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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권리를 보장하라

<반다의 질병 관통기> 질병권을 말하다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건강권 강좌요? 저는 질병권을 주장하는 사람인데, 강사 섭외 잘못하셨어요.”

 

이따금 강의에 섭외 받아 가면 ‘건강권’ 강좌라고 적혀 있는 경우를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건강권이 아니라 ‘질병권’ 강좌라고 정정한다. 나는 아플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인데 건강할 권리를 말하는 강좌에서 강사로 섭외한 건 큰 실수라며 어설픈 농담을 던진다. 건강권이란 말 그대로 건강할 권리를 의미하며, 아픈 사람이 치료받을 권리도 포함한다. 그럼에도 나는 ‘아플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우리 현실을 강조하고 싶어서 질병권(疾病權)이라는 이상한 말을 쓰곤 하는 것이다.

 

환자들은 왜 그리 조급해진 걸까?

 

어린 시절 내가 감기에 걸리면, 할머니는 학교를 결석시켰다. 그리고 여름인데도 솜이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놓고 땀을 흘리게 했다. 할머니는 내가 땀을 흘리는 중간 중간 집 간장을 미지근한 물에 타서 한 모금씩 마시게 하면서, 머리와 배를 만져 체온을 확인하곤 했다. 나는 답답하고 무거운 이불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할머니가 무섭기도 했거니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코 밑이 따갑도록 헐게 만든 콧물도 멈췄고, 손오공 머리띠를 한 듯 옥죄던 두통도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당시만 해도 어린 아이들은 아직 ‘아플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감기에 걸렸을 때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는 것보다 그렇게 쉬고 앓는 게 보다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오랜 세월 주로 집안의 여성들을 통해 전해오던 자연요법이 아직 꽤나 살아 있었고, 병원이 지금처럼 지배적이지도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의사들도 면역력을 강조하면서, 감기에 걸렸다고 무조건 약을 먹기보다 적당히 쉬고 앓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을 자주하는 것 같다. 발열, 콧물, 설사 같은 증세는 몸이 나쁜 균과 싸우며 면역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약으로 이런 증세를 없애는 건 몸이 스스로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없앤다는 설명이다. 즉 몸이 아플 시간, 몸이 아플 권리를 주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다.

 

또 한편, 의사들은 환자의 진정한 건강을 위해 약물 치료를 유보하고 싶지만 환자들이 빨리 낫게 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항생제 등을 잔뜩 처방하게 된다고 말한다. 맞다, 그렇다. 환자들은 왜 그리 조급해진 걸까?

 

▶ OECD 통계 자료.  각국의 노동 시간과 임금.  한국의 노동자들은 아파도 쉴 시간이 없다.  ⓒ이미지 제작: 조짱

 

적당히 앓는 게 몸에 더 좋다고 하지만, 그걸 실천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삶의 여유나 선택지가 있는 이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적당히 쉬고 앓을 시간이 없다. 고매하게 아플 권리가 없는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재 빨리 해열제를 포함한 각종 감기약을 먹고, 빠르게 몸을 정상화(표준화)해서 학교와 일터로 달려가야 한다.

 

아이들은 학교를 빠지면 안 되고, 학원은 더더욱 빠지면 안 되니까 해열제를 먹고 간다. 특히 아이가 고3이라면 아이는 물론 엄마도 아프면 안 되니까 함께 약을 챙겨 먹는다. 콜센터 비정규직은 아프면 안 되니까 약을 먹고서라도 버틴다. 알바에게 병가는 없고, 결근은 곧 해고니까 미리 약을 먹는다. 약을 먹는다고 감기가 빨리 낫는 것 같지도 않지만, 야근을 해야 하니까 한 줌의 약을 털어 넣으며 마음의 위안이라도 삼는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죽는 사람은 있어도 아픈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상사의 말에, 점심시간에 비타민 링거라도 맞는다. 회사 내 성별, 학벌, 연줄 차이를 오로지 노력으로 극복해야 하는데, 아픈 건 자기 관리 무능이니 약을 먹고서라도 괜찮은 척 한다.

