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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그 이후
세계여성의 날에 조명하는 ‘페미니스트 선언’ 
 

 

 

금기 같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애써 애써 꽁꽁 싸매며.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나 조여 왔던 말.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in***ac* ・2월 12일)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을 붙이며 말하는 수많은 발화들을 지나, 페미니즘을 말하면 “오빠 그런 거 싫어한다”던 남자들을 지나, 빚진 것 많고 아는 것 없이도 나는 페미니스트일 수 있습니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lo**sol*** ・2월 10일)

 

페미니즘에 대해 완벽하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실 어떤 사상이나 이념도 그걸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이란 불가능함. 그래서 많은 사회운동이 밖으로 외치는 한편 안으로 고민하며 전개된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부족함을 알면서도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soju****** ・2월 13일)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윤나리 제작, 2015년 2월 10일~26일 동안의 트위터 페미니스트 선언 모음집)에서 발췌. 


▲  ‘네타스키친’에서 제작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핸드 플랭카드를 든 한국여성대회 참가자들   © 일다

 

107주년을 맞은 3.8 세계여성의 날. 제31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린 광화문 광장에서 눈에 띈 것은 여성단체들이 마련한 부스와 다양한 프로그램 외에도,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한 소책자와 스티커, 피켓들이다. 거기에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적혀있다.

 

SNS를 달군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이런 흐름의 발단은 지난 2월 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패션잡지 <그라치아> 48호에 실린 김태훈 칼럼니스트의 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김씨는 위 칼럼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도대체 김 군에게 뭘 어쨌기에 ‘차라리’ 그 무시무시한 IS를 제 발로 찾아가는 길을 선택했을까? (중략) 그래서 현재의 페미니즘은 뭔가 이상하다. 아니, 무뇌아적인 남성들보다 더 무뇌아적이다.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면 그 자리를 여성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라고 썼다.

 

극단주의 무장조직 IS(이슬람국가)와 페미니즘을 비교한 것, 18세의 김군이 IS에 가담한 동기가 마치 페미니즘의 문제인 것처럼 말한 것 등에 다수 여성들이 격분했다.

 

이 글을 둘러싸고 트위터 상에서 격렬한 논쟁이 이어진 가운데, 한 이용자의 제안으로 해시태그(#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달기 운동이 벌어졌다. “드센 여자”, “싸움닭”, “편협한 극단주의자”, “여성우월주의자” 등의 비난을 무릅쓰고 수백 명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이어졌다.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부당한 경험들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고백적인 선언, 차별에 대한 억울함을 토해 내는 분노 어린 선언, ‘페미니즘’에 대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하는 성찰적 선언 등 그 내용은 다양했다. 남성 페미니스트들도 동참했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에 망설이며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주저하는 사람들은 주로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해본 적이 없어서’, ‘완결된 논리를 가져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내가 그렇게 도덕적이지는 않아서’ 등의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선언들을 보며 그런 부담감을 이겨내고 함께 선언에 참여한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흐름은 온라인 바깥의 행동으로도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에 후원 회원으로 가입했다. 또 번개 모임을 가지며 페미니스트 선언, ‘그 이후’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여성의 날을 맞은 3월 8일, 물론 당시의 떠들썩했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페미니스트 선언’의 흐름은 온라인, 오프라인 상에서 잔잔히 이어지고 있다. 


           ▲  3.8 여성의 날, 제31회 한국여성대회 사전 행사인 '퍼플워킹' 참가자들의 행진 © 일다

 

참 이상한 말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자리한 ‘네타스키친’은 이번 한국여성대회에서 핸드 플랭카드와 스티커를 제작해 무료 배포했다.

 

네타스키친에서 일하는 요리작가 차유진(41세)씨는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며,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순간 누가 한대 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이렇게 거부하고 무서워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남성 지식인이나 작가, 심지어 여성들도 ‘여성은 존중하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게 이상했어요. 제가 오죽했으면 페미니스트가 무슨 볼드모트(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당)냐고 할 정도로 거부 반응이 대단하더라고요.”

 

그 광경을 보며 차씨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하고.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을 알리고 바꿔나가는데 함께할 수 있다면 자신도 페미니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뇌아 페미니즘, 사이비 페미니스트, 꼴페미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마음에서 트위터 프로필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바꿨다.

 

때마침 해시태그 달기 운동도 일어났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이 보여준 엄청난 에너지를 목격한 후, 차씨는 이 에너지를 모아 운동을 해보고 싶었다.

