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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침묵행진, 5.18의 기록 
 

꿈에 5월 18일 밤의 상황이 반복되어서 잠에서 깨는 것이 두려웠다. 잠에서 깨면 그날처럼 눈앞에서 잡혀가던 사람들을 두고 나만 남을 것 같아서다.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요?’ 침묵시위가 시작되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계속 밝혀지는 불편한 진실들은 끝이 없는 듯 했다. 분노하느라 희생자의 죽음를 애도할 겨를도 없이 2주를 보내고, 4월 30일에야 시청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았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서서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순식간에 꽃을 놓고 떠나야 하는, 영정 사진 한 장 없는 분향소를 나서서 조용히 시청광장에 앉아 있었다.

 

대한문 앞에는 추모 미사가 열리고 있었고, 프레스센터 앞에도 관련 모임이 있다고 했다. 미사에 참여했다가, 프레스센터 앞으로 가니 분향을 하고 온 ‘침묵행진’ 참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참여자의 대다수가 10대와 20대였고, 차분하고 진지한 태도였다. 정치적 주체로서 행동하는 일이 적었던 세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궁금했다. 나 역시 기성세대의 낡은 구호와 거친 외침보다는 ‘침묵’으로서 저항하고 표현하는 것에 함께하고 싶었다. 

 

▲ ‘침묵행진’ 참여자의 대다수가 10대와 20대였고, 차분하고 진지한 태도였다. 사진은 5월 10일 청계광장.  © 이충열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침묵행진’은 4월 29일 용혜인 씨(25세)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우리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요?’라는 글에서 제안하여 시작되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고 들었던 세월호 승객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참사를 생각합니다. 모두가 말하듯이, 이 나라는 지금 침몰하는 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역시, 가만히 있기는 너무 꺼림칙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꺼림칙한 청년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4월 30일 오후 두시에 홍대, 오후 네시에 명동에서 침묵행진을 하고 오후 여섯시에 시청 분향소에서 분향을 한 후, 오후 7시 추모제에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한 이 글은 금세 SNS를 통해 퍼졌다. 하지만 곧 링크가 차단되었고, 4월 30일 ‘침묵행진’에 250여명이 참여하자 청와대는 게시글을 삭제해버렸다.

 

용혜인 씨는 ‘침묵행진’ 후, 귀가 길에 알 수 없는 사람의 감시와 ‘채증’(집회나 시위 및 치안 위해 사태 발생 시에 정확한 진상 파악과 위법자의 사법 처리를 위해 증거 자료를 확보하고 치안 자료를 축적하기 위해 촬영, 녹화, 녹음 등의 방법으로 위법 상황 관련 증거를 수집하는 활동)을 경험하고는 또다시 청와대에 글을 남겼다. 그리고 2차 ‘침묵행진’을 제안했다.

 

다양한 세대에게서 나온 ‘침묵의 아우성’

 

두번째 ‘침묵행진’이 열린 5월 3일 토요일. 드레스코드인 검정 옷을 입고 오후 두시에 홍대입구역 9번 출구로 갔다. 노란 리본을 멘 국화를 들고 “가만히 있으라”는 피켓을 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용혜인 씨의 진행으로 자유발언이 한시간 가량 계속되었고, 30분 정도 홍대 주변을 침묵으로 행진했다. 홍대 주변 공터에 다시 모여 자유발언이 계속되었다.

 

10대 청소년부터 6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다. 특히 청소년들이 자신들에게 ‘미안하다’며 ‘지켜주겠다’고 하는 어른들을 향해, 스스로 ‘주체’임을 주장했는데 그 모습이 좋았다. 이후 명동역 앞에 다시 모인 참여자들은 자유발언 후 번화가를 침묵으로 행진했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았지만 ‘침묵행진’을 보자 자리를 내어 주는 등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참여자들은 명동에서 시청 앞까지 ‘침묵행진’을 하고, 분향소가 있는 시청광장에서는 피켓과 꽃을 내려놓고 마스크를 벗고 묵념의 시간을 가진 후, 청계광장에서 자유발언 시간을 가졌다. ‘침묵행진’ 참여자들은 세월호 참사로 인한 슬픔과 정부의 무능력에 대한 실망, 참사로 잃은 생명들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  국화 한 송이와 '가만히 있으라' 피켓 뿐인 침묵행진 참여자들.  © 김재상 
 

나는 식사를 하러 잠깐 행진을 이탈했는데, 식사 후 일민미술관 앞 횡단보도에서 경찰들에 의해 길이 막히고 포위된 ‘침묵행진’ 참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침묵행진’은 항상 인도로 이동했고, 이동시에는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경찰은 인도 위에 있는 사람들을 진압하여 막았고, 자유발언을 시작하자 ‘불법’ 시위라며 ‘일반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있다면서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한참을 대치한 후, 경찰이 횡단보도를 열어주어 행진의 마무리 장소인 동화 면세점 앞에서 자유발언으로 ‘침묵행진’은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페이스북에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페이지가 생겨 ‘침묵행진’을 지지하고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직접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3차 모임에서는 ‘침묵행진’과 함께 5월 10일, 오후 5시 10분, 연세로 510m에서 문화예술공연과 자유발언 후 시청까지 행진하는 행사를 동시에 진행했다.

