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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모지상주의 해체 레시피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아름다움과 평등이라는 난제


※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저자의 지난 칼럼 <다이어트는 내 몸에 대한 혐오일까?>와 <’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 그 미묘한 차이>에 이어 ‘아름다움 3부작’의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기사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며칠 전, 먼 유럽에서 세미나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퀴어 친구들과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우리는 매력적인 한국 남자들에 대해 발칙한 수다를 나눴는데, 친구들은 어디에서 예쁜 게이 남성을 만날 수 있을지를 고심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어느 정도 ‘한국인 남성’으로 정체화하고 있던 나는 순간 작은 충격과 함께 깨달았다. 이들이 나의 정체성을 존중할지언정, ‘고추가 없는 남자’인 나를 잠재적인 데이트 상대에서는 제외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너를 매력적이라고 느끼는지 아닌지가 왜 중요해? 중요한 건 너 자신이잖아.”

 

친구의 위로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모자람’, ‘추함’을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의 차원에서 배려 받고 싶지 않다. 나는 남성으로서 아름답고 싶고, 매력적이고 싶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욕망인가?

 

▶ 토론토의 퀴어 퍼레이드에서 포착된 매력적인 게이 남성들. 나처럼 왜소한 사람이 유럽인 남성 동성애자 친구들 눈에 그다지 매력적인 데이트 상대로 여겨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을지도?

 

외모 기득권의 발견

 

누구든 일반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지는 외형적 특성을 한두 가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상당수가 비(非)백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키가 아주 작을 수도 있고, 얼굴이 못 생겼을 수도 있다. 이런 특성들은 삶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편을 준다. 추하다고 여겨지는 외모 특성을 가진 사람이 통계적으로 일터에서 더 낮은 임금을 받는다거나, 법정에서 더 높은 형량을 적용 받는 등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는 근거가 된다는 연구를 종종 접한다.

 

그런데 여성이나 성소수자라는 정체성 때문에 받는 불평등의 경우와 다르게, 외모의 위계에 문제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차별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외모에 대한 호불호는 구조적인 문제보다는 어쩔 수 없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취업 면접 등에서 외모로 지원자들을 차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할 지라도,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미(美)가 왜 정치적이지 않다는 말인가? 매력적인 외모는 전통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특권층을 선망하는 시선을 반영하고 재생산해왔다. 예컨대 많은 사회에서 하얀 피부가 미의 조건이었는데, 유력한 가설에 의하면 하얀 피부가 야외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던 상류층 신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때로는 높은 신분을, 부를, 건강을, 가임 능력을, 혹은 어떤 가부장적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들을 매혹시켜왔다.

 

반대로 주류 사회가 배제하고자 하는 가치는 종종 추함, 그러니까 미적 열등함과 연결되곤 한다. 한 예로,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인터넷에서 여성혐오 표현에 대해 항의를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접하는 공격적인 표현 중 하나는 ‘쿵쾅쿵쾅’인데, 이것은 상대방이 ‘뛰면 쿵쾅쿵쾅 소리가 날 정도로 뚱뚱한 여자일 것’이라는 의미의 혐오발언이다. 주장의 타당함을 반박하는 대신에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을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은, 유치하지만 간편하고 직관적으로 상대방을 소외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외모지상주의의 정의를 외모에 기반한 차별뿐 아니라 “특정한 몸-이미지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기준으로 다른 이미지에 위계를 부여하는 메커니즘”으로까지 넓혀보자.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으로 보는 시선이 문제적이며, 불공정한 가치판단의 메커니즘을 비(非)정치화하는 사고라는 인식의 전환을 시도해보자. 그리고 당연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자.

 

과감히 말하자면 아름다움이란 종종 공공선보다는 기득권에 봉사하는 가치였던 것이다. 아름다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이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장애인이나 유색인종, 노인 혹은 빈자(貧者)의 외모 특성을 미적으로 열등하다고 인식하는 사회에 진정한 평등이 존재할 수 있는가?

