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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방어 훈련을 하는 세계 여성들과 만나다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안녕하세요?”


※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필자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움직임의 학교)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Krav Maga) 지도자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세르비아 여성들 “그냥, 학교 체육시간에 배웠어”

 

2012년 2월, 나는 두 달 동안 셀프 디펜스(self-defence; 자기방어) 지도자 과정에 참가하기 위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떠났다.

 

하루 종일 폭설이 내리는 영하 25도의 혹한 속, 지하 벙커를 개조한 체육관에서 세르비아 여성들을 만났다. 퇴근길에 셀프 디펜스 수업을 찾아온 그녀들은 발랄하며 건강했다. 세르비아의 특징적인 문화는 여성이 레슬링과 복싱 같은 격투 스포츠나 주짓수, 아이키도, 영춘권, 가라데 같은 무술들을 흔히 남성처럼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점이다.

 

성이 상품화되고 여성이 성적인 대상으로 소비된다는 점은 세계 어느 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세르비아에서는 여자가 레슬링을 하거나 무술에 열심이라고 해서 특이하게 보거나,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별종처럼 여기거나, 반대로 조금만 해도 대단하다며 치켜세우기만 하는 낯익은 한국의 풍토와는 전혀 달랐다.

 

▶ 2012년 2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 최하란


저녁에 열리는 수업에서 나는 세르비아 여성들이 뒤로 굴러 물구나무를 섰다가 착지하며 계속 전진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수업이 끝난 후 다가가 물었다.

 

“너희는 왜 이런 걸 잘 하니? 대체 언제 어디서 배운 거야?”

“그냥, 학교 체육 시간에…”

“유치원 때부터 배웠지.”

 

‘우린 그런 거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데… 하긴 이제 체육 시간도 거의 없잖아.’

 

핀란드에선 요청도 안한 여자를 도와주는 건 실례야

 

이듬해 2013년 3월, 여성 셀프 디펜스 지도자 과정에 참가하기 위해서 다시 이번에는 체코 프라하로 떠났다.

 

체코, 폴란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핀란드에서 온 남녀 강사들을 만났다. 덕분에 그들이 여성 셀프 디펜스 수업과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그리고 지도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들, 반드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체코는 유명 화장품 기업의 후원으로 수백 명이 참가하는 여성 셀프 디펜스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핀란드에서 온 강사와는 성평등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판란드 사회에서는 여성이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거나 힘겨워 보인다고 해서 아무 말 없이 도와주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꼭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을 때만 돕는 것이 상식이라 한다.

 

프랑스에서 온 강사는 자신의 학생 얘기를 해주었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가진, 누가 봐도 아름답고 세련된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이 당해왔던 가정폭력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셀프 디펜스 수업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참 모습을 찾게 됐다고, 고맙다며 이제 온전히 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울며 웃으며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라하를 떠나기 전, 체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여성 셀프 디펜스 수업에 참가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몸의 언어가 있었다. 그녀들에 대한 내 느낌은 거침 없으며 강하고 좋은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이었다.

 

그 에너지와 동료들에게 선물 받은 경험담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여성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그렇게 2013년 7월부터 나는 한국에서 셀프 디펜스 수업을 시작했다. 비정기적인 세미나나 일회성 워크숍이 아니라 매일매일 열리는 대중적인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유명한 셀프 디펜스 서적인 크라브 마가(Krav Maga) 책을 번역했고 81명의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책을 출판했다. 그때 내가 쓴 역자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남성의 손에 더 많이 들려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더욱 필요한 책이다.”

 

더 많은 여성들이 안전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해 셀프 디펜스를 배우길 고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우선 ‘셀프 디펜스’도 ‘크라브 마가’도 사람들에게 너무나 낯선 단어였다. 게다가 달리고, 막고, 치고, 차고, 구르고, 단호하게 말하고, 몸을 부딪치는 것은 여성들에게 더욱 낯선 것이었다. 한참 동안 여성학생들은 매우 소수였다.

 

▶ 셀프 디펜스 수업 참가자들.   ⓒ스쿨오브무브먼트

 

그러나 나는 행운아다. 셀프 디펜스 수업을 통해 그녀들의 눈빛, 표정, 호흡, 움직임, 몸짓을 보았다. 새로운 테크닉을 배울 때면 그녀들은 긴장하거나 흥분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쑥스러워한다. 얼굴이 하얗게 되기도 하고, 손을 바르르 떨기도 하고, 테크닉을 순간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터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이 단 3초 만에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충분한 대화를 통해 상황을 이해시키고, 연습하는 테크닉을 더 현실적으로 훈련하게 만들었을 때가 꼭 그랬다.

 

3년이 지나며 내 셀프 디펜스 수업에는 꾸준히 수련하는 여성들이 50퍼센트가 될 정도로 늘었다. 작년에는 딴지일보 벙커1에서 여성 셀프 디펜스 특강과 8주간의 특별 수업을 열었다. 올해에는 더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함께 여성 셀프 디펜스 수업과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을 위한 셀프 디펜스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지금 〈일다〉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있다.   

 

“안녕하세요?”  (최하란)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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