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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노력해도 난 한국인이 아니었다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8)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보내는 편지②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친구들의 보살핌 속에 한국의 문화를 배우다
 

▲  1996년 한국어를 배우던 때. 필봉 수련원을 방문한 이후 남원 근처의 한 산에 올라서. 왼쪽에서 네번째가 필자.   ©지은경 
 

한국에서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외국인 여성들과는 확연히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를 강조하는 한국인들 덕분에 우리는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쳐주고자 하는 친절한 한국인들 덕분에 얻은 것도 많았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려는 나의 끝없는 질문에 끈기 있게 대답해주었고, 아무리 가도 계속 가고 싶어지는 노래방에도 함께 가주었다.

 

한국친구들 덕분에 한국문화, 그 중에서도 내가 관심이 많았던 ‘전통’ 문화를 배울 기회가 많았다. 죽염을 만들고 한옥을 짓는 공동체에 나를 초대해주어 한 달 가량 머문 적도 있었고, 전통문화 수업을 소개해 준 친구도 있었으며, 겨울에 태백산에서 눈썰매를 태워준 친구도 있었다. 지리산에서 일출을 보았고, 남원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전라도 시골에서 풍물도 배웠다. 미국에 가져가라고 비싸고 귀한 야생인삼주를 선물 받은 적도 있다. 절에서 머물며 명상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관대함과 포용이 담긴,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유,무형의 선물을 받았다. 너무나 좋았고 감사했던 마음과 더불어 이 선물들을 언제나 기억할 것이다. 이곳에서 몇 년간 우정을 쌓은 친구들과는 평생 친구가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일부이자 가족이라고 믿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든 인맥 덕분에 언제든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네트워크를 어렵지 않게 형성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한국에 대한 나의 사랑과 열정을 좋게 봐준 많은 친구들이 나를 정말 잘 보살펴 준 것이다.

 

한국에서 ‘아줌마’가 된다는 것

 

하지만 한국인이 된다는 것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내 한국어 실력이 늘면서 한국 사회에 묻혀 어울리는 능력도 늘었다. 가끔은 유창한 한국말로 나의 미국 ‘출신 성분’을 속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언어장애가 좀 있는 사람이거나 조선족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잘 섞여 어울리는 능력은 축복이면서도 저주였다.

 

본격적인 저주는 30대 중반에 들어서고 공식적으로 ‘아줌마’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한국 여성주의자들이 얘기했듯이, 한국에서 아줌마가 된다는 것은 특정한 공간을 차지하게 됨과 동시에 무성애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매일 나의 아줌마스러운 외형과 간혹 저지르는 말실수 혹은 문화 차이로 인한 실수가 합쳐져, 못 참겠다는 눈빛이나 한심하다는 눈빛을 받기도 했고 화를 내는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나는 아줌마처럼 보였지만 아줌마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키는 퍼즐 같은 존재였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특권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나의 소속에 대해 인정해 준다는 점이었다. 나는 한국사람이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수록 나의 소속에 대한 의문은 커졌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순히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을 뿐, 문화적으로 다르게 양육되었기 때문에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노력을 계속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나는 한국이라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 얼마나 충성하는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상(象)은 모두가 달랐기 때문에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어떤 이에게는 한국의 정체성이 일본을 반대하는 것을 의미했고, 다른 이에게는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었고, 또다른 사람에게는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에게 한국은 점점 더 강력하고 힘센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고, 다른 이에게 한국스럽다는 것은 한국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한국의 전통이란 또 무엇인가? 남녀차별? 나이차별? 기독교를 믿는 것? 아니면 불교로 회귀하는 것? 혹은 샤머니즘으로?

 

어떤 한국계 미국인 친구가 말했듯이, 한국사람들은 우리를 예전에 아무 것도 쓰인 게 없거나 별로 중요한 얘기가 적혀 있지 않은, 내용 없는 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한국인들은 마치 백지위임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 책에 원하는 걸 무엇이든 쓸 수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쓰인 이야기들을 선택해서도, 반박해서도, 거부해서도 안 되었다. 처음엔 감사히 여겼다가, 혼란스러웠다가, 나에게 가르치는 수많은 (게다가 종종 상충하는) 것들 때문에 나중에는 화가 났다. 하지만 거기에 반발을 했다가 소속감을 잃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웠다.

