둡게 느껴지던 나날들


▶ 처음으로 휴가란 걸 내고 다녀온 여행에서 찰칵.


나이뿐 아니라 학력도 일을 구하는 데 항상 큰 걸림돌이었다. 이력서를 쓸 때도 주저하게 되고, 면접에서 ‘왜 학교를 안 나왔냐’고 물어보면 나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나는 이렇다 할 알바 경력도 없는데, 경력이 있는 사람을 뽑는 곳이 많았다.

 

단기 쉼터는 거주 기간도 3~6개월로 정해져 있어서 안정적으로 숙식 지원을 받으며 꾸준히 자격증을 준비하기도 어려웠다. 주거지도, 일자리도 안정적이지 못했던 나는 삶이 불안할 때가 많았다. 그 불안함은 내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에 걸림돌이 됐다. 악순환이었다.

 

쉼터에서 나와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던 스무 살 겨울이었다. 서비스직 일을 해서 돈을 벌면서 하루하루 쫓기듯 살고 있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 언니가 상황이 안 좋다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원래 돈을 잘 안 빌려주는 나였지만, 언니가 걱정되는 마음에 믿고 처음으로 작업대출을 통해서 육백 만원을 빌려서 돈을 빌려주었다. 작업대출은 말 그대로 대출을 받기 어려운 조건의 사람들이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작업’해서 대부업체가 대출을 받게 해주는 것이다. 업자들이 중간에서 50%나 떼어간다. 나도 중간에서 작업해준 오빠들이 삼백 만원을 가져갔다.

 

그 언니는 돈을 갚겠다고 해놓고는 계속 아프다고 핑계를 대다가 급기야 연락이 끊겨버렸다. 거의 1년 동안 꼼짝없이 내가 이자를 내야 했다. 당시 살던 자취방에서 너무 벗어나고 싶었지만, 빚을 다 갚아야만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쪼들리면서도 이자를 꾸준히 냈던 것은, 혹시나 부모님이나 가족들한테 연락이 갈까봐 무서워서였다.

 

이런 저런 서빙을 끊임없이 했지만 원금은커녕 한 달에 12만 원 정도 이자만 내기에도 빠듯했다. 휴대폰 요금이나 방세로 돈이 계속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언제 빚을 다 갚나, 삶이 막막하고 어둡게 느껴졌다. 마음이 힘드니까 일을 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도움을 받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해서 나쁜 생각도 많이 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민 자립팸

 

그렇게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자립팸을 소개 받아 들어오게 되었다. 자립팸에서는 기금으로 대부업체 대출을 미리 갚아주고, 무이자로 천천히 돈을 갚을 수 있게 지원해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자 대신 원금을 갚고 있다. 물론 내가 갚아야만 하는 돈이지만, 독촉을 받지 않고 원금을 갚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주거도 안정되고 빚에 대한 부담감도 조금 사라지고 나니까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지인에게 카페에서 일 해볼 것을 제안 받고 바리스타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알바로 시작했지만 점점 꿈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1년 8개월을 그 공간에서 보냈다. 처음 커피의 매력을 느끼게 된 건 커피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커피는 섬세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맛을 뽑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마치 어린 아이 같아서 살짝만 힘을 주거나 양을 적게 하면 제대로 맛이 나오지 않았다. ‘아, 내가 한 번 다뤄 보고 싶다. 내가 원하는 맛을 뽑아내고 싶다’라는 의욕이 강하게 들었다.

 

▶ 카페에서 1일 바리스타 체험을 하러 왔을 때 에어로프레스 시연하는 내 모습.

 

이 일을 하면서 커피와 관련된 다양한 직업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생두를 감별하는 큐그레이더(Q-Grader), 원두 품질을 감별하는 테이스터인 커퍼(Cupper)라는 직업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오기도 생겼다. 일을 하면 할수록 커피에 대해서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함께 일하는 동기들이 있으니까 같이 성장해나가는 즐거움도 느꼈다. 함께 바리스타 자격증도 준비하고 라떼아트도 배우면서 실력이 늘어가는 걸 서로 알아가는 것도 좋았다. 손님이나 동료들이 내 커피가 맛있다고 말해줄 때 뿌듯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기 때문에 자기만족을 하지는 못했다. 즐겁게 일하면서도 직장에서 은근히 학력 때문에 압박을 많이 받았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장님이 “너는 검정고시 따야 되는 거 알지?”라고 할 때, 혹은 내가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엄청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마다 내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일을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버거웠다. 생활비도 벌고 빚도 갚으려고 하루에 7시간씩 일했다. 그 이외에도 직장에서 함께 커피에 대해 공부한다든가,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검정고시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공부에서 손 뗀 지 너무 오래 돼서 기초를 다지는데 시간도 많이 필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담감이 커졌다. 일한 경력이랑 자격증만 있으면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억울하고 막막하기도 했다.

 

직장에 불만이 생겨도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공간을 그만둬도 다른 곳에 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데 가도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빚 때문에도 쉽게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힘들었지만 엄청 열심히 버텼다. 결국 건강이 안 좋아졌고, 다른 커피 매장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 처음으로 로스팅을 했는데 순서대로 볶은 원두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배우는 맛’에 산다

 

잠시 쉬고 싶어서 일을 그만두었지만, 쉬는데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일을 안 하고 있으니까 스스로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주변에서 ‘요즘 일 안하고 뭐하고 지내냐’고 물을 때 ‘쉬고 있다’고 말하면, 앞으로 계획을 또 물어보니까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몇 달을 쉬고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을 때, 또다시 나를 가로막은 장벽은 학력이었다. 이제는 나름 경력도 있고 자격증도 있지만, 학력이 낮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떳떳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도 괜히 내 자격지심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력부터 취득을 해야 내가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다시 마음을 잡고 새로운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짧게 일을 하면서 검정고시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나면 커피와 관련된 자격증도 따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핸드드립, 바리스타 1급, 유럽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보고 싶고, 라떼아트도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대학에 가서 커피와 관련된 공부도 해보고 싶다.

 

예전에 했던 공장 일이나 서빙 알바는 솔직히 돈을 버는 것 말고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카페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는 살림이 어렵더라도 돈에 기준을 두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더 많이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게 좋다. 재미가 없었던 하루하루에 ‘배우는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칠봉이)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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