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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속가능한 정치’다

<‘다른 정치’ 이야기>② 삶의 정치, 유해정에게 듣다


 

20대 국회를 구성하는 선거일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일다>는 녹색당과 공동 기획으로 평등의 정치, 삶의 정치, 다양성의 정치, 지속가능한 정치 등 ‘진짜 정치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여의도 정치’에서 보이지 않는 것

 

지난 3월 31일, 밀양 고압송전탑 반대 주민 28명이 서울에 올라와 광화문 광장에서 녹색당 입당 선언을 하며 기자회견을 가졌다. 밀양 주민들은 지난 4년간 전국의 녹색당원들이 밀양 송전탑 투쟁에 함께하며 질기고 깊은 ‘연대’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히며, 철탑이 들어섰어도 탈송전탑, 탈핵을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에서 활동 중인 유해정 씨를 만나 ‘지속가능한 삶의 정치’와 ‘연대의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해정 씨는 1988년부터 인권활동을 시작해 최근에는 인권기록활동을 해오고 있다.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2014)를 필두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구술기록집 <숫자가 된 사람들>(2015), 세월호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2015) 등이 그이가 함께한 기록활동의 목록들이다.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활동가 유해정 씨.    ⓒ 글 사진: 장서연 

 

- 밀양 이야기를 해보고 싶네요. 밀양구술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신문이나 방송으로 전해지는 밀양의 목소리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이거나 ‘할매들’이 웃통 벗고 공권력에 저항하는 투사, 이렇게 양분화된 이미지 같아요. 왜 국가 폭력에 온몸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분들의 삶과 역사적 맥락에서 들여다볼 수 없죠. 그러다보니 송전탑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왜곡이 많고, 공감한다고 해도 그 시효가 짧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이분들의 삶 속에서의 밀양을 듣고 전하고 싶었어요.

 

두 번째 이유는 여성적 궁금함이었어요. 제가 인권운동을 한지 어느새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 속에서 여성들, 할매들이 주체가 되어 싸운 운동은 못 봤던 것 같아요. 그것도 평범한 여성들인데다 보수적 색채가 강한 ‘밀양’의 ‘할매’들이 투쟁하는 걸 보면서 궁금했던 거죠. 할머니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싸울까? 그 힘은 뭘까? 경찰한테 판판히 깨지잖아요. 그런데도 할매들은 ‘밥해먹자’ 이러면서 밥 한 솥 해가지고 나눠먹고, 전 부쳐 먹고… 다시 싸우고. 투쟁에 이골이 난 활동가들도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할매들은 다르더라고요. 정말 궁금했어요. 이 삶의 저력은 뭘까?”

 

- 얼마 전에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즐거운 나의 집 101>을 봤는데, 행정대집행이 막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한 어르신이 전화로 “깁밥 100줄 준비하라”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웃음)

 

“그러니까요. 졌는데 잔치를 하세요. 전을 부치고 겉절이 담그시고…. 저 같은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제법 됐나봐요. 언론에 담기지 못한 이야기들과, 묻지 않았기에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잘 듣고 기록해서 세상에 전해보자는 마음으로 2013년 연말에 밀양구술프로젝트가 시작됐어요. 인권활동가, 르포작가, 여성학자, 회사원 등 다채로운 사람들이 모였죠. 한참 밀양 싸움이 계속될 때여서 우리의 작업이 밀양을 알리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싶어 그해 겨울, 알차게 밀양을 오갔어요. 그 결과물이 <밀양을 살다>죠. 사실 제 시댁이 밀양인데, 밀양프로젝트를 하면서 밀양 오고간 횟수가 결혼한 이후 밀양 간 횟수보다 많을 걸요(웃음).” 


▶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즐거운 나의 집 101>(련, 2015) 

 

- 송전탑 반대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찾아간 사람들이 ‘밀양에 갔다오면 힘을 받는다’고들 하는데, 그게 뭘까요?

 

“저도 밀양 작업을 하면서 가장 열렬히 ‘부흥’된 사람들 중에 한 명이예요.(웃음) 할매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 삶과 ‘목소리’의 매력에 풍덩 빠졌다고 할까? 밀양 때문에 ‘인권기록활동’이라는 장르를 시작하게 됐으니까요. 인터뷰 시기가 한참 송전탑이 세워지고 행정대집행 이야기가 풍겨 나왔을 때였는데, 객관적으로 밀양에 패색의 기운이 감돌 때였죠. 지는 싸움을 하고 있으면 꺼이꺼이 울거나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지?’라며 안절부절못하는 과정이 일반적인데, 할매들은 안 그러더라고요. 투쟁이 끝나면 분해서 ‘이놈 새끼들…’ 하고 한바가지 욕을 퍼붓다가 다시 ‘밥 묵으러 가자’ 그래요. 힘내서 다시 싸우면 된다고, ‘다시 잘하면 되지’ 이런 과정들을 계속하시는 거예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우리가 물러서지 않는다면 싸움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시는데, 순간순간 울컥했죠. 감동적이었고요.

