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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몸은 무기다?

<홍승희의 치마 속 페미니즘> 섹슈얼리티와 권력 1.



※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 홍승희 씨의 섹슈얼리티 기록, “치마 속 페미니즘”이 연재됩니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애교는 나의 힘?

 

들을 때마다 징그러운 말이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성이고, 그 남성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이다.” 남성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여성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최고 권력자라는 뜻이다. 남성의 권력은 그 스스로의 힘이고, 여성의 권력은 남성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느냐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쁜 여자는 고시 패스한 격”이라는 농담 같은 진담도 있다. 남자들은 사회에서 성공하고 인정받으려면 엄청 노력해야 하는 반면, 여자는 타고난 ‘몸’이라는 자원 덕분에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인식에서 ‘여자’라는 기호는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존재가 아니라, 선천적인 권력을 가진 강자로 표현된다. “페미니즘은 무슨. 여자들이 무슨 차별을 받아? 여자가 제일 살기 편해!”라고 말하는 남자들의 심리에는 ‘나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자기 몸만 믿고 무임승차’하는 여자를 경멸하는 기이한 정의감이 들어있다.

 

나도 나의 섹슈얼리티가 ‘권력’이라고 생각해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존’을 위해 여성의 역할을 체득했으니까. 나의 첫 여자 역할은 애교 많은 막내딸이었다.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아빠의 화를 풀어주는 귀염둥이였다. 아빠가 화나 있을 때면 혀 짧은 발음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귀여운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 그의 힘과 대등하게 맞서서 “아빠, 나한테 욕하지 마세요” 라고 정중하게 말하거나 “아빠!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내가 동네 북이야?” 라고 도발하면 집기가 날아오거나 욕설이 더 심해졌다. 그보다 ‘나는 당신의 싸움 상대가 아니에요. 당신이 보호해주어야 하는 여린 존재랍니다’라는 걸 표현하는 애교가 손쉽고 효과적이었다.

 

아빠의 화가 풀어지지 않아서 언니나 엄마에게 더 큰 폭력이 미치지 않도록, 나는 필사적으로 눈치를 보면서 애교를 부렸다. 어린 내가 아빠의 화를 풀어주었다는 효능감은 내게 특별한 힘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애교와 누군가 지켜줘야 하는 연약한 여성성은 나의 무기였다.

 

애교 작전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애교는 막강해보이지만 사실 너무도 허약한 무기였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나는 도망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무력해지는 내가 싫었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남자였다면 저렇게 함부로 했을까’ 생각했다. 주먹을 꽉 쥐고 ‘나는 나중에 힘 센 남자랑 결혼할 거야’ 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생각 같지만, 당시의 나는 진지했다. 그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외모를 꾸미는 일이었다. ‘예쁜 여자’를 대하는 텔레비전 속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장면은 그런 나의 다짐에 힘을 실어줬다.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여성의 능력이자 권력처럼 느꼈다.

 

# 섹시하되 순결해야 한다

 

▶ 검은색 긴 생머리, 뽀얀 피부, 커다란 눈망울, 붉고 촉촉한 입술.  ⓒ출처: pitu 앱을 이용해 만든 이미지


중학교 시절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권력처럼 작동됐다. “저 언니는 대빽이 있대”, “건드리면 큰일 나겠네. 저 언니 조심해야겠다.” 친구들과 나는 수군거렸다. 대빽은 말 그대로 큰빽이라는 뜻이다. 힘 센 고등학생 남자선배에게 몸을 ‘대주고’ 대신 모두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걸레”라고 수군거렸지만, 대놓고 멸시하진 못했다. 여자의 권력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얼마나 힘이 센 남자친구가 있는가, 혹은 얼마나 힘이 센 남자의 여자친구와 가까운가’였다. 이미 그 시절에도 남자의 권력은 자신의 물리적 힘이지만 여자의 권력은 남자를 통한 권력, 곧 섹슈얼리티와 연결되었다.

 

중학교 때 또래 남자애들은 대부분 성적 호기심 때문에 여자를 만났다. 그런 남자애들에게 여자는 그저 ‘따먹는’ 대상이었다. (어른남자도 그런 태도가 허다하지만.) 15살 때의 첫 경험, 아니 첫 강간 이후 그 사실을 감각으로 알게 된 나는 모든 남자가 징그럽고 싫었다. 누군가 연락해오면 ‘나랑 자고 싶은 건가?’ 의심했다. 의심이 아니라 현실이었지만.

