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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등한 위치에서 연애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⑨ 연애의 각본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페미니스트 이성애자 여성의 연애

 

“어떤 사람과 처음 연애를 하는지에 따라서 이후 연애 방식이 크게 달라지는 것 같아.”

 

이렇게 말한 친구는 자신이 처음 만난 연애 상대가 좋은 사람이었으며, 그를 통해 연애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나는 20대 여성이자 페미니스트이며 헤테로(hetero-sexual; 이성애자)다. 대학에 들어 와서 처음 페미니즘을 공부했을 즈음에, 나의 첫 연애도 시작됐다. 그런데 연애는 나에게 있어서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였다.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한 직후부터 나의 말이 그의 말과 똑같은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느꼈다.

 

“페미니스트 이성애자 여성의 연애는 시작부터 고난이야.”

 

한 친구는 소개팅을 마치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연애는 생각보다 더 은밀하고 사적인 관계였다. 그 관계 속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나의 정체성이 쉽게 무력해지기도 했다. 남자친구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을 준만큼 그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었기에, 남자친구에게 기대하는 것들의 수준이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네가 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야”

 

그는 나보다 여섯 살 연상의 남자였다. 나의 첫 데이트 상대 말이다. 그와 처음 사귀게 된 날, 나는 미디어에서 보았던 그런 ‘낭만적 연애’를 꿈꿨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연애와 달리, 연애는 나를 옥죄어 들어왔고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논리적인 근거를 대보라고 요구했다. 내가 논리적으로 답해도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궤변을 늘어놓으며 내 말을 묵살하곤 했다. 우리의 대화는 늘 그의 말로 끝났다. “넌 아직 어려서 현실을 잘 몰라.”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은 날, 나는 남자친구에게 책을 읽고 느낀 감정과 새로 얻은 깨달음에 대해 얘기했다. “짧은 치마를 입는 건 남자들 보라고 입은 거 아냐?”, “조신하게 앉아 있어야지. 안 그러면 싸 보인다”, “그 남자애가 널 좋아해서 괴롭힌 거야. OO이는 부럽네~” 같은 말들이 불편했던 이유를 책에서 발견했을 때의 환희란, 세상이 갑자기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그 기쁨을 공유하고 싶어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또 내게 논리적으로 자신을 설득해보라고 했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여성에 대한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고, 오빠가 아는 ‘그런 나쁜 것’(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말이다)이 아니라고, 남성과 여성은 연대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넌 너무 사람을 계몽시키려고 해.”

 

그는 내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 취업시장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성차별에 대해 그에게 토로했을 때에도, 그는 견딜 수 없어했다. 그가 내게 내놓은 답은 하나였다. “신경 쓰지 마. 넌 어리고 예쁘니까 취업이 잘 될 거야.”

 

▶ 영화 <러브 픽션> 중에서. “너 생리하니?” 남자친구의 말에 희진은 “여자들이 정당한 이유로 화를 낼 때, 무책임한 남자들이 하는 가장 폭력적인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여자들은 자궁에 뇌가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 당신만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말 실망이다”라고 답한다.

 

‘어리고 경험이 없던’ 나는 남자친구에게 대학 생활에 대한 고민을 자주 털어놓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네가 자꾸 그런 쓸 데 없는 것들을 하니까 그렇지” 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한창 대학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고 있었고, 강의실과 과방, 동아리방 등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에 관심을 갖고 피해자를 돕고자 했다. 대학생으로서 나의 권리에 대해 말하고, 대학 사회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두 나의 생존과 관련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내 모든 활동을 ‘쓸 데 없는 것’으로 묵살해버렸다. ‘네가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때냐’, ‘너에게 더 큰 문제는 취업이야’ 라고, 그는 그렇게 나의 현실을 진단했다.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내가 더 잘 알아’ 라는 말이 마음속을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뱉을 자신은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또 지난한 말다툼을 하게 될 것이며 “어리니까 그렇지” 라는 말을 듣게 될 테니 말이다. 나는 ‘나이 많은 남자’의 말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네가 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야”, “그게 뭐라고. (별 거 아닌 일) 취소하고 나랑 만나야 돼.” 그는 이런 식으로 나의 일정을 단속했다. 내 일이 중요하다고 열심히 변호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내가 속한 공동체 활동을 평가절하하면서, ‘그런 곳’에 참여하느라 자신과 만나지 않는 나를 비난했다. 나는 내 일정에 대해 설명하기를 요구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정에 대해선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게임해야 하니까 자꾸 연락하지 마”, “오늘 늦게까지 친구들이랑 술 마실 거야”라는 그의 말에 “왜?”라고 묻는 건 어색하고 적절치 못한 일로 느껴졌다. 나는 늘 ‘나’에 대해 해명해야 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이니까…