 

처음에는 ‘이 긍정은 뭐지?’ 했는데 어느 순간 ‘아, 이게 여성의 힘이구나’ 싶더라고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항상 좌절하는 존재잖아요. 사회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 내에서 일상이 좌절이잖아요. 많은 밀양 할매들의 소원이 글을 배우는 거였어요. 지지리도 가난하게 자라 소학교도 채 다니지 못한 분들이라 “글자만 알았어도 요렇게는 안 살았을기다” 하셨죠. 결혼도 정신대(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했던 거고, 친정에 가는 것도, 자식 낳고 키우는 것도 모두 본인의 선택이라기보단 ‘당연한 도리’로 수긍해야했죠.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늘 힘겨운 순간, 좌절의 문턱 앞에 삶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좌절과 실패엔 군살이 배긴 듯 보였어요. 울분의 고개를 넘고 다시 일어설 연습이 되어있다고 해야 하나, 삶에 인생에 대한 힘들이 가득한 분들이라고 해야 하나?

 

반면 남성들은 여성만큼 일상이 패배로 얼룩지지 않잖아요. 가부장적인 사회와 문화 속에서 성장하다보니 비민주적인 송전탑도, 폭력적인 공권력도, 경찰의 야유와 조롱도 여성보다는 더 큰 좌절이나 상처가 되는 것처럼 보였어요. 기가 팍 꺾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밀양 싸움에선 할매들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여성으로서 묘한 연대감도 생겼고요. 여성의 선배로서 삶에 대한 공명과,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거창한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자기 고민으로 이야기해주니까. 그런 것들이 주는 힘, 또는 지지. 그게 제겐 삶에 대한 응원의 말로 들렸던 것 같아요.”

 

- 밀양 구술기록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느끼게 점이 있다면?

 

“저는 할매들이 들려주는 자기 삶의 이야기에서 큰 힘과 지지를 받았어요. 당시 88세셨던 조계순 할머니를 인터뷰했는데 “내가 진짜 못사는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8남매를 키웠는데 아쉬운 것도 많지만, 내가 소인으로 태어나서 이정도 내 삶을 잘 일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잘 산 것 같다”고 하신 분이에요. 저는 삶의 원동력이 뭐냐고 물었는데, 할매의 대답은 “울력”이었어요. 세상사는 게 혼자 힘으로는 다 할 수 없고, 서로가 간절히 빌어주고 도와줄 때야 비로소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그 말이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 가슴에 와 닿았어요. 삶의 겸허함에도 놀랐고요.

 

할매는 죽음에 대해서도 평온하셨던 것 같아요. 물론 송전탑 때문에 이승의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고 가 선조들에게 송구스럽고, 자손들 생각에 분통해 하셨지만, 할매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단절이 아니라 세상 숙제를 다 마쳤으니 먼저 떠난 이들 곁으로 간다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여기 일은 다 마쳤으니 다음 세상 또 다른 일을 하러 가야한다는, 삶과 죽음은 자연스러운 생명의 이치처럼, 죽음마저 삶에 스며든 느낌이었죠.

 

또 밀양 할매들의 삶을 통해 바라본 송전탑과 국가 폭력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어요. 뭐랄까? 제가 알던 것보다 더 치욕적인 거였어요. 그분들이 평생 일구어온 인생과 삶의 방식에 대한 폭력이자 모욕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많은 사람들이 ‘보상’ 문제를 이야기하잖아요. 예전에는 돈 문제 앞에서 말이 막히곤 했는데, 이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할매들에게 송전탑이 들어서는 땅은 삶의 역사에요. 조계순 할머니에게 저 땅을 어떻게 모았냐고 물어보니, 1년에 딱 한 마지기씩 모았대요. 남편이 큰 나무 잘라 장에 내다팔고, 호미랑 낫자루 놓지 못해 손가락이 다 휘었는데, 그렇게 노동하며 자식 8남매를 성가시키며 매년 한마지기씩 모은 땅이라고 하시는데…. 그 공간을 사람들이 돈으로 환산한다 했을 때 얼마나 기가 찼겠어요? 모욕 받고 상처받았겠어요?”

