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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비혼/페미니스트 하우스’를 만들며

그곳들은 왜 나의 집이 될 수 없었나 



집은 삶이다. 단순히 몸 하나 누이며 하루를 때우는 곳이 아닌 나의 사생활을 결정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제대로 된 집에서 살지 못하고 있다. 간섭이 따르는 부모의 집, 잠만 겨우 자는 고시원, 맞지 않는 이들과 부대끼는 기숙사…. 집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적절한 공간이어야 한다. 단순하게 말해, 집은 맘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나와 공유하는 것이 없는 이들과 한 집에서 지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가족과 20여 년을 살아왔고, 연인과 동거했고, 청년 주거공동체를 거쳐 다시 가족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채 한 달이 안 되어 뛰쳐나왔고, 지금은 한 쉼터에 살고 있다. 이제 나는 ‘나의 집’을 만들어 가려 한다.

 

▶ 집의 의미는 무엇일까. 청년주거협동조합 <모두들> 조합원 교육   ⓒ그링

 

첫 번째 집: 담배 냄새와 폭언에 찌든 부모의 집

 

어린 시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늘 어딘가 불편했고 이상했다. 매일 아빠 비위를 맞춰주느라 바쁜 엄마, 애교로 살살 넘어가는 동생 사이에서 나는 분위기도 맞출 줄 모르는 유별난 아이였다. 나만 없다면 우리 가족은 평화롭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웃고 있는 가족사진 속에서 날 오려내고 싶었다.

 

‘본가’는 담배 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아빠는 툭하면 집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웠다. 일하고 들어오는 새벽엔 엄마를 깨워 “밥 줘”라고 말했다. 어떤 날은 화가 잔뜩 나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방 안에 있던 나와 동생은 서로를 꼭 붙들고 있었다. 엄마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나는 엄마가 맞지 않을까 걱정하며 숨죽여 울었다. 어쩌다 덜덜 떨며 그만 좀 하라고 아빠에게 맞서면, 엄마가 먼저 나를 뜯어말리곤 했다.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했다. 자식 교육 한 번 신경 쓰지 않았던 아빠는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켰냐’며 고함을 쳤다. 상황은 더 나빠졌고, 나는 가족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 집에 있으면서 끔찍했던 날들 중 하나는 명절이었다. 남자 친척들은 멋대로 집안에서 담배를 피웠고 여자들을 부렸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앉아서 과일을 집어먹으며 떠들고, 어린 아이들의 재롱을 보거나 무릎에 앉히고 용돈을 쥐어주는 것이었다. 그 꼴을 보기 싫어서 화를 내면, 친척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거나 엄마에게 끌려 나갔다. 도대체 누굴 위한 집인지, 나는 여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내 팔이나 어깨를 자주 만졌다. 내가 불쾌해 해도 ‘예뻐서 좀 쓰다듬은 걸로 유난’이라는 식으로 웃으며 넘어갔다. 부모도 그런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이야기하는 나를 나무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천만 번 찌르고 짓밟고 나서 집 밖으로 내던졌다.

 

그래봤자 명절은 자꾸만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빠는 예전의 폭력적인 일들을 잊은 척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혼은 나에게 한참 밑지는 거래일뿐이었다.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은 만나지 않을 거라고,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매 순간 다짐했다. 그게 십대 초반이었다.

 

두 번째 집: 탈가정 후 남자친구와 동거한 집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친구들은 다른 학교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첫날부터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바람에 친구들을 만날 틈이 없었다. 그나마 날 지탱해주었던 친구들과의 시간들을 한순간에 빼앗겼다. 한동안 방황했고, 날마다 울었다. 시간이 지나고 반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나아졌지만, 하루 종일 학교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3, 학원을 핑계로 야자를 빠지던 나는 대놓고 ‘야자 불참’을 선언했다.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못 박았지만, 사람들은 내 앞날을 끊임없이 걱정했다. 나는 그들의 압박을 물리치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다 한 청소년 인권단체를 만나게 되었다. 이끌리듯 가입하고 바로 첫 모임에 나갔다. 그곳은 나에게 신세계였다.

 

처음으로 인권에 대해 배우고, 페미니즘을 접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나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했을 뿐인데, 잘못된 것에 맞추어 돌아가는 세상에선 내가 튀어나온 못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용기와 위안을 얻었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배웠다.

 

그럴수록 집안에서 느끼는 괴리감은 커져만 갔다. 부모는 나의 인권 활동을 못마땅해 하며, 내가 꺼내오는 이슈들을 외면하려 했다. 이곳에서 나는 혼자였다. 탈출에 대한 욕구가 나날이 커져가던 어느 날,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청소년 인권활동가였고, 내가 채식한다는 말에 나에게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활동하고 집회에 다니며 친밀해졌다. 그러던 그가 탈가정을 했고, 나에게 ‘혼자 잠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아빠와 엄마의 관계를 떠올리며 동거를 극구 거절했지만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친구와 산다’고 거짓말하고 부모의 집을 나왔다.

 

처음엔 좋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도 잠들 때도, 그가 옆에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알바와 활동으로 바빴고, 가사에 소홀해졌다. 심지어는 집을 비우는 일도 잦아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혼자 잠들고 있는 건 나였다. 알바에 치이고 가사에 치이며 나의 활동은 사라져갔다. 문득, 내가 엄마처럼 살고 있다고 느꼈다.

