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가짜 빛을 따라가는 환희의 질주
영화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 영화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포스터 
 

종이로 빚어진 달은 빛을 발하지 않는다. 진짜 달과 똑같은 모양으로 오려져 하늘에 붙어있을 지라도 그것은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손을 뻗어 직접 그 허상을 그려볼 수 있다면, ‘종이 달’이 사라지기 전까지 한동안 바라보며 빛에 취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시작해 볼만 하지 않을까.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미야자와 리에(우메자와 리카 역) 주연의 영화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은 버블시대의 호황이 가라앉은 1996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가정주부이면서 은행의 계약 사원으로 일하던 리카는 우량 고객인 노인을 방문했다가 그의 대학생 손자인 고타(이케마츠 소스케)를 마주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려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리카는 그에게 빚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노인의 예금을 착복해 고타에게 건넨다. 이는 1억 엔이라는 거액 횡령의 단초가 된다.

 

자유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일탈의 경험

 

이 이야기는 얼핏 들으면 ‘중년의 여자가 젊은 남자에게 홀려서 고액 횡령을 하고, 윤리적 타락에 대한 처벌로 도망자 신세가 된다’는, 어디선가 본 듯한 상투적인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러나 ‘젊은 남자’ 고타는 범죄의 계기일 뿐 동기는 되지 못한다. 지켜야 할 선 안에 머물며 비교적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리카에게 고타와의 관계나 돈을 착복하는 행위는 선을 넘어 일탈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만족감을 얻기 위한 도구의 성격을 가진다. 진정한 일탈은 허용 가능한 행동 범위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낯선 경험은 리카에게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는 듯한 긴장감과 동시에 자유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이 아이는 내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란 걸 어떤 식으로 깨닫게 해줄까, 리카는 생각했다. 불안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고타와 마주 서 있자, 마치 리카는 자신이 이 아이에게 간단히 뭔가를 빼앗을 여자처럼 느껴졌다. 자존심이며 자신감이며 허세며, 그런 것을 한순간에 빼앗을 것처럼.’ -원작소설 <종이 달> 중

 

종이 달의 빛을 따라가는 욕망과 의지

 

아내의 직장생활을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용돈벌이 정도로 취급하는 가부장적인 남편과의 관계, 큰 문제는 없지만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리카는 일탈을 결정하고, 감행하고, 지속한다.  

 

           ▲   영화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영화의 후반부에 횡령이 발각된 후 동료 사원 스미와 대화하던 중, 리카는 동이 틀 무렵에야 집으로 향하던 어느 날 지하철에서 보았던 종이 달을 회상한다. 리카는 손을 뻗어 흐릿한 초승달을 슥 지우는데, 그녀의 얼굴은 언젠가 지워져버릴 가짜 달의 빛을 따라가 보겠다는 욕망과 의지로 반짝인다. 리카는 몸을 채워 어떤 모양으로든 변화 가능한 초승달처럼 어떤 모습으로든 변화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운 감각에 쾌락을 느낀다.

 

‘역의 플랫폼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카는 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파르스름한 하늘에 하얀 달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에 가까웠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원작 소설 <종이 달> 중  

 

사건의 동기를 묻는 두 가지 방식

 

영화 <종이 달>은 가쿠다 미쓰요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둘은 사뭇 다르다. 소설은 학창시절 친구, 첫사랑 등 과거에 리카를 알던 인물들이 각각 일인칭 시점으로 리카의 과거를 기억하며, 독자는 이를 종합해 횡령 사건을 일으킨 리카의 동기를 짐작하게 된다. 반면 영화는 주변인들의 서술을 배제한 채 리카의 단독적인 시점으로 진행되며, 사건에 초점을 맞춰 리카의 행적을 시간 순으로 쫓아간다.

 

소설이 주변인들의 관계 안팎에서 리카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며 그녀의 감정 변화와 범행 동기에 입체적으로 접근한다면, 영화는 보다 직설적인 방식으로 ‘왜’라는 질문에 접근한다. 

 

           ▲    영화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영화 <종이 달>은 리카의 학교에서 진행되었던 기부 프로그램에 대한 플래시백을 통해 그녀의 과거를 호출한다. 어려움에 처한 타국의 아이들을 돕는 일대일 기부에 대한 친구들의 관심이 처음보다 뜸해지자, 리카는 아버지의 지갑에서 5만엔을 꺼내 기부함에 넣는다. 기부금이 학생이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금액을 상회하자 학교 측에서는 기부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리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기쁘다 배웠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동료 스미가 리카에게 왜 횡령을 했냐고 묻는 장면에서, 영화는 성인 리카와 어린 리카, 스미와 기부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수녀의 말을 교차 편집하며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잇는다. 과거의 리카가 “아이들이 기뻐하는 것을 생각하면 행복해요.”라고 말하면 뒤이어 현재의 스미가 “행복해서 횡령한 건가요?”라고 묻는 식이다. 시간을 초월해 말과 말을 잇는 편집은 영화의 긴장감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삶을 손 위에 올려놓는 행위의 쾌락

 

영화가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교차로 보여주는 것은 리카가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고 수녀와 다시 대립하는 순간을 통해, 현재의 횡령이 과거의 기부 행위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횡령에 대한 정당성을 마련하는 착시 효과를 드러낸다.

 

학생일 때 어려운 나라의 아이에게 기부를 한 것과, 성인이 되어 고타에게 돈을 건넨 것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으로 누군가의 삶을 구제할 수 있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삐 풀린 말처럼 횡령을 멈추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삶을 구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타인의 삶도, 자신의 삶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다는 쾌락을 추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존재감을 얻고자 한 것이다.  

 

▲   리카의 본능적인 질주는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남긴다.  ©영화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횡령 사실이 발각된 후 리카는 의자를 들어 은행 사무실의 유리창을 깨고 뛰어 내려 도망쳐 간다. 리카가 질주하는 장면 사이사이 일하는 남편의 모습이, 다른 여자와 함께 걸어가는 고타의 모습이, 우량 고객인 노인의 모습이 흘러간다. 그들의 모습을 흘려보내며 환희에 찬 표정으로 달려가는 리카의 본능적인 질주는 일탈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남긴다. 인간은 무엇으로 자유로워지는가. 어떤 행복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허상인가. 나는 과연 ‘종이 달’의 빛을 따라갈 수 있을까.  케이 
 

여성주의 저널 일다      |     영문 사이트        |           일다 트위터     |           일다 페이스북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