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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생존과 구원에 관한 또 하나의 이야기
제임스 그레이 감독, 마리옹 꼬띠야르 주연 영화 <이민자> 

 

※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1921년 뉴욕의 엘리스 섬. 영화의 주인공 에바(마리옹 꼬띠야르)는 고국 폴란드에서 전쟁을 피해 대서양을 건넌다. 그녀는 동생 마그다와 함께할 뉴욕 생활에 대한 꿈으로 부풀어있지만, 동생은 폐병 의심으로 치료소에 격리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현지 관리인은 자매에게 유일한 믿을 곳이었던 이모 가족의 주소가 유효하지 않다는 소식을 전하고, 에바는 다시 폴란드로 돌려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  제임스 그레이 감독, 마리옹 꼬띠야르 주연 영화 <이민자> 
 

안개 자욱한 섬, 자유의 여신상의 뒷모습으로 시작하는 <이민자>의 첫 장면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상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카메라는 자유의 여신상에서 줌아웃해 뉴욕으로 들어오는 배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모습을 비춘다. 그는 뉴욕 뒷골목의 3류 클럽에 데려갈 여자를 물색하기 위해 나온 브루노(호아킨 피닉스)다. 브루노는 여행자 구호협회 소속으로 신분을 숨긴 채 자신이 만든 덫에 걸려든 에바를 구한다.

 

브루노와의 만남은 에바가 쥔 생존의 끈을 엉키게 하고, 그녀가 엘리스 섬에 발을 딛자마자 마주한 불행은 점진적으로 그 크기를 키워간다.

 

이민자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영화 <이민자>는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에바와 그에게 성판매를 권하는 입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브루노,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을 만들어내는 에밀, 세 사람의 관계 역동 안에서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드러낸다.

 

클럽 밴디츠 루스트의 무대에 선 에바는 미국에서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그녀의 생존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브루노를 따라 온 첫날 밤 송곳을 쥐고 잠이 드는 장면이나 자신의 돈을 탐하려는 동료에게 칼을 드는 장면,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술을 칠하는 장면은 에바에게 생존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보여준다.
 

▲  <이민자>는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방인의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드러낸다.   
 

브루노는 마그다의 치료비로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녀를 치료소에서 빼내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정보와 인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에바를 자신의 옆에 묶어둔다.

 

어느 날 밤 에바가 자신에게 키스하려는 브루노를 거절하자 그는 ‘부끄러운 줄 알라’며 에바를 비난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동료의 돈을 훔친 에바의 행동을 탓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에바에게 도움을 주었음에도 거절당한 것에 대한 분노다. 브루노는 자신이 그녀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권력자의 위치를 점하고자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분노를 표출하고 겁을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자 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좌절

 

에바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것에 비해 그녀의 감정 표현은 외부보다 내부로 향한다. 에바는 커다란 행동의 변화를 드러내거나 대사를 장황하게 읊는 캐릭터가 아니기에 표정의 작은 변화와 분위기 등으로 그녀의 감정을 해석하게 된다. 따라서 에바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장면들에 더욱 무게를 두게 된다.

 

취한 상태에서 브루노의 설득으로 첫 성판매를 한 후 에바는 “당신을 증오해요. 나 자신도 증오해요”라고 말한다. 증오를 드러내는 장면 이후 브루노에 대한 분노나 절망에 대항하는 감정이 부각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지만, 그 이후에도 큰 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의 태도 변화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 같은 삶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변화를 꾀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머무는 에바의 포지션이 답답한 마음을 남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제임스 그레이 감독, 마리옹 꼬띠야르 주연 영화 <이민자> 
 

에바는 어렵사리 찾아간 이모의 집에서 따뜻한 안정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하룻밤의 온기에 불과하다. 배 안에서 정숙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혐의도, 그 혐의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에바를 불법거주자로 신고하는 이모부의 행동도, ‘자유의 여신’ 분장을 하고 선 클럽 무대에서 남자 소비자들로부터 당하는 모욕도, 에바가 여성의 몸을 가졌기에 겪는 낙인의 효과다.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으로 향한 에바의 희망은 ‘자유의 여신’이 된 몸으로 모욕의 대상밖에는 될 수 없는 현실을 통해 바닥까지 끌어내려지고 만다.

 

이방인의 정착, 신기루 같은 욕망

 

브루노의 친척으로 등장하는 에밀(제레미 레너)은 브루노와 마찬가지로 이민자의 배경을 가졌다. 하지만 브루노가 온 힘을 다해 정착하려고 애쓰는 것과 달리 에밀은 집시같이 떠돌면서 산다. 브루노와 에밀의 차이점이나 두 사람이 겪은 갈등의 역사와 맥락은 촘촘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에밀 캐릭터는 독자적으로 자기 몫을 한다기보다 에바에 대한 브루노의 집착에 가속도를 붙이며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다소 도구적인 역할을 맡는다.

 

엘리스 섬에서 펼쳐진 공연에서 에밀은 공중부양 마술을 선보이고는, 믿음을 잃지 않고 희망을 지킨다면 아메리칸 드림이 꼭 찾아올 것이라고 연설한다. 에바는 에밀에게 브루노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낀다. 이 감정은 현실에 맞닥뜨리며 좌절된 아메리칸 드림을 다시 믿어보고 싶다는 에바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것이 신기루에 불과할지라도.

 

에바를 덫에 빠트린 뒤 구원자를 자처한 ‘나쁜 남자’ 브루노도, 에바의 상황에 공감하며 ‘행복할 권리’를 이야기하던 에밀도, 결과적으로는 에바의 근처에 머물며 그녀의 삶을 점점 더 파국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구원자를 자처한 두 남자 때문에 에바는 결국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된다. 남자들 때문에 꼬인 운명의 끈을 푸는 것은 에바 자신이다. 그녀는 결국 이모를 다시 찾아가 동생을 구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고, 스스로의 의지와 행동으로 동생과 자신을 구한다.
 

▲ <이민자>는 자유의 여신상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희망과 좌절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나쁜 사랑이야기’ 재탕에 그치지 않는 이유

 

브루노는 에바의 동생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치료소에서 에바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겪은 곤경들이 자신이 기획한 바였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에바에게 반했지만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며, 스스로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브루노를 때리면서도 그의 몸 위로 쓰러져 내리며 그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에바의 응답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의 증세 같기도 하고, 이방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불사해야 한다는 브루노의 삶의 태도에 대한 불가피한 이해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가 브루노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결말은 ‘악하지만 순정적인’ 남자 캐릭터의 비뚤어진 욕망과, 그 때문에 희생했음에도 결국 용서하고 떠나는 여자라는, 귀가 따갑게 듣고 보았던 전형적인 캐릭터와 이야기의 재활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이민자>의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 이야기가 나쁜 사랑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이민자의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밀고나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형성이 극대화된 결말은 영화의 중량감을 담아내기에 빈약한 플롯에 대한 비판이 들게 하는 지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에바가 여동생과 함께 보트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과 브루노가 치료소의 문 바깥으로 나가는 모습을 한 프레임에 담는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각자의 삶으로 향하지만, 관객의 눈에는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삶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질곡이 이어질 것이라는 암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결말이 눈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것을 보게 했을 마지막 장면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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