 

사이버 공간 바깥으로 나온 페미니즘 액션

 

2월 24일, 페미니스트 선언에 참여한 사람들 서른 명 정도가 네타스키친에 모였다. 차씨를 전적으로 지지한 네타스키친 사장은 기꺼이 장소와 음식을 제공했다. 이 날의 열기 또한 대단했다. 트위터 상의 분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데 함께할 귀한 인연을 만나는 자리였다.

 

차유진씨는 사람들이 갖는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이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앞으로 페미니즘에 관한 키트(교육자료)를 제작하고 싶다고 말한다.

 

“시골의 70세 이상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알아들 수 있는 모두를 위한 교육 자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 키트를 아주 저렴하게 만들고, 그 판매 기금으로 다시 키트를 만들고 업데이트를 하고요.”

 

또 정기적인 여성주의 모임과 영화상영회, 페미니즘 예술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전시회도 계획 중이다.

 

“밥을 하고 자리를 깔아주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하고 싶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차근차근 해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찻잔 속의 태풍’(금방 사그라들 것이라는 의미)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 차가 당신의 몸 안을 적신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수백 명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모으다’

 

이번 한국여성대회에서 무료로 배포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소책자에는 2월 10일부터 26일 동안 트위터에서 이루어진 4백~5백명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  윤나리 제작 <#나는페미니스트다>(2015년 2월 10일~26일 동안의 트위터 페미니스트 선언 모음집) 
 

책자를 제작한 일러스트레이터 윤나리(32세)씨도 #나는페미니스트다 선언에 참여했다.

 

윤씨는 “선언이 단순히 여성들의 ‘화’를 표출하는 도구로 쓰였다면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타임라인(SNS상에서 이용자 자신과, 이용자 친구들의 글을 보여주는 페이지)을 가득 채운 자기고백적 선언들을 보며,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선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져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던 윤씨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선언들을 소책자로 엮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인쇄비는 네타스키친에서 전액 후원했다.

 

“처음엔 저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할수록 뜻 깊은 일임을 알게 됐어요. 선언들을 읽고 모으면서 불합리하다고 느꼈던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 용기가 없었던 나를 용서하기도 했습니다. 든든함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요.”

 

윤씨는 이 책을 보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마음을 방치하지 말고 한 발짝 걸어 나와 자주 마주치며 함께 웃자”고 전한다.

 

“Feminism Is For Everyone”

 

작가 전소영(27세)씨는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 이후 거의 매일 그림 작품을 하나씩 트위터에 올리고 있다. 화장품, 샴푸, 맥주병 등 일상적으로 쉽게 접하는 용기의 라벨에 “FEMINISM IS FOR EVERYONE”(여성주의는 모두를 위한 것)이란 문장을 담아 그리는 것.  


▲  ‘Drawing for Feminism’  전소영씨의 그림 
 

“이 작업으로 페미니즘이 사람들의 일상 속에 스며들길 희망하고 있어요. 원래 그림이나 춤, 음악 모두 주술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었잖아요. 저는 예술이 현실이나 사람들의 인식을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가게 하는데 쓰인다고 믿는 편이거든요.”

 

전씨는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이 이어질 때, 뒤늦게 선언에 참여했다. “(말이 아니라) 일상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내가 페미니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나”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용기를 낸 건 “생각이 정리되길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선언이 스스로에게 더 큰 의무감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도 한몫 했다.

 

전소영씨는 “Drawing for Feminism”이라 이름 붙인 이번 작업을 100일 넘게 꾸준히 이어갈 생각이다. “스스로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을 약속하는 의미”도 있다고. 이후 그림 전시와 판매를 계획하고 있으며, 판매 수익금은 페미니즘 운동에 쓸 예정이다.

 

“페미니즘이라는 게 얼마나 사람들에게 불편한 단어가 되었는지, 그걸 선언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했어요. 하지만 ‘페미니즘’이 이번 일을 통해서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좋은 일이라고 봐요. 페미니즘을 늘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안에서만 이야기된다면 현실의 문제들이 해결되기 어렵잖아요.”

 

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스트 이름표를 단다면

 

여성학자 조주은씨는 <페미니스트라는 낙인>(민연, 2007)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은 남성의 통제 아래 존재해야 할 여성들이 남성들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뜻한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이 붙으면 주류 남성과의 관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일면 위협적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관심 어린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여성은 자원 획득의 기회를 박탈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인과 편견에 대한 두려움을 뚫고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해온 사람들은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동안은 주로 여성학자나 여성운동가들에게 ‘페미니스트’ 이름표가 한정되어 있었다면, 이번 선언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페미니스트’ 이름표를 직접 써서 달게 되었다. 페미니즘의 대표성이 독점되거나 ‘그들만의 리그’에 갇히지 않는, 더 다양하고 자발적인 액션들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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