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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억압도 정치적인 것이다

<치마 속 페미니즘> 혁명과 섹스② 


※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 홍승희 씨의 섹슈얼리티 기록.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

 

동거하기 전, 우리는 자주 모텔에 갔다. 섹스할 곳이 없었으니까. 모텔은 비싸서 DVD방에서 황급히 일을 치르기도 했다.

 

어느 날 섹스 후 그가 말했다.

“우리, 이제 너무 자주 모텔에 오지 말자.”

“응. 왜요?”

“사람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어. 혁명한다는 애가 여자랑 이런 데를 와? 하고 말이야.”

 

수긍했다. 모텔에서 나오는 길에 아는 사람과 마주칠 때 민망했으니까. 그런데 그의 말이 왠지 거북했다. 나는 그저 ‘여자’이고 우리가 교감하는 이곳은 ‘이런 데’일 뿐인가.

 

▶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에서 ‘여자’란 무엇일까. ⓒ홍승희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 그때 떠오른 말이다. 여자였던 나는 이 문장에 당황했다. 여자인 내가 수행을 하거나 혁명을 하려면, 내 에로스 욕망을 거세하라는 것일까. 종교와 혁명 모두 모든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말하지만, 남자가 아닌 나는 그들의 진리에서 배제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스무 살 때 진보정당에서 만난 연상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그의 따뜻함과 진정성이 좋았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혁명과 섹스는 같은 에너지가 아닐까요? 알몸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은 모두와 연결되고 싶은 본능이잖아요.”

 

그가 내 말에 공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신영복 선생님을 존경하는 그는 “사랑은 경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추구하는 숭고한 사랑에 우리의 섹스는 포함되지 못했다. 추상적인 사랑은 구체적인 육신과 육신의 뒤엉킴을 소외시키는 것 같았다. 인간의 존엄한 사랑과 동물적인 섹스가 마치 구분된 것처럼 그는 말했다.

 

사적 ‘연인’과 정치적 ‘동지’ 사이의 분열

 

우리의 사적 관계(연인)와 공적 관계(동지)의 간극에서 나는 분열됐다. 섹슈얼리티의 욕망과 혁명적 과업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데이트를 할 때도 죄책감을 느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고 돈을 들여 모텔에 가는 것도 불편해졌다. ‘이 돈으로 누구를 더 도울 수 있을 텐데, 근사한 음식은커녕 어떤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을 텐데. 이럴 시간에 저걸 더 해야 할 텐데…’ 생각했다.

 

섹스를 하면서도 욕망이 지나치지 않도록 줄타기했다. 그가 부담을 느낄까봐 걱정했다. 그의 눈치를 보느라 섹스할 때도 내 감각에 몰입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와의 섹스에서 오르가즘은 우리가 만난 지 2년 후에야 느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항상 오르가즘을 느꼈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말을 알았지만, 섹스는 정치적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섹슈얼리티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행위는 사회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에너지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물론 누구에게도 성애를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고, 성적 욕구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성에게 성적 끌림이 있는 이성애자다. 그도 그랬다. 그러나 그와 나, 우리의 우주에서 사적인 섹스와 공적인 혁명은 분할 통치됐다.


가족제도의 울타리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랑

 

그와 동거를 시작하고 여름휴가를 맞아 그의 부모님이 계신 섬으로 놀러 갔다.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라 잔뜩 설렜다. 벚꽃이 날리는 거리와 바닷바람 부는 해변, 낭만적인 둘만의 새벽을 상상했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그의 부모님 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그의 고향에 왔으니 인사는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그는 부모님 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불편하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전했지만, 그는 떠난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의 부모님은 각 방을 안내해줬고 우린 떨어져 잤다.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내가 꿈꾼 야릇한 사랑은 그의 부모님 지붕 아래에서는 거세되어야 하는 못된 욕망이다. 혁명에서 그래왔듯이.

 

다음 날에도 이어지는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는 불편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인데.’ 대화도 즐겁지 않았다. ‘왜 말도 잘 안 통하는 사람들과 굳이 함께 있어야 하지?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아니 결혼했다 해도 이런 식은 싫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소속감에 마음이 불편해 다리를 비비 꼬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옆에서 신나게 밥을 먹었다. 전에 함께 놀러간 펜션에서 순두부찌개를 해준 내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유, 우리 승희는 요리도 잘하고 일등 신붓감이네.’ 그는 나를 예비 아내, 며느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름휴가 3일 동안 우리는 그의 부모님과 지냈다. 미소로 꾸역꾸역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와 분노가 터졌다. 그에게 이대로는 못 만난다고 말했다. 모든 게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부모님에게서 느낀 이상한 소속감, 부모에 대한 죄책감 하나 이기지 못해서 우유부단하게 끌려 다니는 그의 태도, 그의 가족 앞에서 무력한 우리의 관계. 우리의 사랑과 욕망은 왜 부모, 결혼, 가족제도 앞에서 굴복하는 걸까. 우리의 섹슈얼리티는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게 아니다. 혁명을 말하면서 가족 울타리도 뛰어넘지 못하는 우리 관계가 무기력하고 슬펐다.

