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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가꾸며 살아내는 노년 
<이경신의 죽음연습> 기억과 나이 듦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회장의 옛날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루이는 죽음을 향해가는 사람을 간호하고 있는 듯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맛본다. 그에게는 이미 옛날이야기밖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다이라 아즈코 <멋진 하루>(문학동네, 2004)

 

비단 소설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옛날이야기밖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듯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의 입에서는 같은 이야기가 만날 때마다 반복해서 흘러나온다.

 

‘늙어가며 세상과 미래를 잃어간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죽음에 다가간다는 실감이 더 생생해질 테고,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에 더 사로잡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노인이 미래에 희망을 품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과거를 들춰보며 지난 일을 떠올리며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현재를 채운다고 해서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장 아메리가 자신의 저서 <늙어감에 대하여>(돌베개, 2014)에서 젊은이와 노인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젊은이 앞에 펼쳐진 세상이라는 공간과 노인 뒤에 쌓인 과거라는 시간을 대비시키며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지 않다.
 

▲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돌베개, 2014) 
 

“젊은이는 자신이 시간을 앞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그가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일 따름이다. (…) 반면 노인은 대부분의 인생을 등 뒤에 두었다. (…) 노인의 인생은 다름 아닌 모아놓은 시간, 살아진 시간, 이미 살아 생기를 잃어버린 시간이다.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젊은이와 늙은이의 이같은 도식적인 대비는 너무 단순해서 진부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젊은이에게는 시간보다 공간을, 노인에게는 공간보다 시간을 연결시키는 저자의 시도는 도식적일지라도 흥미롭긴 하다.

 

사실 젊은이에게는 시간이 넘쳐나는 듯해서 시간의 소중함이 경시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래서 젊은이는 시간보다 공간에 집중할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대로, 젊은 사람에게 ‘미래가 펼쳐진다’는 것도 ‘세상이 활짝 열려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도 세상 속으로, 자신의 바깥으로 자신을 던진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노인들에게는 공간보다 시간이 중요하다. 작가는 사람이 늙어가면서 공간도 잃지만 미래조차 잃는다고 말한다. 미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니 얼마나 시간이 소중할까? 닥쳐올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픈 마음, 남아 있는 시간을 무한히 늘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시간은 과거만큼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더는 미래를 위한 계획도 힘들기만 하다. 오히려 미래라는 시간에 무관심함으로써 죽음의 불안을 견뎌낼 힘을 얻는 쪽을 노인이 택한다고 해서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지금껏 살아온 시간, 즉 이미 생기를 잃은 과거가 그가 소유한 시간의 거의 전부가 된다. 세상이란 공간을 잃은 늙은이라면, 미래에 등을 돌리고 과거를 추억하면서 자꾸만 자기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서전적 자아’가 만드는 과거 이야기

 

장 아메리가 말하듯, 세상과 미래를 잃어버린 노인은 과거만이 소중할 뿐이다. ‘나이가 들면 추억에 기대서 산다’는 말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추억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동생들과 함께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과거에 대한 시선이 각각 다른 부분에 꽂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많다. 서로 중요하게 기억하는 대목이 다르다 보니, 서로의 기억 조각들을 모아서 함께 과거를 모자이크하곤 한다.

 

그런데 같은 사건의 서로 다른 측면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서로의 기억이 충돌할 때도 있다. 한 친구가 내게 아주 오래된 과거 사건에 대한 어머니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이 서로 상충하더라는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친구는 어머니가 기억을 왜곡시켜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며 어이없어 했다.

 

기억이란 것이 반복적인 회상과 망각 없이는 가능하지가 않다.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어떤 기억은 잃고 어떤 기억은 건져 올린다. 이때, 쇠도끼를 빠뜨린 물속에서 은도끼, 금도끼를 건져 올리는 것처럼 달라진 기억, 더 멋진 기억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 과거 사건은 회상을 거듭함에 따라 기억이 바뀌고 재구성된다. 주관적인 해석이 가미되지 않은 기억은 없다. ‘정직한 기억은 없다’고까지 말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본래 기억력이란 과거의 사건을 정확히 저장하는 기록 장치여야 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왜곡하고 변화시켜 환상을 생성하는 기계 장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과거를 회상하려고 노력할 때조차, 즉 스트레스가 없는 바람직한 상황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경우에조차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미덥지 못하다.

 

기억이란 단순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며 그것은 전부 궁리하고 꾸며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외에도 우리의 기억은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도록 과거를 바꾸거나 실제보다 자신을 더욱 고결하게 보이기 위해 온갖 방식을 동원한다. 그러므로 중년에 접어들면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기억이 일으키는 각종 환상으로 인해 한층 짙어지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해밀턴 <중년의 철학>(알키, 2012>

 

이 종교철학 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중년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노년도 마찬가지다. 아니,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옛일에 대한 향수는 더욱 짙어지고 과거의 각색, 윤색은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에 집중하는 노인이라면,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로 과거를 포장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기억은 죽는 순간까지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

 

자신의 과거를 일관성 있게 고쳐나가면서 자아를 형성해가는 작업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평생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자서전적 자아’는 기억의 능동적인 변화의 산물이다. 정확한 기억, 무의식적 선별, 시간에 따른 왜곡, 반복적 회상이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떠들어대는 인생사는 오류투성이고 꾸며낸 이야기 다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억이 그만큼 불안정하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인생이 이런 불안정한 기억에 의지하지 않고 달리 존재할 길도 없다.

 

불현듯, ‘기억을 점차적으로 잃어가는 두뇌 퇴행질환에 걸린 노인은 더는 추억을 가꿀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이 끝난 것’이라는 생각이 끼어든다. 삶이란 것이 내가 만들고 꾸민 허구적인 이야기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회상된 과거만으로 인생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회상된 과거 없이 삶은 없다.

 

그래서 기억에 담은 과거의 시간이 장 아메리가 말하듯 ‘생기 잃은 시간’만은 아닌 것 같다. 과거의 기억은 끊임없이 바뀌면서 어느 정도 생기를 유지해 죽는 순간까지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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