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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만지는 노동, 농사일의 기쁨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농사 일기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2016년 5월말 양파 수확

 

매일매일 풍성한 야채들이 상에 올라온다. 적상치, 상치, 쑥갓, 적겨자, 비타민, 딜, 오크라, 케일, 치커리, 청경채, 딸기, 오이, 양파… 아침에 밭에서 막 뜯어 온, 먹기 아까울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채소들.

 

땅이 박해서 제대로 못자란 비타민을 다른 쪽에 뿌렸더니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비타민과 같이 뿌린 양상추는 이제 속아줄 때가 되었고, 양파는 하나씩 뽑아 먹는데 그 향이 일품이다. 달콤 매콤한 싱그러운 맛. 그 작고 여린 몸으로 겨울을 나고, 희고 둥근 뿌리가 점점 커지다가 흙 위로 둥실 드러나면서 잎은 쓰러진다. 이제 양파를 수확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 밭에서 캔 양파  ⓒ김혜련

 

양파껍질을 벗기면서 이 둥글고 흰 생명의 생리가 문득 신기하기만 하다. 노래인지 시인지 모를 것이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작년 겨울 동짓달에 심은 양파.

겨울 내내 없는 듯 죽은 듯 침묵하더니

봄날이 오자 살아있는 기척을 냈다.

 

별스레 추웠던 지난겨울, 백리향도 죽고, 치자도 죽었다. 

그런데 쪽파보다 가는 몸, 누렇게 떠버린 그 얼굴 그대로 살아났다!

한겨울 나무들이 촘촘한 나무테 만들듯, 흰 속살 켜켜로 시린 나이테 만들어냈다.

 

한 입 베어 물면 ‘아삭’ 하는 싱그러운 소리로

맵고 단 겨울과 봄이 씹힌다, 통째로.

 

-2010년 5월 풀 뽑기

 

아침 일찍 밭에서 풀을 뽑는다. 엊그제 계속 온 비로 거의 빛의 속도로 올라오는 풀들과 씨름한다. 수백수천개의 씨가 소복이 떨어져, 그 자리에서 그대로 올라오는 싹들! 땅이 옷 올라 온 몸 근질이며 토해내는 듯한, 턱없이 작고 재재재한 것들을 한꺼번에 호미로 죽~긁어낸다. 실보다 더 가는, 무수한 흰 뿌리가 햇빛에 몸을 드러내며 눕는다. 비릿한 살 냄새. 수백, 수천의 생명이 한꺼번에 땅에서 뽑혀 나간다.

 

다 자라 질겨진 풀들은 제법 싸울만한 대상이다. 잘 뽑히지도 않고 힘도 엄청 든다. 그러니 정당한 적수 같다. 그런데, 그냥 세숫대야로 씨앗을 화악~쏟아 부은 듯한, 숱한 어린 풀들을 한 번에 훑어 낸 날은 온 몸에 두드러기가 일 것 같다. 비릿한 살 냄새가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듯 께름칙한 마음을 지우기 힘들다. 그래서 한 번의 호미질로 긁어낼 수 있는, 조그만 풀들은 그냥 두기로 한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 농사는 생각처럼 단순하고 평화로운 일만은 아니다.

 

▶ 밭 농사.  ⓒ김혜련

 

-2012년 6월 감자 캐기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감자 몇 뿌리를 캔다. 땅속에서 하얀 살을 서로 맞대고 있던 둥글둥글한 몸들이 밝은 세상으로 나온다. 갓 땅 속에서 나온, 속이 말갛게 보일 듯한 감자를 끓는 물에 찐다. 하얀 분이 파사삭 나오는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어 가며 먹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문득 비오는 날 감자를 캐, 쪄먹는 이 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처럼 느껴진다. 감자는 비를 맞아가며 캘 때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비를 맞아 촉촉해진 땅 속에서 희고 둥근 알 감자들이 우르르 드러날 때, 그것을 만지는 손의 촉감과 경탄 어린 눈길, 그리고 그 풍경의 근원이 되어주는 안개 드리운 들과 산, 하늘… 이 모두가 어우러진 한 순간, 감자 캐는 노동은 예술의 차원으로 훌쩍 올라가 버린다.

 

-2014년 6월~7월 나누는 기쁨

 

“그거 좀 팔면 안 될까요?”

칠불암 갔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밭을 구경하다가 허물없이 말한다.

내가 웃으며 대답한다.

“돈 받고 팔기에는 너무 귀하고요. 그냥 선물로 드릴 수는 있어요.”

채소를 한 아름 안고, 입이 귀에 걸린 중년 남자가 하는 말

“뭔가 어려운 말 같기도 하고, 심오한 말 같기도 하고… 좌우간 감사합니다!”

 

저녁 산책을 하면서 밭의 야채들을 이웃들에게 전한다. 공사 중인 이웃과 비구니 스님들이 살고 있는 절, 동네 할머니, 연꽃 그리는 화가, 아라키 카레집… 넘치게 나오는 채소들을 나눈다.