 

- 송전탑 반대 밀양 주민들이 총선 앞두고 녹색당에 집단 입당을 선언했습니다. 녹색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2014, 오월의봄)


“한국사회 정당 중에서 유일하게 성장과 발전에 대해 ‘노(NO)’라고 답하는 정당이 녹색당이잖아요. 진보 가치를 표방한 개혁적인 정당들도 성장과 발전에 대해 명확하게 ‘노(NO)’라고 답하지 않아요. 민심이 그러면, 표가 필요하면 어쩔 수 없다는 가능성은 열어 놓는 거죠. 하지만 녹색당은 달라요. 성장과 발전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와 철학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은 바뀔 수 없고, 어딘가에선 계속 누군가 삶을 위협당하고 고통 받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해요. 그게 ‘밀양’처럼 한 지역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후쿠시마’처럼 전체를 위협할거라고 경고하는 거죠.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삶은 성장과 발전을 하나의 ‘종교’처럼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래서 오늘을 저당 잡히고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자연을 그 종자돈처럼 사용하는데, 이렇게 가다간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 속에 만들어진 게 녹색당이라고 생각해요. 공명과 공생을 내세운 전략적 정당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이상적이고 몽상적인 사회운동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파국이 임박한 상황에선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이번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밀양 765㎸ 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이계삼 사무국장이 녹색당 비례대표(2번)로 출마했잖아요. 출마의 변을 보면 ‘밀양 투쟁하면서 정치를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며 국회 갈 때마다 느꼈던 비애감을 얘기했는데, 이계삼 선생님의 출마를 어떻게 보시는지.

 

“이계삼 선생님한테 큰 빚을 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밀양 투쟁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많이 빚진 느낌이죠. 출마를 고민 중이라고 들었을 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가장 컸어요. 출마의 변에도 밝혔지만 “저 놈 나중에 정치하려고 한다”는 얘기가 그들 입장에선 사실이 돼버리는 거니까. 그런 모욕과 조롱을 감당하실 수 있을까 걱정했던 거죠.

 

저는 이계삼 선생님이 없었으면 밀양 투쟁이 여기까지 왔을까, 이렇게 많은 연대와 지지를 받으면서 올 수 있었을까 하고 종종 생각해요. 밀양 할매들의 투쟁이 부족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운동의 증폭제로서 이계삼 선생님의 역할 때문이죠. 선생님이 맺어온 관계와 자원, 그리고 일상에서 보여준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징검다리 삼아 많은 이들이 밀양 투쟁에 합류했다고 봐요. 또 할매들의 성장에도 좋은 거름이 되었고요. 공간을 떠나지 않고 함께 울고 웃으며 투쟁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는데, 이계삼 선생님이 그 일상을 몇 년간 꾸준히, 할매들의 마음을 얻으면서 해온 걸 볼 때 정말 고맙죠. 밀양송전탑반대 투쟁에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이계삼 선생님께 빚진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지금 충북 옥천에서 산다고 들었어요. 수도권에서 옥천 지역으로 내려간 뭔가요?

 

“옥천에서 산 지 지금 딱 2년 됐어요. 인권활동을 하다가 치여서, 서른 살 기념으로 외국으로 도망을 갔어요. 아시아를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한국에 돌아왔는데, 풍광도 너무 갑갑하고 일상의 속도가 너무 빠른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나이 사십이 넘으면 탈 수도권해서 살자’ 생각했어요. 운동이 서울중심적이고, 국회중심적인 것도 싫었어요. 나는 인권운동을 하는데 왜 자꾸 법안싸움만 하고 있지? 회의감도 컸죠. 그래서 그 반대 입장에서 일상의 삶으로서의 인권운동을 꿈꿨는데, 그 즈음 만난 남편도 풀뿌리 운동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보니 지역, 풀뿌리, 비쥬류 공간에 대한 지향이 뚜렷하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접하면서 꿈이 현실이 됐어요.

 

서울이나 수도권에 산다는 건, 다른 지역들과 너무 불공평한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거더라고요. 스스로 필요한 양의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면서 ‘눈물을 타고 흐르는 전기’를 받아쓰는 건데, 이런 것들을 비판하는 우리가 계속 대도시, 수도권에서 삶을 영위하는 게 모순처럼 느껴졌어요. 막상 탈 수도권을 하려니까 망설여지는 문제들이 많았는데, 이때 아니면 정말 못가겠다 싶어 짐을 꾸렸죠. 옥천에 연고는 없어요. 다만 저희 삶의 거의 모든 관계와 자원이 서울에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너무 멀리 가긴 어려웠어요. 서울에서 너무 멀지 않고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은 거죠. 경부선 기차가 다니는데다, <옥천신문>이라는 오래된 풀뿌리 언론이 있어서 맨땅에 헤딩하진 않겠다 싶었죠.”

