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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모델이 될 여자선배가 한 명도 없어요
[청년 여성의 일 이야기] IT업계 기획직군 3년차 지연

 

열정 페이, 무급 인턴, 삼포세대… ‘청년’에게 붙이는 이런저런 말들이 늘어나고 ‘청년’을 걱정하는 기사도 연일 쏟아진다. 그런데 온 대한민국이 ‘청년’에 대해 떠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청년이자 여성으로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올해 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들은 20-30대 여성 스무 명을 만나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 먹고 살기는 괜찮은지,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그려나가고 있는지 인터뷰했다. 지금까지 줄기차게 일하고 있지만 ‘성장’은커녕 ‘경력’도 쌓기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는 “할 말 진짜 많다”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활동가가 전한다. [기자의 말]


꼬맹이, 비타민…내가 남자였어도 이런 말을 들을까?

 

지연(30세)은 IT업계 기획직군에서 일한다. 생글생글 웃는 눈웃음과 소위 ‘여성스러운’ 외양을 가진 지연은 남초 직장에서 ‘동료’로 인정받기 위해 3년째 분투하고 있다. 사내 상하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일터에서 일하고 있지만, 또 다른 권력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회의 시간에 남자직원이 말하면 뻘소리를 해도 들으려는 시늉은 해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면 중간에 말을 끊어버리고 ‘기획자처럼 말해야지’ 라고 해요. 그런데 자기네들(남자직원들)은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요? ‘이거 진짜 X신 같애요’ 라는 식으로 말해요! 저에게 매사 ‘너는 잘 모르잖아’, ‘이거 진짜 알아요?’라고 하는데… 제가 신입도 아닌데, 여자니까, 자기들 보기에 프로페셔널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연이 일하는 업종은 젊다. 업종 자체의 역사도 젊고, 업계 사람들도 젊으며, 주 고객들도 그러하다. 거기에서 오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인터뷰했던 다른 여성노동자들처럼 그녀 역시 사회에서는 “남자인 것이 스펙”이라고 말한다. 주 고객 타겟층도 남자이며, 직장동료들도 대부분 남자인 일터에서 ‘남자만큼 할 줄 안다’는 것을 아무리 보여줘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비슷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내 능력을 쌓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친한 상사에게 사석에서 물었어요. 일단 무엇 무엇부터 익히라는 대답을 듣고 그대로 했어요. 업무 외 시간에 노력하면서요. 그리고 1년 후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전과 똑같은 대답이 왔어요. 이미 저는 그 사람이 말했던 것을 다 익혔는데, 지난 1년 동안 제가 아무 것도 안 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전과 똑같다고 여기거나. 그럴 때 모멸감 느끼죠. 프로가 아니라, 어리고 발랄한 여자애, 유쾌한 분위기 메이커 정도로 본 거죠. 그것을 다 알면서 모른 척 버티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그래서 지연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 내가 남자였어도 이런 말을 들었을까?

 

“미묘하게 저를 ‘여자 취급’해요. 진짜 미묘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전 회사에서 상사와 같이 퇴근하는데 ‘어, 나 지금 우리 꼬맹이랑 같이 나가는 길이야’ 라면서 통화하더군요.”

 

“하루 연차 썼다가 오면, 어제 제가 없어서 분위기가 칙칙했다고들 하더라구요. 제가 비타민이래요. 내가 남자였어도 같은 말을 들었으려나?”

 

▲  2015년 10월 23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말하기대회 ‘어디가서 말하겠어’   © 한국여성민우회

 

 

 

옷 잘 입으면 남직원은 고평가, 여직원은 꽃 평가

 

“엄청난 실력으로 찍어 누를 수준이 아니면 여자기획자들은 저와 비슷하게 무시당할 거예요. 털털하게 입고 다니면 좀 나아요. 그런데 저는 원피스 좋아하고 화장하고 머리하고 손톱 칠하고 다니니까, 보기에 그냥 ‘여자애니까’ 무시해도 된다고 여기는 거죠.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일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도 처음에 풀 메이크업하고 구두 신고 머리 세팅하고 다녔어요. 나중에 건강이 안 좋아져서 운동화에 안경 끼고 티셔츠에 후드티 입고 다니니까 ‘어, 이제 기획자 같네’ 라며 대하더라는 거예요.”

 

반대로 남자직원이 옷차림에 신경을 써서 잘 입고 다니면 평가가 매우 높아진다고 한다. 동료직원들에게 선망을 받고, 성과를 내면 ‘역시 센스 있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대충 차려 입고 다니지 않는 여자직원은 동료가 아니라 “더 꽃처럼 굴기를” 요구 받는다.

 

“업무에서는 무시하고, 제 의견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아요. 그 대신 업무가 아닌 모든 부분에서는 저에게 너무 친절하고 너무 봐주는 거죠.”