 

내가 필요에 따라 한국어에서 영어로 쉽게 언어를 바꿀 수 있고, 한국인에서 미국인으로 쉽게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불편해했다. 나라는 사람은 예측이 어려웠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서 돈도 쓸 줄 알아야 하는 사회에서, 술값이나 음식값을 멋지게 낼 수 없는 가난한 대학원생은 특별히 쓸모가 있지도 않았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다. 나는 더 이상 인기가 없었고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한국인과 미국인, 두 정체성의 경계에서

 

십 년 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가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친한 친구가 내게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을 향한 분노를 내려놓고 내 안의 무언가와 화해해보라고 권했다. 친구는 “미국을 증오한다는 건 너 자신의 일부 또한 증오한다는 뜻”이라고 현명하게 조언해주었다.

 

▲  2014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록콘서트에서 친구와 함께.   © 지은경 
 

미국 대학원에서 한국을 학문적인 시각으로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한국에서의 나의 경험을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렌즈를 통해 재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가질 수 없던 시각이었다. 게다가 나는 미국을 어른으로서 재발견하고 역시 학문을 통해 새로 배우게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미국에서 흥미로운 일이 많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인종차별주의자들도 많지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노력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사는 과정에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국과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에도 도움이 되었다. 미국은 나에게 안 좋은 일들을 저지르기도 했고 부정적인 무언가를 상징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곳은 나의 집이었다. 마침내 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럼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양쪽 세상을 모두 포용하게 되었다.

 

내가 나의 ‘미국인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다.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고 적응할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사실은 기본적으로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길 바랬다. 어떤 한국인들은 불쾌해했다. 한국인 정체성보다 미국인 정체성을 강조하면 그들은 내가 한국을 배신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나 자신이나 남들에게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내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한국인임을 부정하는 것이냐’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마흔이 넘었고 싱글이었지만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한국에 올 때마다 홍대에 있는 카페와 바에 들리곤 했고, 33세 이상 입장 불가라는 표시는 무시하고 클럽에 들어가 춤을 추곤 했다. 내가 나이 많고 뚱뚱한 여성, 이상적인 한국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여행을 계속했고 연애도 했다. 나이에 안 맞는 옷을 입었다. 가끔 말썽을 부리기도 했다. 상점에서 나를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직원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변종이었다. 내가 내 안의 상충하는 모습에 대해 불편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살았다. 나는 완전히 한국인도 완전히 미국인도 아니게 되었다. 두 정체성과 두 세계의 경계에서 살게 되었다.

 

▲  1996년 첫번째 제주여행 이후, 2011년에 다시 찾은 제주, 우도.    © 지은경 
 

한국인들이 정체성의 차이를 감싸 안기를

 

지난 십 년간, 이제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되었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한국은 다문화사회가 되었다. 서양인이나 아시아계 한국인, 적은 수이지만 점점 늘어가고 있는 새터민들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부당하지만 여전히 영어는 중요하고, 잘 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젊은 세대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마저 보인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주요한 국가로 부상했다. 이런 다양한 변화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헷갈리곤 한다.

 

나는 언제나 한국을 사랑할 것이다. 한국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알아가면서 사랑도 함께 커가고 있다. 언젠가는 한국인들이 지금처럼 경직되어 있지 않고 젠더, 나이, 섹슈얼리티 같은 정체성의 차이를 감싸 안기를 바란다. 단지 정부가 그러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동시에 아이를 갖고 비슷한 수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우리는 다 다르고 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속도도 다 다르다. 비슷비슷한 작은 상자에 우리를 다 우겨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경계에 서 있는, 그래서 어디에도 잘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지난 수년 간의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모든 한국인들을 위한 더 좋은 나라로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번역: 권이은정]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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