 

▶ 지팡이 짚고 배낭 매고 이 산 저 산 한두 시간씩 걸어 송전탑 공사 현장 근처로 가고 있는 밀양 할매.  대도시와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이분들의 '눈물을 타고 흐르는 전기'를 쓰고 있다.  ⓒ사진: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

 

- 서울과 옥천은 무엇이 다르던가요?

 

“처음 옥천에 내려왔을 때 풍경이 아직도 선한데, 비가 많이 오는 4월의 봄날이었어요. 밥집에 갔는데 연탄난로를 때는 거예요. 많은 곳들이 연탄을 쓰는데, 화려한 전원주택을 꿈꿨던 건 아니지만 이런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터라 한동안 마음이 우울했죠.(웃음) 살 집을 구하려고 찾는데 집이 없어요. 서울에선 돈이 없어서 집을 못 구하잖아요. 근데 여기는 전세든, 매매든 집이 없는 거예요. 부동산에 갔더니 “관 나오면 집 나온다”고, “여기는 사람이 죽어야 집이 나온다”고…. 도시에선 집이 투기 개념이잖아요. 옥천은 여전히 주거 공간으로서의 집, 대를 이어 살아가는 터전으로서의 집인 거예요. 비워두더라도 외지인들에겐 잘 팔지도 않고. 또 한 번 문화 충격을 받았죠.(웃음)”

 

- 서울에서 살다가 2년간 지방에서 살아보니까 어떠세요?

 

“솔직히 여러 갈래의 마음이 있긴 한데… 어쨌든 결론은 내려오길 잘했다 싶어요. 일상의 풍경이 달라요. 2년 사이 옥천에도 아파트 개발 열풍이 불어서 풍광이 변하고 있긴 한데, 그래도 늘 하늘과 산이 보이니까 숨통이 트여요. 늘상 서울을 오고가는데, 옥천역에 딱 내리는 순간 ‘아, 살 것 같다’는 묘한 해방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삶의 풍광이 사람을 압도한다는 걸 알게 됐죠. 텃밭 경작을 하니 땅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약간의 자급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묘한 자존감도 생기고. 동네 아줌마들이랑 술 마시는 재미도 쏠쏠하고.

 

여전히 남는 문제는 ‘생계’죠. 옥천 산다고 하지만 많은 시간을 서울에서 살아요. 지역에서 생계를 해결 못하니까 서울로, 수도권으로 돈 벌러 다니는 거죠. 우리 집 경제를 보면서 ‘지역에 왜 사람이 없는지’ 깊이 이해돼요. 지역 내 자급자족이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에요. 농촌은 점점 노령화되고 가계 소득이 급감하다보니 농사는 매력이 없고, 젊은 사람들은 바깥으로 돌 수밖에 없고, 인구가 적으니 투자나 인프라도 계속 늦어지고 문화적, 사회적 서비스도 적고, 그러다보니 다시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도시에서 돈을 쓰고…. 악순환인거죠. 예전에는 이런 걸 책으로 배웠는데 이제는 삶의 공간에서 느끼고 배워요.”

 

- ‘정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가능성을 전망하거나 기대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예전에는 여의도 정치를 바라보고 살았던 것 같아요. 인권 의제들은 국회에서 다뤄지니까. 기존에 해왔던 많은 운동들이 법으로 제도화되는 순간, 운동으로서 정체성이 사라지는 걸 보며 슬퍼했죠. 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논의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걸 보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운동이 아니라 법안을 놓고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정치가 참 싫었던 것 같아요.

 

옥천은 인구가 5만이거든요. 그러니까 정치가 잘 보여요. 반응도 즉각적이고. 예를 들면 옥천에는 가장 높은 행정책임자가 군수인데, 군수는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정치인예요. 100명 정도 모인다 싶으면 군수를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어요. 군의원은 점심시간 식당에 가면 옆자리에 앉아 밥 먹는 사람이고. 뭔가 지역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 지나가다 툭툭 던지죠. ‘그건 왜 그래요?’라는 질문이 가능한 물리적 크기죠.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활동가 유해정 씨.  ⓒ장서연 


또 지역 언론이 있다 보니 글을 게재하거나 의견을 내면 답이 바로바로 와요. 사안에 따라 변화의 속도는 다르지만,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공간과 여지가 확 열린 느낌이라고 할까? 소위 ‘생활정치’가 생긴 거죠. 수도권에 살 때는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옥천에 내려오니 ‘정치가 가능하겠다, 바꿀 수도 있겠다’ 싶은 거죠.