 

매일 같이 싸우던 우리는 경제적인 이유로 동거를 끝냈다. 나는 혼자 지내시던 친할머니 댁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몇 개월 못 가서 할머니의 간섭에 못 살겠다고 SNS에 호소했다. 우연히 이름만 알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두들>이라는 청년주거협동조합을 만들고 있는데, 집에 한 자리가 남았으니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협동조합도, 사람들도 낯설었지만 직접 만나보니 느낌이 좋았다. 나는 또 다시 덜컥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 청년주거협동조합 <모두들> 여름 엠티에서  ⓒ그링

 

세 번째 집: <모두들> 청년주거협동조합의 두더지하우스

 

좋은 사람들과 산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비거니즘(veganism, 동물을 이용한 제품 및 서비스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나를 특별히 ‘배려’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려’ 받은 만큼 내가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꼭 고기와 생선을 집에서 먹어야만 하겠다는 주장도 나왔다. 모든 건 내가 한 발짝 양보하기만 하면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당시 n년차 베지테리언이었다. 내가 반(反)육식을 실천하게 된 계기는 한 TV 다큐멘터리였다. 전에도 ‘이 고기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애써 지나치곤 했다. ‘채식’이란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실천할 용기가 없었다. 다큐멘터리는 내가 외면하던 진실을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사육되는 동물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살아가는지, 어떻게 죽임 당하는지, 왜 골든리트리버(개)를 먹는 것은 역겹지만 소·돼지를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지….

 

저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간은 그들을 기계 부품처럼 이용하고 버렸다. 진실을 보고 난 뒤엔 더 미룰 수 없었다. 인간 사회의 소수자들이 억압 받듯이, 동물들도 인간 사회 밑바닥에서 억압 받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와 친구들처럼 감정을 가졌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어미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 자유 의지로 살 권리, 자신의 명대로 살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내가 그들을 이용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나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두들>은 문턱이 낮은 집을 지향하는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왜 고기를 안 먹어?”, “고기 안 먹으면 뭘 먹고 살아?”, “단백질은 어떻게 해?”, “다른 사람이 고기 먹는 건 어떻게 생각해?”, “고기 먹지 말라고 하면 그것도 강요 아니야?”, “공장식 축산이 아니면 괜찮겠네?”, “그래도 난 고기 못 끊겠더라.” 나는 화가 날 때도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내가 설명하지 못하거나, 설명을 거부하거나, 감정이 폭발하면 사람들은 내가 비이성적인 주장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였다. 그들은 나를 위해 고기를 뺀 음식을 한 쪽에 차리고, 반대편에 다른 이들을 위해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차렸다. 나는 유대감을 느껴야 할 그 자리에서 혼자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가 먹지 못할까봐 걱정한 적이 없다. 다만 우리가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듯, 여/성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듯, 동물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단지 오이의 식감을 싫어하거나 버섯의 향을 싫어하는 것 같은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통감하길 원했다.

 

한번은 달걀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모두들>은 각 집의 구성원끼리 생활비를 모으고 공동으로 생활재를 구입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활비를 어떻게 쓸 것인지 논의하곤 했다. 달걀을 먹지 않던 나는 굳이 달걀을 사야 한다면 공장식 축산보다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삶을 보장하는 생협을 이용하자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생협 제품이 비싸기 때문에 꺼려진다고 했다. 착취당하는 동물들 삶의 무게보다 당장의 몇 푼을 더 무겁게 만드는 상황이 답답했다. 이런 논쟁은 집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변주되어 반복됐다. 그때마다 설명하고 설득하느라 지쳐버린 나는 결국 이곳을 나오게 되었다.

 

비건, 비혼, 페미니스트…우리 집이 필요해

 

하지만 <모두들>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비거니즘에 대한 이해도 조금씩 자리 잡고 있고, 나 외에도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 타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를 지지해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링

 

타인과 살며 이런저런 힘든 일들을 겪었지만, 나는 여전히 공동체가 필요했다. 애인과 헤어지고 제대로 된 생활을 못할 때 나를 붙잡아준 것도 공동체였다. 인간관계에는 늘 상처가 따르지만 기쁨과 위로가 되는 것 또한 타인이었다. 안 그래도 소외 받는 사회에서 돌아와 또 다시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다. 함께 부조리에 분노하고 서로 지지해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 마음이 쉴 수 있는 집에 살고 싶다.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아무리 비슷한 사람들끼리라고 해도 크고 작은 갈등은 생기기 마련이니까. 편한 마음으로 요리하고, 먹고, 배우고, 취미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가끔은 한 곳에 누워 영화를 보고, 가끔은 각자의 방 안에서 뒹굴며 글을 쓰고 SNS를 들여다보는 삶을 살고 싶다.

 

‘비건비혼페미 하우스’(가칭)는 지금까지의 <모두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나려 한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우리에겐 같은 지향, 최소한의 합의가 전제된 관계가 필요하다. 나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공간, 비슷한 경험과 감각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언어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 <모두들>에서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발전하고 싶다.

 

6월부터 10월까지 경기도 부천에서 비건비혼페미(비비페) 하우스를 만드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입주 신청자들끼리 만나 서로 소개하고, <모두들>이 어떤 조합인지 알아가고, 우리의 집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며 집을 구하는 과정을 함께하고자 한다. <모두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비비페 하우스 준비모임 참여자 모집 글을 올렸다.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함께하고자 하는 분들은 이곳으로 찾아와주길 바란다. 그동안 묻어놓았던 꿈들을 풀어놓고, 차곡차곡 현실로 쌓아 가면 어떨까.  *그링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모두들 페이스북 https://facebook.com/modoodeul

※ 비비페 하우스 준비모임 참여 신청 http://bit.ly/비비페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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