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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별적 복지’의 냉혈함 앞에서 존엄을 외치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케이 Feminist Journal ILDA 


▶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영국 外) 포스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 연출, 영국 外)는 질병 수당 심사를 받는 다니엘(데이브 존스)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다니엘은 평생 목수로 살며 자신의 손으로 다달이 벌어 살아왔지만 심장에 문제가 생겨 당분간 일을 쉬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질병 수당을 받아 가까스로 생활을 꾸려왔지만, 복지 대상을 탈락시키는 것에만 의욕적인 담당 공무원의 영향으로 질병 수당 수급이 기각되고 만다.

 

질병 수당을 재신청하기 위해 연락한 콜센터에서는 통화 연결음만 반복된다. 가까스로 상담원과 전화 연결이 되지만, 상담원은 질병 수당 기각에 대한 항고는 인터넷을 통해 직접 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 평생을 목수로 살아온 다니엘은 컴퓨터 앞에는 앉아본 적이 없다. 개인이 살아온 경험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행정 절차의 편리함을 위해서이기도 할 테지만, 행정의 언어에서 탈락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지 대상에서 제외시키기 위한 목적인 것도 같다. 영화 속 대사처럼 “바닥을 치게 만들어 수당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카메라는 다니엘이 특정한 장소를 향하며 걷거나, 기다리는 장면을 비교적 길게 응시한다. 비를 맞으며 걷고, 공용 컴퓨터에 빈자리가 나기 전 멍하게 기다리는 다니엘의 모습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그가 겪는 고단한 심정을 드러낸다. 컴퓨터를 마주한 다니엘은 문맹과 다름없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마우스를 화면 위로 올리라는 말에 마우스를 쥔 손을 들어 화면에 가져다 대는 다니엘의 모습은 앞으로의 절차가 녹록치 않을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선별적 복지’ 제도의 틈새

 

‘점수’를 채우지 않으면 복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선별적 복지 관점에 의해 고통 받는 것은 다니엘만이 아니다.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는 최근 이사를 온 탓에 교통이 익숙지 않아 복지 담당자와의 약속 시간에 늦는다. 복지 대상을 탈락시키는 것이 곧 성과로 이어질 담당자에게 케이티의 이런 사정은 ‘제재’의 사유일 뿐이다. 사정을 토로하는 케이티를 건물 밖으로 내쫓으며, 말을 들어주고 있음에도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따져 묻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흡사 냉혈한처럼 보인다.

 

▶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영국 外) 중에서

 

하지만 간이 테이블처럼 오픈된 장소에서, 쏟아지는 내담자들을 기계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그들 역시 계약직이거나 파견직일 것이 분명하다. 내담자들을 돕기 위해 호의라도 보일 참이면 잘못된 선례를 남기지 말라는 상사의 질타가 이어지는 노동 환경에서 냉혈한이 되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케이티가 아이들이 잠든 밤, 갓 이사 온 집의 화장실 청소를 하는 장면은 현실을 구성하는 영화의 힘을 보여준다. 타일 틈새의 묵은 때를 벗기던 중 떨어진 낡은 타일은 바닥에 부딪쳐 와장창 부서지고 만다. 케이티는 일상에 쌓인 먼지 때를 벗기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끊어진 전기와 떨어진 신발창, 곤궁한 식사 앞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푸드뱅크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을 먹는 케이티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질병 수당이 거절되었다는 이유로 노동 능력이 있다고 간주된 다니엘은 구직 수당이라도 신청하려고 하지만, 구직 수당을 받기 위해서는 구직 활동을 했다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껏 해오던 방식대로 알음알음 묻고, 찾아가 이력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일자리를 얻는다고 해도 당장 일을 시작할 수 없는 다니엘은 “놀면서 보증금이나 받겠다는 것이냐”는 냉혹한 질문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

 

다니엘과 그의 이웃들은 생존이 난망한 상황에서 서로 도우며 일상을 버텨 나간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서로 돌보는 연결망이 희망이며, 관계를 통해 제도의 틈새를 메꾸어야 한다는 식의 섣부른 낙관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에게 내미는 손은 비합리적일 정도로 경직된 행정 권력의 폭력성 앞에서 잠시간 서로를 위로하는 힘은 될 수 있지만, 생활 속에 스며드는 견고한 권력의 영향력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 201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 한 장면.

 

결국 복지 사각지대로 내몰리게 된 다니엘은 락카를 들고 복지 센터의 벽면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죽기 전에 항고일을 정해주길 바란다”라고 적어 내려간다. 잠깐의 저항은 경찰 훈방조치라는 초라한 결과와 극도로 곤궁해진 생활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안겨주는 행정 권력의 얼굴 앞에서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항과 요구를 이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견고한 권력과 제도의 틈에서 삶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페미니스트들이 만드는 저널리즘,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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