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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론, 아는 것이 힘이다

<혜원의 젠더 프리즘> 이토록 다양한 목소리들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혜원 필자 소개: 지옥에서 탈출하려고 적지 않은 나이에 어학연수를 떠났으나, ‘싸우지 않는 이상 천국은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체력을 기르며 다시 맞서 싸울 준비 중인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정의를 위해 싸웠지만 마음은 공허해졌다

 

내가 아일랜드에 가서 페미니즘 이론을 배우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굳이 인간을 이론가와 실천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면,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실천가 쪽이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론은 공허하고, 결국 세상은 실천하는 자들이 바꾼다’가 내 인생의 모토였다. 늘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타입인데다가 사람들을 모아 일을 벌이는 것이 즐거웠다. 페미니즘 이론서를 읽어보려고 애를 써본 적도 있지만, <새 여성학 강의>는 몇 장 펴보지도 않고 책장에 꽂힌 채 누렇게 종이가 바랬다.

 

대신 앞서 말한 모토대로, 실천하는 데에는 거침이 없어 생업이 따로 있음에도 거의 활동가나 다름없는 왕성한 이십 대의 나날을 보냈다. 해직을 당해 3년 간 복직 투쟁을 하며 직장이 아닌 현장으로 출퇴근을 했다. 철거 농성장 <두리반>에서 먹고 자기도 하고, 4대강 사업 싸움을 하는 두물머리와 제주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하는 강정마을을 오고 갔다. 잡년행진(한국판 슬럿워크 SlutWalk, ‘여성의 야한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통념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행진) 기획에도 함께 했다.

 

그 사이, 나는 무사히 복직을 했다. 복직 후 비교적 평온한 시기가 찾아오자 깨달은 것은 내가 많이 지쳐있다는 사실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랬다. 이렇게 부딪혔는데도 깨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인 것만 같았다.

 

3년 만에 극적으로 돌아온 직장에서조차 마냥 편안해질 수 없었다. 쌈닭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불편한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여혐을 숨 쉬듯 자연스레 저지르는 직장의 선배들이 주로 그 대상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유명 여배우를 들먹이며 같은 직장 여성동료의 외모를 칭찬하거나, 몸매와 다리 길이를 논하는 선배에게 ‘여자 외모 말고는 그렇게 할 말이 없느냐’고 윽박질렀다. ‘처녀가 있어 분위기가 좋다’는 직장 상사에게 “저 처녀 아닌데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색하기도 했다. 무거운 물건을 나를 일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먼저 나섰고, 점심 먹는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여 성희롱 문화에 대해 성토하기도 했다.

 

명성 아닌 명성이 쌓여갈수록, 주변 사람들은 나를 불편해 하거나 어려워했고 그만큼 그들의 행동은 조심스러워졌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천천히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싸울수록 나 자신은 점점 외롭고 공허해졌다. 옳은 건 옳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정의로움, 싸움의 당위성 같은 것들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것이 왜 옳고 그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냥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는 없는 걸까? 언제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선배들 말처럼 나이 들어 기가 죽을 때까지? ‘그것도 다 한 때’라는 그들의 말을 견딜 수 없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영어 공부는 어쩌면 제법 그럴싸한 핑계였는지 모른다. 직장에서 적당한 아웃사이더 위치를 차지한 채, 딱 월급 받는 만큼만 건성건성 일을 하며 어학원을 다니고 틈틈이 영어 공부를 했다. 휴직의 요건보다 훌쩍 높은 영어 공인시험 점수를 받아내고, 영혼을 다해 영혼 없는 학업 계획서를 쓰고, 타고난 말주변으로 인터뷰를 매끄럽게 통과했다. 그렇게 어학연수를 위해 아일랜드로 훌쩍 떠났다.

 

▶ 열공 모드 도서관. 아침에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듣고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처박혀 논문을 읽었다. ⓒ혜원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을 만나는 강렬한 경험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째 되는 때였다. 9월 새 학기를 앞두고, 학사 및 석사 과정을 위해 세계에서 모여든 국제학생들과 함께 여름 동안 아카데믹 영어를 배우기로 했다. 한 달 동안 강의 듣는 법, 노트 필기하는 법, 에세이 쓰는 법을 차근차근 익히고 나자 유럽의 대학 과정이 궁금해졌다. 어학원 학장을 설득해 남은 학비를 전부 대학원으로 돌렸다.

 

학점 한 학기 동안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배우기로 하고, 신청할 수 있는 과목이 빼곡히 적힌 두툼한 책을 받았다. 관심이 가는 과목이 많았음에도 망설임 없이 제일 먼저 고른 것은 다름 아닌 페미니즘 이론 수업이었다.(정확한 과목명은 Gender, Culture and Society다.)

 