 

혹시 운이 좋아 충분히 쉴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하더라도 언젠가부터 스스로 마음 편치 않은 이들이 많아졌다. 회사 연수 시간에 듣는 강의에서 ‘프로페셔널한 사람은 아프지 않다’고 했다. 건강도 능력이며, 평소에 적당한 운동과 음식 조절로 건강을 관리하는 건 프로페셔널의 기본 조건이라고 했다. 즉 아프다는 건 자기 관리 무능의 표시이며, 콜록거리며 병가를 내는 건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프로는 아프지 않는다?

 

질병을 개인화하며 아픈 걸 개인의 무능력으로 돌리는 것에 익숙한 사회. 이런 문화에서는 아파서 병가를 내는 것조차 회사와 동료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한다. 야근 후 집에 와서 바로 자지 않고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고 멍하게 티비를 본 걸 후회한다. 주말에 몸을 움직이는 산이나 헬스장에 가지 않고, 영화관에서 맛집으로 이동하며 계속 앉아 있던 자신을 비난한다. 조금 더 부지런하면 더 건강해질 수 있는데, 스스로 건강관리에 게으름을 피웠다며 자책한다.

 

하지만 티비가 꼭 재밌어서 보는 게 아닌 날도 많다. 회사 일을 잠시 잊고 싶고 그 스트레스를 잠시라도 중단하고 싶은데, 가장 쉬운 게 티비를 켜는 거다. 스마트 폰으로 기사, 짤방, SNS를 헤매고 다니는 건 재미를 위해서도 있지만 정보와 유행에 너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혹은 원만한 인간관계와 트렌드 분석에 뒤지지 않는 ‘사회생활에 적합한 몸’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하면 좋겠지만 그럴 여력이 별로 없다.

 

▶ 한국인 여가시간 활용 1위는 TV시청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통계 2014년)  ⓒ이미지 제작: 조짱

 

노동 강도가 높은 집단일수록 여가 시간에 티비 시청을 많이 하고,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적게 한다는 통계도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시간과 강도는 세계적 수준이다. 한국노동자는 1년에 2천113시간을 일한다. 독일과 비교했을 때, 연간 4.2개월을 더 일하는 셈이다. 노동시간이 길수록 질병 발생율이 높은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떤 의미일지 가늠해볼 여유는 없다. 여유가 있더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 현실을 설명하고, 비판하고,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를 자책하고 자기계발 노력을 하는 게 더 낫다. 이 현실에서나마 탈락하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니까.

 

피곤한 몸이 쉴 틈을 찾아 헤맬 때면, 불안이 고개를 내밀어 다시 ‘노력’ 속으로 밀어 넣는다. 상사가 야근을 시키지 않아도 이따금 스스로 야근을 하거나 일을 가지고 집에 온다. 뒤처지면 안 되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습관처럼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한번 씩 자신을 번아웃시킬 정도로 일을 해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능력 있는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에 가까워진 것 같다. 어쩌면 성공이라는 것에 가까워 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아플 수 없다, 아프면 안 된다.

 

‘아플 권리’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자책감

 

“너희들은 이 도방의 재산이다. 그리고 짐승과도 같다. 죽을 권리는 있지만 병이 나거나 아플 권리는 없다. 그게 노예들의 본분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몇 해 전 MBC에서 인기리에 방송됐던 드라마 <무신>에 나온 대사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는데, 참혹하다.

 

그런데 슬프게도 지금의 현실과 큰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더욱 참혹한 건 그 섬뜩한 목소리가 이제 바깥에서 소리치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우리 내면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자책한다. 일이 곧 자신의 인생이 되어버렸다.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은 건, 인생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의미가 되어버렸다. 노동에 최적화된 몸을 만들지 못하고 아프게 된 걸 자책한다. 아픈 걸 자책하는 게 회사 측에 미안해서인지, 아프게 된 내 몸에게 미안해서인지 혼란스럽다.

 

이런 우리를 보고 있으면 이물감이 느껴지고 쓴맛이 밀려든다. 예전에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물감, 상실감, 차가움, 소외감, 박탈감, 두려움 같은 걸 느꼈었다. 그러니까 우리를 광물자원, 해양자원과 같은 선상에 놓인 인적자원이라고 명명하다니. 슬픔을 연대하고 사랑을 나누고 분노를 보살피는 총체적 인격체인 우리를 인적자원이라고 보는 건 누구의 시선인지?