 

이성친구와의 로맨틱한 순정만화 같은 판타지는 식어버렸다. 그보다는 권력에 관심이 갔다.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권력, ‘쟤 누구랑 잤대, 저 여자애 누구한테 따먹혔대!’ 하는 뒷말이 감히 돌지 않을 만큼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힘 센 남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전남친의 성폭력과 모르는 남자들의 성추행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또 다른 ‘남자친구’를 찾은 것이다. 영화 속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정에서 도망가 자신을 지켜줄 또 다른 가부장을 찾게 되는 것처럼.

 

그 시기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남자애를 알게 되었고, 연락을 주고받다가 사귀게 되었다. 가끔 만나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었던 게 전부다. 어느 날 그에게 다급히 연락이 왔다. “너, 그 선배랑 잤어?” 남자애는 나에게 화가 난 듯, 혹은 속았다는 듯 물어보면서 그의 연락처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의 순결을 뺏어간 그를 혼쭐 낼 작정인 것처럼. 그 후로 그와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여자친구’로서 권력을 유지하려면 순결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예상대로 그와 만난 후에는 나에게 추근덕 대는 남자애들이 없었다. 나는 무사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후에도 나는 힘이 있는 남자, 남성사회에서 인정받는 남성에게 끌렸다. 그의 권력이 곧 나의 권력이었으니까. “외모는 안 봐요. 나는 나이 많고 리더십 있고 남자다운 사람이 좋아요!” 내가 말했던 이상형이다.

 

중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어떤 선생님은 너희도 세상물정을 알아야 한다며 ‘여자의 인생’에 대해 말을 꺼냈다. “여자 인생 뒤웅박 팔자야. 좋은 남자 잘 만나면 인생은 그냥 피더라고.” 별로 새롭지 않은 말이다. 엄마와 친척들, 미디어에서 누누이 듣고, 간접적으로 이미 경험한 사실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여성이 어떻게 세상에서 유통되는지 알고 있었고, 여자로 태어난 우리가 ‘잘’ 살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규범을 입어야 하는지 눈치 챈지 오래였다.

 

선생님은 조언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남자를 많이 만나봐야 해. 공부만 하지 말고 남자애들도 만나봐. 그래야 어떤 남자가 괜찮은지 알아. 그런데 헤프게 몸을 주지는 마. 경험이 많은 남자들은 첫날밤에 한번 삽입해보면 그 여자가 처음인지 아닌지 안다고 하더라.” 선생님의 말은 결혼하기 전까지 섹스하지 말라는 협박처럼 들렸다.

 

‘순결을 잃은’ 나는 끝난 건가. 선생님의 말을 듣고 친구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혼자 고민이 깊어졌다. ‘어쩌지, 나는 벌써 순결을 잃었는데…’ 섹슈얼리티 권력은 조건적이었다. 섹시하되 순결해야했다. 스무 살 때 만난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고, 나는 “처음”이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그가 나에게 실망할까봐 그랬을까.

 

# 넌 돈 많은 남자 만나면 되니까 좋겠다

 

청소년기 때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정글 같은 힘과 연결되었다면, 성인이 되면서는 사회경제적 권력과 연결됐다.

 

열아홉 살 때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시급 3000원 이하로 일했던 패스트푸드점과 달리, 그곳은 시급이 7000원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살이 드러나는 유카타를 입고 서빙을 하거나, 손님 옆에 앉아서 사시미 코스로 나오는 회를 앞 접시에 놔주는 일이었다. 성적 발언과 끈적한 시선을 견뎌야 했지만 손님들이 주는 팁은 넉넉했다. 가진 것 없는 여성인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노동은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 여자로 관람되는 느낌은 더러웠다. 일은 금방 그만두었지만, 돈이 급한 상황이었다면 수치심을 감내하고 그 일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여성의 몸은 정말 ‘권력’일까. 권력과 굴절된 권력은 다르다. 인간이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돼지에게 권력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여자에게 권력이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당신의 여자’라는 기호식품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인간’이라고 발톱을 드러내면, 그 권력은 쉽게 취하된다. 상품과 물건에게는 권력이 없다. 굴절된 권력이 있을 뿐.