 

“정수기 물통을 갈고 있는데 ‘남자사원 많은데 왜 이걸 갈고 있어요? 불러다 시키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1년 8개월 동안 들으면서 혼자 물통을 갈았어요.”

 

‘꽃 취급’받으며 ‘꼬맹이’, ‘비타민’으로 불리던 지연은 이직을 하면서 성격을 바꾸었다고 했다. 이번 회사에서는 웃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말을 잘 걸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런 취급이 너무 불쾌하니까? 그리고 진짜 말이 많아요. 제가 뒤에서 몇 명이랑 사귀었다고 소문났는지 몰라요. ‘누구누구씨랑 뭐 있지 않아?’, ‘그래서 걔랑 사귀어?’ 물어보고… 어떤 남자직원에게 고백 받기도 했는데, 그때 웃겼던 것이 뭔 줄 알아요? ‘한 번도 저를 그렇게 (연애감정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라고 저에게 묻는 거예요. ‘네, 없는데요’ 하니까, 아 진짜 그런 적 없냐고 하는 거예요. 웃으며 말 걸었다고 (그런 식으로) 착각하는 거죠. 갑자기 새벽에 연락하지 않나…. 그런 일들이 있다 보니까 성격이 변했다고 하나? 이젠 남자직원이 사심 없이 잘 해줘도 경계하게 돼요. 그래서 이번 회사에서는 안 웃고 말도 안 해요. 여자직원이 있을 때만 웃어요.”

 

서른 살 여자, 저도 우리집 가장인걸요!

 

지연의 바람은 ‘여자에게도 가족임금을 달라’는 것이다. 직장에서 연봉이 공식적으로 공개되어 있지 않지만, 나이와 경력이 같아도 연봉에 성별 차이가 있다는 것은 모두들 대강 알고 있다고 한다.

 

“첫 회사에서 결혼한 남자직원들은 거의 다 외벌이였거든요. 어느 정도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여기서 일을 안 하겠지요. 그런데 저는 낮은 임금으로 들어왔어요. 다른 여자분들도 큰 돈 받고 일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 없어요.”

 

지연은 “나도 가장”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녀는 가족 생계의 6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함께 사는 어머니에게 매달 생활비를 드리고, 대학원 학자금 대출을 포함한 빚을 혼자 힘으로 갚아나가며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다. 직장까지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집도 지연이 대출받아 구했다. 저축은 전혀 할 수 없고 옷을 산 적도, 혼자 카페에 가본 적도 오래 되었다.

 

“구직할 때 가정 내 경제적 역할에 대한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무도 안 물어봐요. 그런데 이거 진짜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서른 살 남자에게는 ‘본인이 생계 책임 지냐?’고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한번도! 연봉협상 할 때 그 질문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아무도 내가, 서른의 여자가 우리 집 가계를 책임진다고 생각 안 해요.”

 

그래서 지연은 다시 같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말을 안 들었을까?
 

▲  여성은 남성 임금의 60%를 받는다. 고용형태를 고려하면, 남성정규직에 비해 여성비정규직은 불과 35.9%의 임금밖에 받지 못한다.  <출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선임위원>  ©한국여성민우회 

 

“연봉에 영향을 미친다면서 혼자 사는지, 부모님과 같이 사는지에 대한 질문은 들어본 적 있어요. ‘혼자 살면 집세 내야 하니까’ 정도로 생각하는 거죠. 제가 돈을 벌어서 부모한테 드려야 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못 하는 거죠. 난 지금 빚 갚고 엄마 빚도 갚아줘야 할 지도 모르는데? 내가 남자였으면 제 역할을 안 물어봤을까?”

 

“남자친구 있어요? 결혼계획 있어요? 이런 질문은 ‘너 곧 퇴사할 거니?’ 라는 질문이지, 남자직원에게 묻는 것처럼 ‘너 돈 모아야 되니?’ ‘지금보다 높은 연봉이 필요하니?’ 이런 뜻이 아닌 거죠. 남자는 결혼 자금이 필요한데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연봉이 자꾸 차이 나죠. 난 결혼할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 인생을 지킬 돈이 필요하다구!”

 

그렇게 말하는 지연에게 일의 의미는 명확하다.

 

“현재 비혼(非婚)이고 꽤 오랜 기간 앞으로도 비혼일, 가족의 생계를 상당 부분 책임지는 여자인 나에게 일이란? 이런 질문을 하면 ‘꼭 해야 되는 것’이죠. 설령 이게 재미가 없고 내 재능과 내가 배운 것들과 아무것도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를 채용한다면, 나는 무조건 할 거야.”

