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임금차별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5) 한국시민이 된 베트남여성①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 지원을 받습니다.

 

▲ 요리교실에서 외국친구들과 함께. 우측에서 두번째가 필자.  ©웬티현 

 

 

“넌 비자가 뭐야?”

“난 F6”

“난 F5”

“난 E9”

 

한국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말이지만 외국인끼리는 통한다. F6는 결혼이민자 비자, F5는 영주권 비자, 그리고 E9는 외국인근로자 비자다. 내가 만나는 외국인 중에서만이 아니라 아마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중에서 이 세 종류의 비자가 가장 많을 것이다.

 

나는 이제 비자 종류를 말할 필요가 없다. 난 대한민국 사람이니까. E9 비자로 처음 한국에 왔을 때가 어제만 같은데 벌써 15년이 지났다.

 

겁도 없이 돈 벌러 온 낯선 땅, 한국

 

베트남의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하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다. 연애도 일찍 시작한 나에게 있어서 대학입시 시험에 떨어졌다는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미래에 대한 특별한 계획 없이 막연히 지내던 중, 부모님 친구 분이 한국에 가게 해줄 테니 가서 돈을 벌고 부모님을 도와드리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결혼하기로 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힘겹게 우리 남매를 키워준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난 21살에 겁도 없이 돈 벌러 한국으로 떠났다.

 

인천국제공항에 내리는 순간은 마치 냉장고에 들어간 것처럼 추웠다. 하지만 TV에서만 보던 흰 눈이 사뿐히 내리는 한국의 겨울이 인상적이었다. 그 순간, 난 다른 나라에 왔음을 실감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국 땅에서 진짜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춥고 외로움이 뼛속 깊이 스며들고 슬픔이 온몸을 감쌌다. 한국에 오기 전에 생각해 본 문제이고 각오도 단단히 했지만 현실에서 부딪치니 어린 마음에 너무 두려웠다.

 

어떤 중년 남성이 나를 마중하러 공항에 왔다. 차를 타고 회사로 가는 길에 서툰 영어와 손짓발짓으로 이 남성이 내가 근로 계약한 회사의 관리자임을 알게 되었다. 이 분이 친절하고 유머 있게 대해줘서 처음 만난 한국 사람의 첫인상이 부드러웠다.

 

회사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한 시골 마을에 위치하였고, 옷감을 만드는 섬유회사였다. 외국인근로자가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등 10명이 넘었다. 한국 사람을 포함하면 40명 정도로, 꽤 큰 규모의 회사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도착해서 기숙사 방을 배치 받고 나니, 며칠 동안 한국에 갈 준비하느라 마음이 두근거려서 잠을 못 잔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 방에서 한숨 자려고 했지만, 관리자가 방으로 와서 나는 회사로 불려갔다. 졸린 눈을 비비며 회사에 가서 바로 업무 인수인계를 받았다. 그렇게 아무런 직장 경험이 없는 나는 외국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   한국에서 곳곳을 여행하는 것은 나의 큰 즐거움이다.   © 웬티현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급여가 다르다는 것

 

한국에서 느낀 가장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부분은 급여 문제였다. 한국에 사는 동안 늘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급여의 차별은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이고 실망스러운 문제였다.

 

처음 회사에서 일했을 때는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안 되었지만 눈치가 빨라서 그런지 늘 관리자나 함께 일하는 한국 사람들로부터 엄지손가락으로 잘했다는 표시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았고, 더 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노력하게 되었다. 나날이 일에 익숙해져서 오래된 한국인 경력자보다 일이 빨랐다.

 

그러던 중, 불공평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아무리 일을 잘하고, 한국사람 못지않게 일한다고 해도 월급이 한국 사람보다 적었던 것이다. 급여뿐만 아니다. 보너스나 명절 때 받는 수당도 한국 사람은 월급의 몇 십 퍼센트를 받았지만 나 같은 외국인근로자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 같은 시간 동안 일하는데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급여가 다르다는 것이 차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몇 번 사무실에 들어가 급여 인상을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너희들은 그만한 월급이면 많이 받는 거다. 그 돈을 가지고 네 나라에 가면 우리보다 부자가 될 것이 아니냐?” 어떤 한국 사람은 이런 말을 차갑게 던졌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 사람은 아마 나 같은 외국인근로자들이 외로움과 언어와 문화 차이로 인한 어려움과의 전쟁에서 승리자가 돼야만 그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회사에서 나름대로 나의 권리를 주장해봤지만, 무력감을 느꼈다. 난 ‘그래, 내가 외국인 신분이니 남의 나라에 와서 이만한 대우를 받으면 됐지, 사장이 한국 사람에게 줄 돈이 없으니 나를 고용한 것이겠지’ 하며 스스로 차별을 합리화하였다.

 

회사에서 급여 문제로 다툼한 것 빼고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또래 한국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와 잘 어울려 목욕탕도 같이 갔고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들었다. 내 생일 때 선물도 사줬고 정말 고마운 친구였다. 나는 외국인 대상으로 한 노래자랑 대회에 참여해서 2등으로 받은 도자기 선물을 그 친구에게 주었다.