 

“이거 택배비나 나옵니까?”

 

언제나 내 택배를 접수하는 불국 우체국 접수원의 말이다. 몇 년 째 보내고 있으니 내가 뭘 보내는 지 대충 훤하다. 상추, 쑥갓, 케일, 근대, 아욱, 감자와 당근, 양파, 마늘, 오이, 토마토, 호박, 옥수수, 고추, 가지, 못난이 사과, 배추, 무 등등. 계절 따라 포장해 친지들에게 보낸다. 그래, 돈으로 치면 택배비도 안 나올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무엇인가를 보내고 있다. 내가 창조하진 않았지만, 또 아주 창조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창조물, 싱그러운 생명을 보낸다. 이 생명들을 보고 먹는 기쁨을 혼자 지니기엔 벅차다. 그래서 택배비도 안 나올(?) 작물들을 오늘도 또 보낸다. 그리고 괜히 뿌듯해한다.

 

농사는 내가 홀로 ‘짓는’ 일이 아니다. 자연이 주는 순수 증여를 옆에서 조금 ‘거드는’ 것일 뿐… 내가 받은 풍성한 선물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즐거움이라니!

 

▶ 건강하게 키운 작물이 밥상 위에 올랐다.  ⓒ김혜련

 

-2015년 7월 밭 매기

 

밭의 무성한 풀들을 뽑는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 고구마 순들 다 걷어 올리고, 여기저기 무성히 자란 풀들 뽑고, 콩 밭의 잡초와 병든 콩들을 제거하고, 땅콩 밭에 무성한 풀들 또한 뽑아냈다. 비를 맞은 풀뿌리들이 흙을 잔뜩 머금고 있어 무겁다.

 

참 이상도 하지, 풀을 뽑다보면, 땅을 만지다 보면 나는 사라진다. 그저 내가 땅이 되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여름 저녁 밭을 매다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남산의 풍경은 문득 낯설다. 이 낯설음은 내 존재가 새롭게 보이는 느낌이다. ‘아, 내가 지금 여기 이 땅에 속해있구나.’ 하는 안도감. 아주 오랜 동안 갖지 못했던 낯선 안도감이다.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지리산을 내려올 때, 내 안에서 들렸던 소리 중 하나가 “지구에 폐나 끼치지 말고 살아”였다. 그 소리를 잊지 않았던 나는 내 먹을 것은 내가 지어먹을 수 있기를 바랐다. 자급자족하는 삶. 이 시대에 자급자족이라니! 턱도 없는 이상이지만, 그 한 실천으로 집 뒤에 이백 몇 십 평 되는 땅을 구했다.

 

비닐 멀칭이나 농약은 물론 화학 비료를 주지 않고 작물을 길렀다. 땅을 망가뜨리거나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타 생명을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행복하게 산 생명을 먹는 일이고, 그 생명을 행복하게 기르는 일이기도 하다. 땅을 숨 쉬기 힘들게 하는 비닐 덮개 없이, 농약과 비료도 안 먹고 자란 작물들은 행복한 생명들이다. 내가 그 생명들을 건강하게 기르고, 행복하게 자란 생명을 먹는 일은 즐겁다.

 

▶ 당근 수확  ⓒ김혜련

 

철 따라 먹을거리들을 심다보면 한 해에 사십 여 가지를 심게 된다. 씨앗을 뿌리기도 하고 모종을 심기도 한다. 이백 평이 넘는 땅은 사실 혼자 농사짓기에는 벅찬 땅이기도 하다. 첫 해에는 옆집 아저씨가 작은 경운기로 밭을 갈아 주었다. 그 다음 해부터는 M이 삽 하나로 큰 밭을 다 갈고 이랑을 만든다. 그러면 난 씨를 뿌리고, 김도 매고, 수확을 한다.

 

땅을 만지는 일에는 이상한 희열이 있다. 그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기쁨이 자연에서 온다는 것을 알뿐이다. 촉촉한 비를 맞으며, 또는 산들바람,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땅에 엎드려 있을 때, 기쁜 줄도 모르게 기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호미질을 하다가 문득 바라보는 산과 하늘은 낯설다. 그 낯섦은 내가 지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깊은 안도, 감사 같은 것이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돌보고 수확하는 일은 그 노동이 아무리 힘들어도 피곤하지가 않다. 피곤한 게 아니라 고단할 뿐이다. 지쳐서 툇마루에 쓰러져 누워서도 비시시 웃음이 나오는 이상한 충만감이 있다. 내 몸도 자연이고, 땅과 풀, 채소, 곡식들도 자연이다. 하늘도 바람도, 비나 햇살도 다 자연이다. 자연인 내가 자연에 속해 일하는 것, 내가 농사일에서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은밀하고 깊은 기쁨일 게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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