 

그러나 나를(나의 섹슈얼리티 권력을) 부러워하는 남자들은 많았다. 학생운동을 할 때 처음 보는 어떤 남성이 내게 말했다. “승희씨는 사회운동하면서 수입이 없어도, 나중에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면 되니까 좋겠어요.” 20대 초반에, 또래 남자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은 부럽다. 내가 너처럼 여자였으면 화장하고 치마입고 돈 많은 남자친구 만들어서 용돈 받았을 거야.” 20대 중반이 되어 함께 예술행동을 하던 선배도 내게 말했다. “여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성공하기 쉬워. 성적으로 상품가치가 있으니까 주목받기도 쉽고.” 그들은 모두 여성인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이 부러워하는 ‘여자’란 장애가 없고, 뚱뚱하지 않고, 늙지 않은 여성에 국한된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젊고 예쁜 여자도 늙는다. 나는 가끔 늙은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할머니가 되어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 나. 여성성에 대한 박탈감은, 여성으로만 살아온 삶 전체를 흔들리게 할 만큼 아찔한 공포로 다가왔다. 여성을 기호식품처럼 유통하는 이 사회에서 ‘여자’는 누구든 언젠가 가치 없는 존재가 된다. 공포의 감각은 진실이었다. 주름살을 감추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경고하는 화장품 광고를 보면서, 엄마는 늘어나는 주름살을 두려워했다. 텔레비전에서는 (한때 젊고 예뻤던) 늙은 부인을 버리고 젊고 예쁜 여자와 바람난 남자의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 코르셋을 입은 여자들

 

물론 ‘여자’가 권력이 되는 상황도 있다. 가부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권력이 맞다. 대략 이런 조건만 지키면 된다.

 

자기 관리를 위해 외모를 잘 가꾸면서도 남자의 외모를 밝혀서는 안 되며, 남자가 외모를 지적한다고 울그락불그락 화를 내면 센스 없는 짓이므로 유머러스하게 넘길 줄 알아야 하며, 남자가 화를 냈을 때 대등하게 맞받아치는 게 아니라 ‘나는 당신이 폭력을 휘두를 대상이 아니라 지켜줘야 하는 대상’이라고 사근사근하고 애교 있게 설득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며, 세상물정을 어느 정도 아는 현명함은 있으면서도 꽃뱀이면 안 되며, 자신의 돈도 쓸 수 있는 경제적 능력과 배려심이 있으면서도 돈 많은 남자를 밝혀서는 안 된다.

 

담배 피는 남자친구를 위해 전자담배를 선물해주는 센스는 있어도 자궁을 지켜야 하는 여자가 남자와 함께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되며,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주장을 너무 많이 피력하고 말이 많으면 정이 떨어지고, 까칠하고 투박한 성격이더라도 요리를 잘하거나 남자 부모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전화해주는 정도의 의외의 여성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침대에서 요부가 되어야 하지만 자기 남자 앞에서만 그러해야 하고, 목석처럼 누워있지 않고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남자보다 성과 오르가즘에 대해 더 알거나 그것을 남자에게 알려주려고 들어서는 안 되며, 섹스에서 남자의 사정이 끝나면 ‘오늘 정말 좋았어’ 라고 표현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만 자신이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해서 아쉽다는 둥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을 수 있는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

 

남자의 돈만 밝히고 남자의 외모를 보는 여자들을 남자와 함께 욕할 줄 아는 ‘객관적인’ 정의감이 있어야 하고, 동성친구들과 만나 자신의 남자를 흉보는 건 자기얼굴에 침 뱉는 짓이므로 여성들 간의 공감과 연대를 부추기는 페미니즘 같은 편협한 사상에 노출되면 안 되며,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인간에 대한 차별에 분노하고 연대하고 행동하는 휴머니스트는 괜찮지만 남자를 가해자 취급하고 여성적 매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페미니스트여서는 안 된다.

 

▶ 담배 불을 켜는 여자  ⓒ홍승희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권력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존 조건에 가깝다. 그래서 미소지니(여성혐오)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에게도 있다. 나를 여성성에 끼워 맞추고, 거기서 벗어나면 불안해하던 나 역시 미소지니를 내면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코르셋를 입은 그녀들에게 누가 돌 던질 수 있을까. 저마다의 생존을 위한 일인걸.

 

나의 가장 단단한 코르셋은 검은색 긴 생머리였다. 7년 동안 검은색 긴 생머리카락을 고집하던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하고 싶던 피어싱을 눈썹에 뚫었다. 손목, 뒷목, 팔뚝, 발목에 새기고 싶은 그림을 타투로 새겼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는다. 옛날이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들이다. 청순한 여성의 느낌을 주지 못할까봐.

 

검은색 긴 생머리, 뽀얀 피부, 커다란 눈망울, 붉고 촉촉한 입술이 아니어도 괜찮다. 누군가의 욕망이 되거나 누군가의 인정이 없어도 괜찮다. 할머니가 되는 상상도 즐겁다. 언제나, 누구나 권력이 아니라 해방이 절실하다. 이제 나는 크게 숨 쉴 수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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