 

▶ 여성들이 자기 몸에 대해 갖는 부정적 이미지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임브레이스>(Embrace) 무비 트레일러. (타린 브럼핏 감독, 오스트레일리아. 2016)


외모지상주의 공모자들을 위한 변론

 

외모지상주의와 정말 잘 싸우려면, 외모지상주의와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야 한다. 이들은 외모지상주의의 논리와 모순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어떤 성급한 페미니즘이 종종 잊어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그들은 바로 예뻐지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거나,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불편한 스타일링을 고수하거나,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너무 자주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늘어나고 다양화되는 성형기술이나 나날이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발전하는 다이어트 팁이 종종 그 자체로 여성혐오의 결정체인 것처럼 비판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번창하는 기업형 성형 병원들과 다이어트 열풍,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의 관련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면에 자신의 외모를 절실히 바꾸고 싶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솔직한 감상을 말하라면, 살찌거나 못생긴 것이 싫어서 외모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외면의 아름다움에만 치중한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개개인이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논리에서 자유롭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노력은 정말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몇 달 전 SNS 공간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테니스 스커트 등 ‘남성에게 도전하지 않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성’을 표방하는 패션의 유행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그 다음에는 자연스레 이러한 패션을 즐기는 사람들의 반발이 따라왔다. 취향의 형성이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옷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외모지상주의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집단에게 외모 기득권에 저항할 의무가 더욱 강하게 부여되는 점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지난 5월과 6월, 일다에 <다이어트는 내 몸에 대한 혐오일까?>와 <’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 그 미묘한 차이>를 이어서 게재한 이후, 나는 많은 여성 및 성소수자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모 관리를 하면서 혹은 아름다운 외모를 원하는 데에서 죄책감을 느낀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를 들면 비정규직 노동자가 생계를 위해 불안정한 직장을 선택해 노동하면서도 변함없이 고용 안정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외모 자본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 더군다나 구조의 모순에 책임을 질 수 없는 개개인이 구조와 타협하는 행위가 외모지상주의를 심화시킨다는 것은 지나친 누명이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외모 가꾸기’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피로감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동시에 페미니즘이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 온 사실 중 하나는 똑같은 여성집단 안에서도 다양한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필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남성중심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외모의 위계 구조에서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할 필요를 느끼거나, 외모라는 자본을 생업에 활용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점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의 차이도 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럴 때 느끼는 자기모순의 감각은 오히려 불평등을 인식하는, 깨어 있는 의식의 결과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름답고자 하는 욕망 앞에 당당한 사람들만 페미니스트일 수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외모지상주의 너머의 외모지상주의

 

어떤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구조 바깥에서의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외모지상주의는 너무 일상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어서, 내가 외모지상주의를 요리하기 위해 손에 들었던 무기조차 실은 외모지상주의의 도구였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상황들이다.

 

1. 한국 남성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들의 외모며 성기 크기를 비웃는 것은 간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지만, 이 방법이 효율적인 이유는 이미 외모지상주의가 만들어 놓은 위계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2.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남성들은 전부 못 생겼고 여성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는 감상도 다수 존재한다. 이는 여성들이 외모를 관리하라는 압력을 부당하게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가시화하기 위한 의도이기는 하지만, 아름답지 않거나 외모 관리를 하지 않는 여성을 여성연대로부터 자연스레 소외시키고 있기도 하다.

 

3.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의 약진은 미디어에서 보다 다양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날씬함이라는 아름다움은 갖추고 있지는 못해도 다른 의미에서 미적 월등함을 자랑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경향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 아름다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화보. 명화를 연상시키는 구도를 차용한 작가의 의도가 흥미롭다.

 

4. 요즘의 외모 관리 트렌드는 ‘건강한 몸’의 이미지를 추구하는데, 여기서 건강한 몸이란 사실 날씬함에 여성적 또는 남성적 매력까지 빠짐없이 갖출 것을 전제하다는 점에서 무척 교활하다. 게다가 이 모든 아름다움을 획득하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까지 바람직한 것이었어야 한다고 강요하기까지 하니, 사실은 ‘하나도 건강하지 않은 건강한 몸’이다. 예쁜 얼굴을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성형을 하니, 이번엔 성형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렇게 외모지상주의는 항상 교묘하게 사람들의 외모에 위계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여전히 아름다움(beauty)과 미덕(virtue)이 유의어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은 잔인하고도 다정한 동반자이며 이를 추구하며 경외심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적 기준이 지금보다 한 발 더 늦은 사회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다움은 꽤나 보수적인 가치이다. 전통적인 미감은 상당 부분 신체 정상성, 성별 이분법, 그리고 가부장적 성역할 기대 등 우리가 물리치고자 하는 사회의 관습적인 부분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젠더와 가부장제를 해체하고자 한다면, 아름다움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동반자라는 사실을 의식해보는 것이 좋겠다.

 

여기까지가 외모지상주의를 자르고 썰어 본 서툰 요리사의 실험적인 기록이다. 여러분의 이해는 얼마나 다를지? 모두 자신만의 외모지상주의 해체 레시피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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