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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식 성교육의 초라한 민낯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11. 성교육도 패턴교육?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소중해요, 안돼요’ 버전, 그 다음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던 한국인이 자동차 사고를 당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한국인은 피를 흘리며 차 안에 갇혀 있었다. 구급대원들이 이 사람을 꺼내주면서 상태를 정확히 알기 위해, “How are you?”라고 질문하자 그 한국인은 피를 흘리며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했다는, 웃자니 너무나 짠한 이야기 말이다. 한국의 암기식 영어교육의 폐해로 회자되던 이 농담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를 차용해서 엄마들끼리 하는 새로운 농담을 접했다. 작년에 초등학생을 키우는 엄마들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 성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 끝에 엄마들이 한국 성교육은 위 콩트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린이집에서의 여러 성추행 사건들도 뉴스에 많이 나와 요즘 부모들은 성폭력 예방 동화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네 몸은 소중하니까, 누가 만지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해’한다. 어린이집에서도 이런 동화를 읽어주는 것으로 성교육을 하기도 하고, 유사한 내용의 연극들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소중해요, 안돼요’는 첫 성교육인 셈이다. 그러나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근데 그 다음은 뭐 해야 해? 모르겠어. 정보도 없고, 그리고 학교에서도 그냥 똑같이 또 그렇게 배워오는 것 같던데?”, “소중해요, 안돼요 말고 더 말하려면 정말 복잡하지 않아? 초등학생인데 섹스 이런 것 다 얘기해도 돼?”, “뭐 좀 더 얘기한다 해도 결국 ‘소중해요, 안돼요’로 끝나는 건 똑같지 않아? 어린이집이나 초딩이나 하물며 중고딩도 그러던데”, “그냥 외우라는 거야. 일단 ‘소중해요, 안돼욧!’ 이렇게”, “그래도 안돼요 할 수 있는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그런데 맨날 이것만 듣다보니 뭔가 김빠지지 않아?”, “패턴교육이네 패턴. 하와유, 화인 땡큐 앤드 유.” 모두가 ‘하하하하하’.

 

나도 함께 수다에 푹 빠져 한참을 웃었다. 우리는 ‘소중해요, 안돼요’를 다소 우스운 포즈를 취하며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다. 서로들 깔깔 웃으면서 그러나 아쉬운 감정인지 탄식인지 모를 오묘한 감정들을 가득 공유했다. 패턴교육 같다는 말에 성교육 현실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넘쳤다.

 

그 이후로도 여러 지인들에게 이에 대해 말하면 하나같이 박수치며, 패턴교육 맞다며 맞장구를 친다. 더 나아가 이를 적극적으로 암기한 아이들의 지나친 응용으로 인한 부모들의 고충을 쏟아내기도 한다. 장난꾸러기 초딩들의 오버스런 응용력들은 읊지 않아도 눈 보듯 뻔하다. 엄마들은 애들이 시도 때도 없이 ‘소중해요, 안돼욧!’ 하다가 막상 정말 곤란한 상황에서는 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다 사춘기 시작되고, 중고등생 되면 자연스런 성에 대해 가르치라고 하던데 그럼 그때는 갑자기 ‘자연스러워요, 해요!’ 이렇게 가르치라는 거냐며 농을 섞어 반문하기도 했다.

 

나는 “How are you” 콩트가 한국식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풍자했듯 “소중해요, 안돼요” 버전이 바로 현재 한국 성교육의 민낯이라고 생각한다. 이 교육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How are you?에 대한 대답으로 “I’m fine, thank you. and you?”는 틀린 대답이 아니다. 문제는 이 문장만 대답인 듯 세뇌된 현실이다. 의사소통에 정답이란 게 어디 있을까? 하나의 일례이거나 최소한의 상황설정이 마치 모든 것의 해답인 것 마냥 여겨지는 것이 단순암기교육의 진짜 폐해 아닐까. 암기도 삶에 득은 되지. 그러나 암기한 그것만이 전체 혹은 결론이라고 여겨지게 하는 암기란 대체 뭘까?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때 다양한 맥락을 삭제하고 ‘오로지 기억하게 한다’는 고집스런 결과의 초라함, 일단 결론부터 기억하면 된다고 강조한 효과의 우스꽝스러움. 성교육도 패턴교육이라는 엄마들의 말에서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맥락은 사장되고 용어만 남는 성교육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엄마랑 시소를 타다 엄마가 발을 조금 세게 굴러, 쿵하고 내려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은 한 여자아이가 엄마에게 “엄마~아! 내 대음순이 아프잖아.” 이랬단다. 본말전도, 사장된 맥락, 이런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성기에 대한 정확한 명칭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은 요새 부모들에겐 상식처럼 되었다. 성기 자체를 언급하지 못하게 하거나 성적인 모든 이야기들을 쉬쉬하던 우리세대의 부모들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발전이다. 그러나 가끔 위와 같은 억지스런 상황을 접하면 웃고 넘어가야 하는 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될 때가 있다.

 

정확한 성기 명칭에 대한 강조는 그 이름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전 국민이 무슨 해부학 박사학위 딸 일 있나. 성을 금기시하는 세태, 그러다보니 성기에 대한 비하 표현이 너무 많았다. 말이나 단어, 표현은 인식을 대변한다. 성기에 대한 비하 표현은 하물며 어떤 인격을 무시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는 한다.