 

그는 내가 전형적인 여자친구의 틀에 맞추길 원했다. 화장을 하지 않고 자신과 만날 때면 “나한테 소홀해졌다”고 말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꼭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 같다고 내가 지적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렇게 연애한다”고 응수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떼를 쓰는 어린 여자친구’가 되었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면 ‘이제 좀 세상을 알아가는 여자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그가 가르쳐준 연애규범에 맞춰 연애했다. 나는 그렇게 학습했다. 남자친구의 고민을 잘 들어주는 여자친구,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옷차림에 신경 쓰는 여자친구, 남자친구와 너무 편하게 지내지 않고 긴장감을 갖고 있는 여자친구가 되는 법을.

 

나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싸움닭’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나와 가장 친밀한 관계인 그에게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도 없이 쩌렁쩌렁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외치던 내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 관계는 위태로워질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드세서 그가 날 떠나면 어쩌지?’, ‘그래도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이니까…’, ‘이런 사람 어디서 또 만나지 못할 테니 참자’를 수천 번 되뇌었다.

 

그렇게 나는 그와 사귀는 내내 자기모순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만 빼면 참 좋은 사람’과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연애 상담을 할 땐 “네 애인의 행동은 문제가 있어. 그와 관계를 다시 고려해봐”라고 조언하는 내가 정작 나의 연애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나의 정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문제’만 빼면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늘 여자친구를 평가절하하고 자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그의 연애방식은 사귀는 내내 지속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전형적인 ‘후려치기’라는 것을. 이 관계가 나를 좀먹고 있다는 것을. 페미니스트라는 나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남자친구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했던 것일까? 아니, 가질 수 있던 것일까?

 

‘착한 여자친구 코스프레’가 좋았다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 서있지 않았다. 그의 행동과 말은 “사회생활을 위해” 용인되는 것이었지만, 동일한 기준이 나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했다. 그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 반문했을 뿐이다. “남성이 늘 역차별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여성주의자들이 과도하게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어.” 그럼에도 나는 그가 내 말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성평등에 대한 나의 입장에 그가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싸우지 않았다. 우리의 말다툼은 ‘남자친구의 일방적인 훈계’에 가까웠으며, 나는 그 훈계 앞에서 ‘변명’할 뿐이었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고 싶다고 말하면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빠는 친구들이랑 새벽까지 놀잖아” 라고 문제 제기했더니 “너는 친구들이랑 놀면 연락을 제때 안 하잖아” 라고 받아쳤다. “오빠는 게임할 때도, 혼자 있을 때도, 친구들이랑 놀 때도 연락 안 하잖아”라고 했더니, 그는 화를 내며 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그러면 나는 먼저 사과해야 했다. 나는 그를 이해해야 했지만, 그는 날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화내는 것은 ‘삐친 것’이었고 그가 화내는 것은 ‘정당한 분노’였다.

 

나는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정말 혼란스러웠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낼 때마다 그는 그런 나를 부정했다. 고민이 많았지만, 친구들에게 마음을 털어놓기는 어려웠다. 페미니스트인 친구들에겐 “그걸 참고 있다니, 네가 그러고도 페미니스트야?” 라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페미니스트가 아닌 친구들에겐 “너도 역시 여자구나” 라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두려웠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을 참았던 이유는 ‘착한 여자친구’라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봤자 그 화가 다시 내게 돌아왔기 때문에 난 화를 낼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그런 나의 태도는 남자친구 주변 사람들한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남자친구는 내게 그들의 평가를 자주 들려주었다. “네가 엄청 아량이 넓은 여자친구라서 부럽대”, “남자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한대.” 남자친구는 내가 자신의 지인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는 것에 대해 몹시 뿌듯해했다. 그리고 그가 전해준 말들은 내게 연애의 기준이 되었다.