 

회사에서 나이 많은 한국 분들도 늘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었다. 딸이라고 불러주신 분도 있고, 자기 집으로 초대해주신 분도 있었다. 그 사람들 덕분에 나의 한국 생활은 덜 외로웠다. 그리고 한국어도 배울 수 있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한국어, 통역사의 꿈을 키우며

 

한국 사람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시간이 날 때 틈틈이 한국어를 배웠다. 하지만 내가 한국어를 마음먹고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건 어느 한국 경찰관과의 만남이었다.

 

회사에 온 지 3년 정도 되던 하루는 지역에 있는 경찰관 몇 명이 우리 회사에 와서 외국인들에게 안전 수칙 같은 것을 안내해주었다. 그 중 한 경찰관은 내가 한국말을 잘 한다고 칭찬해주었고, 자신이 베트남에 자주 갔다며 베트남어를 가르쳐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베트남어를 가르쳐줄 자신이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경찰관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 후 1주일에 한 번 몇 개월 정도 나는 일을 끝내고 그 경찰관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었다. 돈을 받고 가르쳤지만, 돈보다 값진 것은 그분이 내게 도움이 되는 많은 이야기를 해준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앞으로 베트남과 한국은 다양한 교류가 많아질 것이고, 한국어를 잘하는 인력이 꼭 필요하니 한국말을 열심히 배워서 양국 간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후 난 통역사가 되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나름대로 스스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한국말을 잘 하는 베트남인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경찰 통역 역할이 나에게 몇 번 정도 기회가 주어졌다. 가정폭력 사건으로 신고가 돼서 경찰에 연계된 한국말에 서툰 베트남 결혼이민자에게 경찰 조사 내용을 통역해주는 일이었다. 당시 난 한국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그 여성에게 통역을 해주었고, 서울에 있는 쉼터에도 동행하여 상담 통역을 해줬다.

 

결국 그 베트남 여성은 외국인들을 도와주는 단체의 도움을 받아 폭력적인 한국인 남편과 이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국적도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여성이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니 나는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한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  베트남 자조모임.    © 웬티현  

 

시간이 지나 어느새 난 한국 생활이 내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편리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통장에 돈을 입금하고 카드 한 장만으로 결재하는 것을 비롯해서,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대면 교통비 정산이 되는 것, 언제든지 요리하기 싫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을 전화 한 통으로 주문하면 집까지 따뜻하게 배달된다는 것 등이다. 베트남에서는 이런 현대적인 생활 서비스가 어느 세월에 이뤄질까 싶다.

 

한국 사람들을 관찰해본 결과, 한국이 왜 경제적으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성질이 급해서 뭐든지 빨리빨리 처리하고, 책임감이 있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들과 오랜 동안 생활하다 보니 나의 모습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밥 먹는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정도 필요로 했는데, 이제는 5분 10분이면 식사 한 끼를 끝낼 수 있다. 시간의 개념이 전혀 없었던 나도 이제는 약속 시간을 지키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어떤 내가 한국 사람을 닮고 싶었던 것이리라.

 

불법체류자로 한국에 남기로 결정하다

 

시간이 지나 노동 계약이 만료되어 한국을 떠나야 할 상황이 왔다. 그런데 그새 너무나 익숙해진 한국 생활. 그리고 베트남에 가면 당장 뭐하고 먹고 살아야 할지,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지만 과연 나의 한국어 실력이 베트남에 가서 한국 기업에 취직할 수 있을지, 혹은 통역 일을 할 수 있을지 하는 막막함이 밀려왔다. 베트남에 갈지 말지 고민이 한 동안 머리에 맴돌았다. 고민 끝에 나는 미등록 신분, 즉 불법체류자로 한국에 남기로 하였다.

 

그렇게 미등록 신분으로 한국 생활을 연장하였고, 이곳 저곳 섬유회사, 전자회사, 미싱공장 등에서 많은 일을 해봤다. 그 시절에는 함께 일하는 한국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히 기억이 남은 것이 없지만, 불법체류 신분이 되기 전에 겪었던 임금 차별이 더 심각해졌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한국 사람의 급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저 임금보다도 낮은 급여를 받았다.

 

그래도 나는 급여를 못 받은 적은 없었지만, 나와 같은 불법체류자 신분인 친구들 중에는 악덕 고용주를 만나 낮은 임금마저도 못 받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차별이나 불공평, 불법의 문제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학대이고, 한 사람을 죽이는 행태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인들 내부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과 남성 간의 차별 등 불공평함이 있다는 것을 안다. 급여 문제뿐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 값싼 노동력이라고 평가하고 한국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존재라고 인식하여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평등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임금과 처우가 한국인과 구별 없이 평등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웬티현 
 

여성주의 저널 일다      |     영문 사이트        |           일다 트위터     |           일다 페이스북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