 

물론 지역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똘똘 뭉쳐있어서 저 같은 외지 것은 끼어주지도 않지만요, 정치를 대하는 심리적, 물리적 거리는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정치가 가능하려면 정치의 공간과 인구가 작을 필요가 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도시는 익명성에 기반한 정치잖아요. 지역은 ‘네가 누군지 안다’는 정치고. 물론 지역정치에서 다루기 쉽지 않은 의제들이 산적하죠. 예를 들면 성소수자 정치 같은 경우는 정말 옥천에서 진입 장벽이 만만치 않을 거예요.”

 

- 저는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있어서, 성소수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전국적인 정치적 연결망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도 ‘풀뿌리+인권’ 좌담회에 참여하면서 고민하게 됐는데요, 옥천에도 분명 성소수자가 있을 거잖아요. 하지만 지역통인 <옥천신문>에서조차 의제가 된 적이 없어요. 이 난감함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해봤는데, 저는 누군가 커밍아웃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누군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성소수자 의제는 매우 공허해요. 형식적이고 단선적인 측면에서 얘기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포기해야하는 것들, 직면하게 될 어려움들을 헤아릴 수조차 없겠죠. 그렇지만 드러내지 않으니까 이야기하기 더 어려운 주제가 되어버려서, 원(One) 플러스 원(one)으로 의제화시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 원(One) 플러스 원(one)이요?

 

“누군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가 갖고 있는 의제를 드러냈을 때, 그 존재와 그 의제를 지지하는 또 한 명이 있다면, 이를 드러낸 누군가가 굳건하게 서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죠. 저만해도 지역에서 칼럼도 쓰고 교육도 하지만, 그런 정체성보단 엄마들 사이에선 ‘수다 많은 누구 엄마’로 통해요. 제가 맨날 애친구들 엄마들한테 술 한번 먹자고 해서 ‘술 잘 먹는 엄마’ 정체성이 강한 거죠(웃음).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가 자기를 드러내는 원(One)이 된다면, 내가 그의 옆에 있는 플러스 원(one)이 돼서,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이 엄마들 커뮤니티와 엮어줄 수 있을 텐데 싶어요.

 

서로가 갖고 있는 관계와 자원을 활용한다면, 뭔가 낯설고 생소하고 불편한 사람이나 그런 의제도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으로 섞이고, 엮이고, 둥글게 모여 앉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지역에서 새로운 의제를 만든다고 했을 때, 계발하고 발굴할 문제가 아니라 그 의제를 품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싶은 거죠. 그래서 늘 드러냄을 통한 원(One) 플러스 원(one)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다녀요.”

 

- 그래서 저는 정당에서도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인 문화를 만드는 것이 시급한 일 같아요. 사실 지역이 중요하면서도 어렵죠. 지역 사회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할 수 없어 고립되거나, 수도권으로 나오거나, 그런 문제가 있죠.

 

“그렇죠. 옥천 토박이 분들이 그래요. 여기선 밥집 가서 절대 시댁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한참 얘기하다 뒤돌아보면 고모님이고 삼촌이고 조카고…. 한 치만 삐긋 해도 큰일 난다는 거죠(웃음). 옥천은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다 보니 식당 가서 박근혜 대통령 얘기를 안 해요. 어디서 얻어맞을지 모르죠. 그렇게 혈연, 지연, 학연으로 촘촘히 얽혀 살다보니 드러냄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이런 지역일수록 ‘정상’의 범주가 더욱 확고하고 폐쇄적이니까요.

 

또 물리적으로 대전이라는 도시와 매우 밀접해서, 많은 운동의 의제가 대도시로 빨려 들어가요. 지역의 독립적인 의제 설정이나 운동이 형성되기 어려운 거죠. 그러다보니 지역은 좀 더 보수화되고, 새롭고 낯선 운동의 가능성은 줄어드는 것 같아요. 정치의 가능성은 삶과 좀 더 밀접해서 가까운 느낌인데, 새로운 당사자 주체의 운동 가능성은 훨씬 제한적인 거죠. 하지만 일상에서 돌파구를 만들지 못한다면 ‘유령’처럼 자기 정체성을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이 계속될 거예요. 이런 풀리지 않는 고민을 하면서 지역에서 삶을 통해 인권운동을 하겠다는 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배우고 있네요. 그래도 밀양할매들의 말처럼 ‘우리가 물러서지 않는다면, 싸움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라는 믿음으로 살아야겠죠. 길은 누군가 만드는 것이니.”   ▣ 장서연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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