 

▶ 헬스장 광고 카피를 따서 만든 홍보물 이미지.  ⓒ 제작: 조짱


건강은 개인이 관리해야 할 영역이자 스펙이며 아픈 건 그 개인의 관리 실패라고 보는 건 누구의 시선인지? 임신 기간 단축근무와 산업 안전장치 때문에 생산성이 우려된다는 건 누구의 시선인지? 산업재해 사망 1위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을 만들겠다는데 기업활동과 경제가 위축된다며 염려는 표하는 건 누구의 시선인지?

 

그러니까 온순한 말투, 상냥한 표정, 똑똑한 걸 너무 티내지 않는 태도, 바로 그게 진짜 현명한 ‘여성 직장인’이라고 보는 건 누구의 시선인지? 어쩌다가 까칠한 말투, 무뚝뚝한 표정, 논리적이고 토론에 지는 법 없는 이성적이고 명확한 태도는 여성스럽지 않다며, 그런 자신을 자책하게 된 것인지. 어쩌다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도, 건강 관리까지 해내지 못한 건 개인의 부족함이었다고 자책하게 된 것인지.

 

도대체 우리의 아플 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아플 권리가 사라진 자리에 왜 자책감이 미묘하게 자리하게 된 것일까. 어쩌다 아플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아픈 몸을 자책하는 것에 더 익숙해져 버린 걸까! 우리는 아플 권리를 분실한 것일까, 도난당한 것일까.

 

‘아프지 않을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 사회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프지 않을 권리’는 있는 걸까? 일하다 다쳐서 입원 치료 중에 ‘복귀하지 않으면 퇴사 처리한다’는 말을 듣고 치료를 중단한 채 일터로 돌아왔다는 김포공항 청소노동자의 말이 기억난다.

 

휴대폰 부품 공장에서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한 노동자, 하루 12시간 노동하지만 한 달에 2일 쉬는 식당노동자, 성추행과 감정노동으로 만성적 우울증에 시달리는 서비스직 노동자, 프로젝트 마칠 때마다 몸에 이상 증세가 하나씩 추가된다는 노동자… 기나긴 컴퓨터 앞 노동 속에서 만성적 어깨와 허리통증이 없는 노동자가 드문 현실이다. 1년에 공식집계만 2천명이 산재로 사망하고, 9만 명이 산재로 아프게 되는 최고의 산업재해 국가.

 

이외에도 피해 범위를 다 측정할 수도 없는 ‘옥시 참사’ 관련 소식과, 미세먼지에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2060년 대기오염으로 인한 조기 사망률은 한국이 가장 높을 것이라는 OECD 발표도 몇 달째 신문에 등장한다. 우리는 아프지 않을 권리도 없다.

 

아플 권리도 아프지 않을 권리도 없는 사회. 우리는 폐쇄회로에 갇혀 있는 건가, 출구 없는 미로를 걷고 있는 건가? 폐쇄된 출구를 열기 필요한 열쇠는 무엇이 있나 생각해본다. 적당한 노동 강도와 적당한 노동시간,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노동환경, 산업안전장치, 성별 임금격차 해소, 최저임금 현실화, 미세먼지와 혐오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환경 구성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일터가 안전하고 민주적이길 바란다. 회사의 부품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 받길 원한다. 개인에게 건강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떠넘기는 사회를 향해 여러 목소리로 함께 비난하길 원한다. 아픈 사람도 원하면 적정한 시간과 강도로 노동할 권리를 원한다. 적절하게 아플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버스정류장 가로수의 싹이 움트는 모습을 음미할 수 있고,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 속에서 온전히 휴식을 취해도 불안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는 우리가 아플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 질병권을 허하라!

 

내가 너무 많은 걸 원하는 걸까? 그러나 너무 적은 걸 원하면 필요한 게 뭔지 명확히 드러나기 어렵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사회는 더 위험해진다. 아, 그리고 가장 위험한 것. 아픈 몸에 대한 자책감. 우리는 아플 만해서 아프다. 우리에게는 아플 권리가 필요하다. 자책감은 무책임한 사회에게 줘버리자. (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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