 

성기에 대한 정확한 명칭을 알자는 것은, ‘성’이라는 이 한 단어 안에 다 들러붙을 법한 여러 편견을 최대한 걷어내고 중립적인 언어를 채택함으로써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 등 모든 성적 사안의 용어들을 논의할 기본 무대를 건립하기 위함이다. 성에 대해 제대로 논의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기, 여기서부터 시작해 모든 인간의 성적 생활과 관계, 사회 제도와 인식까지 터놓고 논의할 수 있는 장을 열고자 한다면 관련 용어에 대한 기초적인 문제제기는 필수다.

 

교육이 요구되었던 맥락이 어느 순간 사장되고 나서 남은 것은 해부학적 명칭을 제대로 외워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다. 아이들이 성기를 잘못된 명칭으로 말할 때마다 부모나 선생님들이 정정해주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올바른 지적일 경우도 많지만 앞선 사례처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접할 때가 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자지, 자지’ 이렇게 단어만 반복하면서 한 아이를 놀리고 있었다. 못하게 해야겠다 생각하고 다가가던 차에 이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또 다른 어른이 지적한다. “얘들아, 자지가 뭐니 음경이라고 해야지.” 엥? 이건 아니지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지적할 것은 누군가를 놀렸다는 사실이다. 그 상황에서 자지를 음경이라고 바꿔 말한들 놀림당한 아이의 상처가 줄어들까.
 

▲  [학교]    © 박상은의 일러트스 
 

“소중해요 안돼요.” 이 설정은 성인들에 의한 아동성추행 및 성폭행 사건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자신을 방어할 지침을 알려주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그런 행위를 하는 어른들이 문제이지만 사건의 심각성 때문에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방어책을 알려줄 시대적 요구가 있었다. 성적인 행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어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유.아동기 아이들에게, 불쾌한 접근에는 아무리 어른이어도 싫다고 말해도 된다고 전해주자 했던 것이다. 네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나쁜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동을 대상으로 한 만큼 극히 단순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초등학생에게, 또 중고등학생에게는 그 시기에 맞는 자기 몸에 대한 인식과 다른 몸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보다 나아간 설정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인이 될 때까지도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소중해요 안돼요’ 버전만 되풀이하고 있다니.

 

나는 이 교육이 쓸모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걸 외우고 이대로만 해야 한다고 강요하면 어느 순간 이 교육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가해의 시선으로도 치환되어 버릴 수 있다. 이것이 특히나 성교육의 마지막이자 결론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 왜 ‘안돼’라고 말 안했니.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는데.” 이렇게 강요한 적 없다고요? ‘소중해요, 안돼요’ 외에 다른 정보를 주지 않는다면, 소통의 다른 설정들을 상상해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강요가 아니고 무엇일까.

 

나는 여전히 이 교육은 좋은 성교육의 기본 포맷이라고 생각한다. 단 우리가 알고 있는 정형화된 설정을 이렇게 저렇게 변주하고, 시점을 바꿀 수 있다면 말이다. 어른 가해자와 완전 무력한 아이라는 설정을 다양한 버전으로 바꾸면, 여러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기본 플롯이 될 수 있다. 이건 대화와 고민을 위한 최초 설정일 뿐이다. 아이에게 ‘안돼요’라는 말을 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입장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보게 하기. ‘안돼요’와 ‘돼요’의 경계는 어떻게 정할 것인지 스스로의 성적 한계를 생각해보게 하기. 이렇게 말이다.

 

성교육은 소통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성교육은 성적 지식들을 배우고 암기해야 하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언어처럼 소통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소통이 목적이라면 표현해야 하는 언어의 암기와 함께 그 언어가 사용되는 다양한 맥락에 충실히 빠져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도, 또 그 다음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으니까.

 

실제 현장의 성교육 활동가들은 얼마 주어지지도 않은 성교육 시수 안에서 이 맥락을 살려주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위와 같은 다양한 설정들을 아이들에게 제공하며 자신의 성적 한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그들에게 더 많은 교육 시수와 제대로 된 교육 자료를 제공하고 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는커녕 성교육을 1970년대로 후퇴시킬 만한 지침들을 내렸다. 성을 이성애적 가족 안에서만 독해하려는 고집스러움뿐만 아니라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식의 구시대적 인식들과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대안들까지, 물론 현재 청소년들의 생활방식이나 가치관에 대한 배려도 없다.

 

정부는 특히 이번 성교육 지침을 통해 동성애에 관한 언급을 피하라고 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기대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교육에 있어서 맥락을 사고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태도여서 더욱 문제적이다.

 

던져주는 대답만 기억하면서, 그저 남녀라는 성역할에 충실하면서, 이성애 가족을 꾸린 후에 국가의 인구수를 늘려 줄 출산만을 위한 성교육. 그러고도 I’m fine, thank you. and you해야 할 우스운 꼴로 내몰리게 생겼다. 성적 관계를 의사소통의 한 장면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의 언어적 기능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상상력을 더 많이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 안에서 나와 타인의 ‘성’에 대해 숙고할 수 있을 때 성교육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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