카르멘 쿨링 교수님은 캐나다 출신으로, 아일랜드에서 오래 생활하며 리머릭 대학교에서 젠더와 대중문화에 대한 강연을 하고 계신 분이다. 여성주의 이론을 통해 젠더와 문화, 사회가 주고받는 상호작용과 그 영향을 들여다보는 것이 강의의 목표였다. 첫 시간에는 교수님의 연구 주제이기도 한 여성의 섭식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오미 울프의 1991년 저서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원제: 아름다움의 신화, The Beauty Myth)를 함께 살펴보았다. 외모주의는 나 또한 오랜 시간 고민해 온 주제였기에, 언어가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흥미진진하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진짜 지옥은 첫 강의를 마친 뒤부터 시작되었다. 총 12강으로 이루어진 이 학기의 강의는 주마다 여성주의 이론가의 소논문과 저서를 짧게는 스무 페이지, 많게는 예순 페이지씩 읽어가야 했다. 모국어로 읽어도 어려울 텍스트를 영어로 읽자니 시간이 몇 배로 걸렸다. 아침에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듣고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처박혀 논문을 읽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빵을 사가지고 가 조금씩 떼어먹었다. 허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만나게 된 글 속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의 목소리는 조금씩 내 안에 차올라 점점 커다란 소리로 울려 퍼졌다. 몸의 통증을 잊을 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 게일 루빈(Gayle Rubin) The Charmed Circle. 사회적으로 정상/비정상으로 간주되는 성적 행위들을 분류한 그래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걸으며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모르는 단어들은 하나하나 뜻을 찾아 적어두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놓치면 아슬아슬하게 따라잡던 추상적 개념들이 마치 증발이라도 하듯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바짝 곤두세웠다.그렇게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고 느껴지는 지식들은 모국어로 SNS에 또박또박 옮겨 적었다. 그렇게 12주 동안 울프, 맥킨토시, 샤흐터, 보부아르, 위티그, 그리어, 프리단, 드워킨, 루빈, 맥로비, 길, 링로즈, 워커다인, 코넬, 드미트리우, 베넷의 글을 읽었다.

 

“Female, a piece of meat”(여성, 고깃덩어리)라는 드워킨 선생님의 일갈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고, 여성을 꽃이나 자연물로 비유하려 드는 여성성의 신화야말로 우리를 타자의 위치에 묶어두는 강력한 구속임을 보부아르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남성 성기는 총이나 무기가 아니라 단지 살점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그들을 ‘인간화’시켜주어야 한다는 그리어 선생님의 말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어 선생님은 결혼에 대해 “보통의 여자들은 왜 결혼을 할까요? 아마 ‘사랑’ 때문이겠죠. 사랑은 결혼제도의 테두리 바깥에서도 얼마든 존재할 수 있어요. 왜 반드시 사랑이 독점적이어야 하나요? 안도감과 미래에 대한 보장 때문에? 이건 단지 불가능한 희망에 지나지 않아요!”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기고도 떳떳한 나는 도서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고 싶어졌다.(그리어 선생님의 대중 강연에 가서 야광봉이라도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난 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3천자 에세이 제출을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억압에 맞서 싸우며 ‘만들어가는’ 페미니즘

 

▶ 안드레아 드워킨의 Sex wars. 섹슈얼리티, 포르노그래피, 성노동 등을 둘러싸고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 페미니스트들 사이 논쟁을 다루고 있다. ⓒ혜원


참 신기한 일이다. 삶과 가장 먼 곳에 있으리라 여겼던 이론을 읽으며, 정작 나는 내 삶의 구석구석을 몇 번이고 다시 불러내었다. 엄마로부터 ‘연애에 환장한 년’ 소리를 듣던 나, 자존감을 제물로 바쳐가며 남들이 모두 뜯어말리는 관계를 고집했던 나, 망사스타킹에 짙은 화장을 하고 클럽에 가서 야한 춤을 추던 나, 결혼 ‘안 못한’ 삼십 대가 되어 쿨한 척 전전긍긍하던 나, 야동만 보면 역겨움이 치솟던 나, 섹스가 너무 좋아 겁이 나던 나, 섹스가 너무 귀찮아 겁이 나던 나를 불러내었다.

 

책상 앞에 앉은 채 속으로 훌쩍였고, 키들키들 웃었고, 주먹을 꼬옥 쥐고 화를 삭였다. 나는 그들의 글을 통해 내 고통이 더 이상 나만의 고통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의 고민들 또한 모두 누군가가 먼저 한 고민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내 안에 스며들어 나의 것이 되어갔다. 꼭 내 마음 속에 선생님 여러 분을 한꺼번에 모셔 영영 들여앉힌 것만 같았다. 든든했다.

 

나는 페미니즘 이론이 내 삶의 모순을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기를 바랬다. 가슴이 답답한데도 내 안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던 이 모순에 대한 정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이론 공부를 통해 깨달은 것은 ‘페미니즘은 결코 고정 불변하는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은 다른 모든 학문들이 그러하듯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넓으며, 내부의 논쟁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기존의 이론 또한 사회문화의 변화, 새로운 여성주체의 등장에 따라 도전받거나 전복되기도 한다. 현실의 모순에 대해 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기존의 억압과 맞서 싸우며 만들어간 것이 페미니즘 이론인 셈이다.

 

이는 때로 이름 없는 고통에 이름을 붙이며(베티 프리단은 미국 중산층 여성들이 가정이라는 이름의 안락한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다고 비판하며, 그들이 겪고 있던 고통을 ‘이름 없는 문제’(The problem with no name)로 칭하고 ‘여성성 신화’(The feminine mystique)를 고발하였다.) 지워진 존재에게 목소리를 주었다.(킴벌리 크렌쇼는 이중 차별 구조로 인해 그 존재가 지워진 흑인여성들의 억압을 조명하면서 상호 교차성 이론을 도입하였다.)

 

정해진 답은 없다. 1980년대 포르노그래피와 성노동을 둘러싼 페미니스트들의 격렬한 논쟁이 그러하였듯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싸워나간, 이토록 다른 목소리의 여성들과의 만남이야말로 내 공부의 가장 큰 성과였다.

 

틀릴 수 있다. 다를 수 있다. 더 용기 내서 말하고, 부딪히고, 깨지고, 고치고, 그렇게 조금씩 다져 나가리라고 마음먹는다. 모른다고 포기하지 않고 더 끈질기게 묻고 답을 찾아나가는 것, 그것이 앞으로의 내 삶이 되리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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