 

여러 지역에서 ‘침묵행진’이 시작되었고, 외국에도 ‘침묵행진’은 퍼져나갔다. ‘침묵의 아우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 예술’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던 나에게도 ‘침묵행진’은 이제 해야 하는 것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것이 되었다.

 

그런데 겨우 4주도 안 되어, 인도 위에서 ‘침묵행진’하던 시민들을 두려워한 정치 권력이 공권력을 사용해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겁을 주고 잡아가는 일이 바로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에 발생한 것이다.

 

5.18 기념일에 경찰의 방패에 밀려난 시민들

 

2014년 5월 18일의 대한민국 정부는 34년 전 광주처럼 총과 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했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탄압했으며, 불법적으로 시민들을 납치했다. 이날 침묵행진의 참여자들이 ‘불법납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 자리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으면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  5.18 침묵행진에 대한 경찰의 진압 지역  
 

오후 두시 홍대입구역 앞에 모여 자유발언과 침묵으로 행진했던 ‘침묵행진’은 다시 4시 30분경 시청역 5번 출구에 모여, 분향소 옆까지 노란 리본을 묶은 국화꽃 한 송이와 “가만히 있으라”고 쓰인 종이 피켓을 들고 ‘침묵행진’하며 영풍문고 앞 무대로 갔다. 참여자들은 모두 인도를 통해 걸었고, 한 마디의 구호도 외치지 않았다.

 

오후 6시 40분쯤 자유발언을 마무리하고 다시 인도로 ‘침묵행진’을 해서 청계광장 소라 조형물 앞에 모였다. 옆에서 단식농성 중인 한신대 학생 등의 자유발언이 있었다. 그런데 오후 3시부터 청계광장에서 열린 ‘만인공동회’에 참여하던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경찰병력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침묵행진의 제안자인 용혜인 씨는 청계광장에서 공식 행사를 마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직도 시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대통령에게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을 하러 가겠다”고 하였다. 광화문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걱정되어 ‘침묵행진’ 참여자들과 함께 일민미술관 앞으로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자 횡단보도 전체를 포위했다.(지도 1번 지점부터 진압 시작)

 

순식간에 경찰들에 둘러싸여 당황해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일민미술관 쪽에서 방패로 계속 밀어댔다. 참여자들은 횡단보도 중간의 안전 지대(지도 2번 지점), 즉 인도에 있었는데도 경찰들이 계속 방패로 밀었다. 마이크 든 경찰이 나타나서 ‘침묵행진’이 '일반시민'의 교통을 방해하여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다고 했다. 도로는 경찰들이 다 점거했으면서도, ‘침묵행진’ 때문에 교통 혼잡이 벌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통행의 권리를 확보해주지도 않은 채 자신들이 정해놓은 곳으로만 가고 해산하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일민미술관 쪽에서 경찰이 방패로 계속 밀어내서 결국 침묵행진 참여자들은 횡단보도 중간지대와 동화면세점 쪽 도로 위(지도 3번 지점)에 있게 되었다. 경찰이 주장하는 대로 ‘불법’ 도로 점검을 한 상태가 되었다. 경찰은 수많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얼굴을 채증했다. ‘침묵행진’이 ‘불법집회’로 변질되었다며, 해산하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방송하였고, 청소년과 기자들은 위험하니 해산하라고 했다. 

 

▲  갑작스럽게 경찰에 포위되어 당황하는 침묵행진 참여자들.   © 이충열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데, 상황을 기록할 기자들마저 없으면 어떻게 될 지 두려웠다. 5.18 광주가 떠올랐다. 언론이 지금보다 통제되었던 시절에는 얼마나 억울하고 끔찍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을까. ‘침묵행진’ 참여자들보다 몇 배가 되는 경찰들이 끝도 없이 몰려왔다.

 

토끼몰이, 연행, 폭력…‘우리가 국민입니까?’

 

‘침묵행진’ 참여자들은 계속 횡단보도 위에 있었다. 몇 차례 경찰들이 힘으로 밀어내거나 갑자기 연행하려 들어서, 이를 저지하려는 몸싸움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넘어지고 다쳤다. 침묵행진 제안자인 용혜인 씨는 호흡곤란이 와서 동화면세점 쪽 인도로 대피했다가 봉지를 구해 가까스로 호흡을 돌리고는 다시 무리 속으로 들어가 마이크를 잡았다.