 

“결혼해도 일을 평생 계속할 거예요. 돈이 없으면, (남편에게) 맞아도 이혼을 못해요. 계속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해 있어야만 제 삶을 어떻게 가져갈 지 결정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이 업계에 결혼하고 살아남은 여자선배는 ‘없어’

 

그런데, 그녀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기혼의 여자선배를 아무도 만난 적이 없다.

 

“복지 같은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 곳이 아니라서, 애초에 육아휴직을 쓰는 게 불가능하구요. 말 그대로 그만둬야 해요. 나중에 재취업하려고 해도 경력 단절된 여자 기획자를 왜 쓰겠어요. 경력 안 끊긴 남자기획자가 널려있는데…. 취업이 거의 불가능해요.”

 

지연은 이러한 현실에서 심한 불안을 느낀다.

 

“제 남자친구 경력이 지금 9년차에요. 업계에 지인이 진짜 많아요. 남자친구에게 혹시 이 업계에 나보다 6살 이상 연상이고 롤모델로 삼을 만한 여자분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남자친구가 아는 사람 다 통틀어서 그런 기획자는 단 한 명이었어요. 결혼 안 하고 실력으로 밟고 올라간 분 한 명. 결혼한 여성기획자는 아무도 없었어요. 제 인생의 롤모델을 업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무척 불안한 일이에요. 이곳에 ‘유일한 천재’ 이런 거라도, 보여 주기 식으로 한 명 있는 거라도, 어쨌든 ‘내가 갈 수 있는 모습이 저기에 있구나’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랑 진짜 너무 달라요.”

 

지연은 10년 뒤의 자기 모습을 종종 생각한다. 그 모습이 어떤 건지 말해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정말… 그려지지가 않아요.” 그녀는 계속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업계에서 얼마나 일할 수 있을까? 나이 들면 이제 위로 올라가야 되는데, 올라가지 않으면 그만둬야 돼요. 내가…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를 팀장을 시키고, 피디를 시켜줄까? 이번 프로젝트가 초 대박을 친다 한들, 우리 팀장님 경력에야 크게 도움 되겠지만 저한테도 그럴까요? 저는 진짜 잘 모르겠어요.”  

 

지연과 같은 일을 하는, 실력으로 매우 유명한 여자분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분조차 팀장급이 아닌 단순한 팀원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 지연은 충격을 받았다.

 

“그 여자분은 물론 네임이 되니까 어디 취직은 되겠죠. 그런데 그분이 피디가 될까? 디렉터가 될까? 그래서, 내가 컨퍼런스에서 그분을 발표자로 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남편이 사장이고 아내가 부사장, 이사인 회사는 봤어요. 그게 전부죠, 결혼하고도 이 업계에서 살아남는 모습을 본 것은. 계속 성장할 업계 남자와 결혼해서 남편과 같이 창업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 그게… 너무… 너무… 어떻게 생각하면 되게 비참해요.”

 

지연의 외침 “왜 이렇게 날 무시하는 거야!”

 

결혼에 대해서도 그녀는 자기가 결혼을 하게 될 지 정말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엄마랑 그런 얘기를 하면 ‘결혼 어떻게 해, 내가 돈이 어딨어?’ (그러면 엄마는) ‘아니, 사람만 있으면 다하지 돈 없어서 결혼 못하냐?’ 이렇게 말하세요. 엄마 세대에서 여자들이 결혼할 때 조건이랑, 지금 세대에서 제 친구들이 결혼하는 조건이 다르잖아요. 제 친구들이 하는 말이 다 그거예요. ‘야, 누가 빚 있는 애랑 결혼해?’”

 

힘들고 피로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를 견디는 지연에게선 그럼에도 활기가 느껴졌다. 하루 네 시간의 통근, 커피 한 잔 마시기도 어려운 경제적 상황, 여성기획자이자 여성 가장으로서 받는 스트레스, 업계 내 여성 역할모델이 없는 불안함. 그 속에서도 그녀는 자기 힘으로 해외시장에서 “초 대박”을 내겠다고 장난스러운 어투로 강조했다.

 

인터뷰 도중,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는 동료와 상사들을 향해 “왜 이렇게 날 무시하는 거야~? 너 얼마나 잘되는지 내가 두고 볼 꺼야~, 내가 너보다 성공한다!” 라고 외쳤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 후일담이 있다. 한 달 뒤 지연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일본의 동종업계 취직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녀의 미래에 행운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홍문보미(이서)

 

※ 본 연재는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womenlink1987.tistory.com)와 오마이뉴스(ohmynews.com)에 공동 게재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는 한국여성민우회 홍문보미(이서) 활동가입니다. 11월 둘째주 발간 예정인, 민우회가 만난 20-30대 여성 스무 명의 인터뷰를 담은 소책자에는 기사보다 더 많은 내용이 담길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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