▶ 내게 주어진 규범들을 적은 포스트잇.  당시의 내 고민.   ⓒ콩콩

 

“그건 폭력이에요”

 

어느 날 대학 선배와 취업설명회에 갔다. 그리고 취업설명회에 참석했다는 인증샷을 SNS에 올렸다. 그러자 남자친구가 화가 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너 미쳤어?” 어리둥절한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너 그렇게 다른 남자랑 찍은 사진 올리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 선배와 포옹을 했나, 키스를 했나.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 이미 이 일에 대해 조언을 구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내가 나쁘다고 했단다.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사과하지 않으면 날 계속 괴롭힐 테니 말이다. 나는 이 관계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이 남자와 헤어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한 친구가 자초지종을 들은 후 이렇게 말했다. “OO(내 이름), 그건 데이트 폭력이에요.”

 

데이트 폭력이라니, 내가?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 일상이 무너져버릴 것 같다는 위험신호가 울렸다. 내가 배운 연애란 이런 방식이었다. ‘아니에요. 나는, 그런 상황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에요’, ‘나는 폭력이 무엇인지 알아요, 그런데 나는…’ 수많은 변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다가 겨우 내뱉은 말은 “그런가요?”였다.

 

친구는 내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내가 그의 소유물처럼 취급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두 사람이 연애 관계에 있어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는지, 나의 상황을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정색을 하면서 “폭력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계속 그 사람과 사귀면, OO이랑 인연 끊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답했다. “평소에는 나한테 잘해줘요.” 정말 무력한 대답이었다.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기하게도 내가 겪었던 일이 타인에 의해 ‘데이트 폭력’이라고 명명되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내가 그와의 관계를 왜 고민하고 있는지, 그의 말과 행동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나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언어폭력이라는 사실을 애써 모른척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헤어졌다. 나의 생각과 언행에 대해 항상 설명해야 했던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페미니즘, 문학, 사회, 정치를 뺀 대화?

 

그 이후, 나는 친구의 소개로 소개팅을 했다. 상대를 ‘잠재적 연애 대상’으로 설정하고 만나는 일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를 밟았다. 파스타 가게에서 서로의 신상에 대해 물으며 대화했다.

 

그는 내 관심사를 물었다. 당시 나의 관심은 문학작품에서 재현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있었다.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책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어떤 책들을 읽었냐고 묻길래, 몇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이설의 <나쁜 피>, 이광수의 <무정>, 나혜석의 <경희> 등을···”

 

나는 ‘재미있게 읽었어요’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런 것 말고 다른 일에는 관심 가지지 않냐”고 물었다. ‘그런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는 ‘남성’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말끝마다 “남자는…”, “여자는…‧”을 덧붙였다. 나는 내가 관심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첫 만남에 여성, 문학, 사회, 정치… 이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대체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는 그런 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성평등’을 굉장히 특별하고 예외적인 주제처럼 취급하는 그 사람에게 관계 맺음을 기대할 수 없었다.

 

나는 소개팅을 하며 있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보통 소개팅 자리에선 다 그래.” 의문이 들었다.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연애를 시작하는 거지?

 

▶ 나를 설명하는 것들 중.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그리고 페미니스트.  ⓒ콩콩

 

눈에 보이지 않는 불평등, 연애의 서사

 

연인 관계의 불평등은 이전과 달리 더 이상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관계라고 배우면서 자랐다. 평등한 관계는 당위적인 것이고, ‘노골적으로’ 성차별적 언행을 하면 안 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성차별’이라는 규범 이상을 문제 제기하기는 어렵다. ‘이만큼은 성차별이라고 인정해 줄 테니까 그 이상 요구하지 마’라고 선을 긋는다.

 

우리는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차별과 폭력은 더욱 교묘해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폭력적인 언행을 하고,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개인의 일’로 치부된다.

 

젊은 여성들은 ‘이전과 달리 성평등을 이룩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살기 좋은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꼴페미니스트’가 된다. 특히 공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인 관계에서 성별 권력관계를 논하는 사람은 피곤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친밀한 관계에서도 불평등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연애의 일부가 되어 눈치 채기 어려울 뿐이다.

 

그 폭력은 “여자친구는 이래야 해”라는 규범으로 녹아 당연한 연애의 서사가 된다. 그 서사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 어떤 관계보다 강력하게 성역할이라는 규범이 작용하는 장이 연애관계이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로서 요구되는 행동, 남자친구로서 요구되는 행동을 거부하는 순간 이성과의 연애에 제동이 걸린다. 첫 연애가 끝난 후 나는 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평등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가장 은밀한 관계에서부터 ‘나의 정치’를 실천할 수 있을까? ▣ 콩콩. 여성주의 저널 일다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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