 

공권력의 폭력을 처음 경험한 사람들이 ‘제 몸으로 겪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충격을 이야기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벌어지는 국민 탄압에 대해 비탄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행진을 할 때는 한 번도 구호를 외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세월호를 기억하자’,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국민입니까?' 등의 구호를 외치는데, 속상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경찰은 계속 방송으로 ‘일반시민’은 해산하고 경찰의 ‘연행작전’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동화면세점 쪽에 있던 ‘일반시민’들이 경찰에 항의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저녁 9시쯤 갑자기 경찰들이 길을 열어줘서 세종문화회관 쪽(지도 4번 지점)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구호도 외치지 않고 인도 위에 있는 ‘침묵행진’ 참여자들을 경찰이 도로에서부터 올라오며 막아섰다. 그러더니 인도 위까지 올라와서 갑자기 손에 닿는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저지하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렇게 몇 차례에 거쳐 경찰은 인도 위의 사람들을 잡아갔고, 소강 상태가 되었다. 

 

▲  경찰의 토끼몰이로, 도로 위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상황.  © 이충열 
 

내가 길가에 있는 카페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 2분도 안 되는 사이에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막았던 경찰이 길을 열었고, 그 사이 대다수의 ‘침묵행진’ 참여자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경찰이 광화문광장 쪽 횡단보도는 막은 채, 차량을 통제한 도로를 열어 준 것은 그쪽으로 ‘몰이’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광화문 광장(지도 5번 지점)으로 간 참여자들은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이날 경찰은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울 만큼 많았다. 길 건너에서 ‘침묵행진’ 참여자 뿐 아니라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발을 동동 구르게 한 대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경찰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연행하는지 보이지도 않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카메라를 맨 한 기자는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하려다 경찰들에게 사지가 들려 인도 쪽으로 내팽개쳐졌다. 언론인에 대해서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광장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경찰이 방패로 막고 몇 겹씩 둘러싸고 있어서 ‘토끼몰이’로 고립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화단 위에 올라서서 간신히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옆에서 몇 시간동안 함께 있던 사람들이 경찰들에게 납치되는 것을 보니 참담했다.

 

‘납치’라고 표현하는 것은 연행자 한 명에 경찰 5~6명, 많게는 8명까지 붙어서 사지를 번쩍 들고 꼼짝 못하게 온몸을 짓누르며 계속 채증하고, 미란다 고지는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외치며 끌고가는 것이, 합법적인 연행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장면들이었기 때문이다.   납치한 사람들을 태운 차가 가는 것을 막으려고 어떤 분이 차 앞에 드러눕자 경찰이 달려와 발로 몸을 밟고 끌어냈다. 그 장면을 촬영하려던 기자도 경찰에게 맞아 이후 가슴통증을 호소했다.

 

경찰 방패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연행을 지켜보던 사람들까지도 경찰은 잡아가려 했다. 그때 방패를 들고 있던 경찰들 뒤에서 다른 경찰이 갑자기 방패를 열라고 하더니 서 있던 한 남성을 잡아가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말리느라 잡아당기고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상황을 지켜보던 한 백인여성이 막아서자, 바로 남성을 놔주고 그 경찰은 방패 뒤로 숨어버렸다. 대한민국 국민은 함부로 대하면서 서양인에게는 움찔하는 모양이 기가 막혔다.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조금씩 모여와서 경찰들의 불법 연행에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경찰은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도발했고, ‘침묵행진’ 참여자든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든 상관없이 잡아가려 들었다.

 

3백여명이 ‘구조적 타살’을 당한 나라에서 

 

▲   경찰이 연행자를 후송차량으로 데려가는 경로. 이날 경찰은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울만큼 많았다.   © 김재상 
 

밤 10시 반이 넘어 연행자들을 실은 차가 다 떠나고, 방패막을 만들었던 경찰들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참담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가, 이순신동상 앞에 그대로 남아있는 수많은 경찰들 앞으로 피켓을 들고 서거나 항의를 했다. ‘다 잡아갔으면 이제 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주라’고 이야기해도 수백 명의 경찰이 남아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충격으로 광장에 서 있는데, 다시 경찰 병력이 투입되더니 ‘해산하지 않으면 남은 사람들도 연행하겠다’고 협박 방송을 했다. 시민들이 왜 경찰의 명령에 따라 이리 가고 저리 가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폭력적인 진압과 납치를 피하려면 광장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함께 ‘침묵행진’을 했지만 잡혀가지 않고 남은 나는 악몽을 꾸었다. 세월호에서 살아나온 사람들도 떠올랐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운’이 좋아야만 안 잡혀가는 나라. 충분히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운’이 나쁘면 죽는 나라. 그것이 내가 체감하는 2014년의 대한민국이고, 5. 18 기념일에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한 경험이었다.

 

잡혀간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방패 뒤, 모자 아래 얼굴을 숨기고 있어야 했던 어린 청년들의 얼굴도 눈에 밟힌다. 그들은 상부로부터 내려진 명령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있을까?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주체적 판단력’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양심’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겨우 한 달 전에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정부의 시책에 따라 3백여명이 구조적 타살을 당한 사실이 잊혀지지 않기를. 분노하던 국민들이 지치거나 체념해버리지 않기를. ‘침묵행진’ 참여자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청와대에 가려다 연행된 것처럼 왜곡되지 않기를.

 

무엇보다 세월호 참사로 슬퍼하고 문제 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이충열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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