 

그는 내가 당연히 자신의 부모님도 좋아해 줄 거라 믿었는지, 우는 나를 보고 적잖게 놀랐다. 한참을 실랑이 하다가 항공편을 취소하고 둘만의 여행을 했다. 꽃길을 달리고 바다가 보이는 방을 잡았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알몸으로 사랑을 나눴다. 그토록 원하던 너와 나의 맨몸으로.

 

▶ 사적 관계(연인)와 공적 관계(동지)의 간극에서 나는 분열됐다. ⓒ 홍승희

 

그의 세계에서 소외된, 나의 몸

 

달콤한 휴가가 끝난 후에도 답답함은 끝나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생애주기별 과업을 완성해야 하는 그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에게 결혼에 대한 생각을 확실히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면 사람들의 삶을 잘 이해해야 해.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혁명적 동지이자 현명한 아내가 필요했다.

 

언젠가 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후배에게 주변에 좋은 여자를 소개해 주는 거 어때요?” 오랜 활동으로 지친 그의 후배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생기를 되찾지 않을까 생각한 내가 말했다. 그가 대답했다. “아니.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지.” “그럼 나는 오빠에게 밥그릇이에요?” 그는 웃었지만, 나는 웃기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밥그릇일까. 가부장 혁명가의 아내가 될 밥그릇 말이다.

 

외모만 꾸미는 여자애들이 많다고 비판하던 그의 말도 떠올랐다. 그는 여성을 대상화하면서 인간의 소외를 말하고 있었다. 여느 혁명가, 종교인이 그렇듯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하다고 하면서, 여성에게는 조건을 붙였다. 민중의 고통에 눈물 흘리면서 ‘된장녀’의 고통은 가십거리가 됐다. 그에게 나는 ‘밥그릇’, 기특한 여자친구, 혁명적이고 현명한 예비 아내였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을 위한 동반자를 원했다. 그의 이상형이 되기 위해 나는 내 몸을 채찍질했다. 빌빌거리는 몸, 욕망하는 나의 몸은 이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세계에서도 소외됐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많이 좋아했다. 그러나 온몸으로 나눈 듯 나누지 못한 교감의 빈공간은 채워지지 않았다. 몸이 먼저 고통을 말했다. 새벽마다 악몽에 깨어나 혼자 울다가 잠들고, 밥을 먹으면 체하기를 반복했다. 그는 아픈 내게 두통약과 소화제를 챙겨주었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내 몸과 마음은 점점 병들어갔다. 내가 말하는 고통의 언어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함께 활동하던 진보정당이 해산되면서 우리는 순서를 밟듯 헤어졌다. 체하던 습관은 4년의 동거가 끝나면서 나았다.

 

<그에게 보내는 편지>

잘 지냈나요. 나는 이제 체하지도 않고, 불면증에 시달리지도 않아요. 물론 여전히 모든 것에 취약하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아픈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어요. 옛날에 나는 물렁하고 허약한 몸과 마음을 가진 내가 싫었어요. 꼭 무엇을 하지 않으면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꼈거든요. 아픈 나는 이 세계에서 쓸모없는 존재였으니까요. 혁명에서도 말이에요.

 

당신은 나의 아픔을 나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약을 챙겨주었지만, 어쩌면 나는 당신이 “아파도 괜찮아,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좋아.” 라고 말해주길 바랐는지 몰라요. 당신과 만나면서 나는 여성의 옷을 입었다가 벗고, 혁명가의 옷을 입었다가 벗느라 지쳤던 것 같아요. 내가 꼭 그 옷들을 입지 않아도 여성, 혁명가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당신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나는 많이 아프지 않았을까요. 좋은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 나는 내 욕망과 아픈 나를 부정해야했어요.

 

사랑을 하기에 우리는 몸이 너무 무거웠던 것 같아요. 사랑은 모든 기존 질서를 뚫어버릴 우리의 우주고 그 자체로 폭탄인데요. 자본주의적 인간에게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지기 정체성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계산하는 관계만 맺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말했어요. 그런데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우리 역시, 우리의 세계에서 있는 그대로 서로가 존재할 자리는 없었어요. 노동의 소외, 인간의 소외라는 거대담론을 말하면서 정작 우리는 서로를 세계에서 소외시키고 있지 않았나요. 혁명에서조차 말이에요.

 

나는 당시 우리가 편협하다고 평가했던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지내요. 혁명은 늘 가부장 남자들의 밥그릇 투쟁의 역사가 아니었나요. 말로는 모든 인간의 해방을 말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모든 인간이 아닌 가부장 남성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가부장 유토피아를 거부해요. 당신이 신봉하던 ‘쉬운’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이유랍니다. 페미니즘은 구체적인 휴머니즘, 실체하는 휴머니즘이에요.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서 민중해방을 외쳤던 그 때보다, 양배추를 삶아 먹고 방바닥을 닦으면서 사는 요즘이 더 혁명적이라고 느껴요.

 

지금쯤 어디선가 열심히 박근혜를 비판하면서 여성혐오 이슈에 대해선 팔짱을 끼고 ‘페미니즘은 너무 감정적이고 전략을 모른다’고 평하고 있을 당신이 상상되네요. 예전에 나는 혁명을 했지만, 지금 나는 혁명을 살아요. 당신의 오늘도 혁명이길 바라요.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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