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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죽음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다
[죽음연습] 어린이를 위한 죽음 교육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토미 드 파올라의 그림책 <위층 할머니, 아래층 할머니>(이미영 역, 비룡소, 2003)는 네 살인 토미가 죽음을 경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매주 일요일마다 아흔 네 살인 증조할머니를 방문했던 토미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는 볼 수 없다’는 이야기에 울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토미에게 돌아가신 할머니가 토미의 마음속에 항상 살아 계시다는 걸 알려준다.

 

‘엄마가 암으로 죽은 건 게자리에 태어난 나 때문이야’

 

▲ 토미 드 파올라 <위층 할머니, 아래층 할머니>(이미영 역, 비룡소, 2003) 중에서. 
 

그림책 속에서 토미의 어머니는 토미에게 사람이 죽으면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음을 쉬운 말로 분명하게 말해 준다. 누구나 죽고, 죽으면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아이들에게도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고,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비록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알폰스 데켄 신부의 <인문학으로서의 죽음교육>(인간사랑, 2008)을 읽다 보면, 어린이는 죽음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인식하기에 앞서 죽으면 되살아날 수 없다는 것, 즉 죽음의 절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와, 죽음의 절대성은 이해하지만 부모와 같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부정해 버리는, 즉 죽음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사실, 토미 같은 어린 아이에게 죽음에 대해 세세하게 말해주기는 어렵다. 만 5세까지는 아직 ‘죽으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들 하니까.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는 토미 어머니가 토미에게 한 것처럼 죽음에 대해 간단히 알려주고 좀 더 자란 뒤 상세히 설명해주면 된다.

 

이때 죽음에 대해 절대 거짓말하지는 말라고, 죽음의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만약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황당한 공상에 빠지거나 근거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꾸중을 들은 아이가 자신을 꾸중한 어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그 어른이 정말로 죽으면 자신이 죽였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죽음의 여의사’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상실수업>(인빅투스, 2014)에서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7살 여자아이가 엄마가 암(cancer)에 걸려 죽었다는 아빠의 말을 듣고 엄마의 죽음이 게자리(Cancer)에 태어난 자기 때문이라고 15살이 될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린 사례가 나온다.

 

이처럼 어린이에게 죽음에 대해 분명히 알려주지 않으면, 사춘기가 되서 정서적인 곤란이나 신체적인 질병으로 힘들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조차 현실 감각이 떨어져 살아가는 데 곤란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열한 살 딸에게 죽음을 설명하는 엄마

 

만 10세가 넘으면 죽음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인지할 수 있다고 하니까, 이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죽음을 잘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아이들은 적어도 어른이 설명하는 죽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상실의 경험에 봉착했을 때 어른과 마찬가지로 슬픔과 절망감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흔히 아이들은 어려서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지적한다. 그녀는 열 살 소년이 어머니가 병원에서 죽어가는 동안 병원 계단에 홀로 앉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이들도 충분히 자기 나름대로 슬퍼한다는 것, 하지만 다만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돌이켜 보면, 만 9세였던 나는 집에서 아파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많이 아프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죽음과 연관 짓지는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환부가 썩어 들어가는 동안 온 집안이 악취로 뒤덮혀 숨이 막히는 상황 속에서도 그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있던 날, 마르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을 쏟아내던 그 날, 할아버지의 죽음이 ‘할아버지를 더는 만날 수 없음’을 뜻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장례식이 지나 여러 날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할아버지처럼 나도 언젠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현기증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에 대해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너무 내성적인 아이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냥 홀로 생각하고 생각했다. 당시 주변 어른들 누구도 어린 내가 죽음을 그토록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지 모른다.

 

▲ 에마뉘엘 위스망 페랭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죽음> 원서. 
 

에마뉘엘 위스망 페랭은 만 11세인 딸에게 죽음을 설명하기로 한다. 그녀는 더 자란 아들보다는 유아기를 갓 벗어난 딸에게 오히려 죽음을 담담하고 침착하게 이야기해주기가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어른들이 죽음을 고통스러워하며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점점 더 죽음을 침묵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죽음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싶었던 그녀는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죽음>(동문선, 2005)이라는 작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 속에서 딸이 죽음과 관련한 질문들을 꺼내놓으면 어머니는 담담하고 솔직하게 대답해 준다. 어머니는 죽음에 대해 거짓말이나 공상을 섞지 않는다. 사후, 가족의 사고사, 임종의 장소, 호스피스, 암, 어린아이의 죽음, 에이즈, 매장, 화장, 장례식, 안락사, 자살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는 그대로 들려줄 뿐이다.

 

만 11살의 아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5, 6학년에 해당된다. 이 나이의 자녀를 둔 우리나라 부모들 중에 에마뉘엘 위스망 페랭처럼 아이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주고받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이와 죽음에 관한 대화는 평소에 나눠야

 

실제로 아이가 가까운 사람을 잃는 상실의 경험에 빠져 있을 때는 죽음을 차분히 설명하며 이해시키기는 힘들다. 그러니 죽음의 대화는 평소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알폰스 데켄 신부가 우리에게 충고하는 것처럼, 스타의 사망 소식이나 비행기 추락사고와 같은 사고사 소식을 들었을 때, 혹은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등, 아이가 조금이라도 죽음에 호기심을 보이거나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면, 곁에 있는 어른은 놓치지 말고 죽음에 관한 대화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양육자라면 장례식에서도 아이들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도 살아가면서 무수한 상실의 경험을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른들이 그랬듯이 죽음에 대한 고통과 공포를 갖게 될 것이며,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죽음을 멀리하고 숨기고 부정하려 해봐도 소용없다.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 삶이니까. 삶을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준비할 기회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

 

할아버지 장례식 날, 내가 그토록 눈물을 펑펑 쏟지 않았다면 할아버지가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날의 체험은 처음으로 내게 죽음의 고민을 안겨주었고 그 어떤 어른들도 내게 죽음을 설명해주지 못한 가운데 청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고통스러운 상실의 경험은 되풀이되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 배워가야 했다.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어릴 때부터 교육받았다면 어땠을까?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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