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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사할린에서 만난 사람들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사할린에 억류된 한인의 역사와 삶,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사.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www.ildaro.com

 

‘사할린스키 까레이스키’의 어제와 오늘

 

지난 1월 사할린에서는 다양한 만남이 있었다. 지금쯤이면 민박집을 팔고 한국으로 영주 귀국을 준비하고 계실지도 모를 이춘자 씨, 우글레고르스크에서 ‘고향의 정’을 느끼게 해주신 분들, 이번 만남은 한국에서 달려간 우리에게 ‘힐링’ 그 자체였다.

 

한인 택시 기사와의 조우에서부터, 국내에 영주 귀국한 후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온 김춘자 씨, 무국적자로 살아오신 김명자 씨, 사할린 한인을 모티브로 하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주명수 화백과의 만남까지. 짧은 만남 속에 사할린 한인의 어제와 오늘을 볼 수 있었다. 


▲  사할린 한인의 삶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해온 주명수 화백.    © 최상구 

 

1월 15일 <새고려신문> 배순신 사장과 주명수 화가를 만난 날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불렀다. 배사장님이 마침 택시 운전을 하는 한인을 아신다 하여 연락했다. 얼마후 도착한 택시를 타고 가다가, 한인 3세쯤으로 보이는 기사님에게 말을 건네니 얼추 한국말을 하시는 거였다. 그런데 이 기사님 맘이 급한지, 손짓만 빨라진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 “(말이 안 나와) 맘이 딱딱하요!(답답해요)”

 

택시 기사는 이튿날 우리가 가게 될 우글레고르스크 근처인 우다르니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마치고 20대 초반에 이곳 유즈노 사할린스크로 내려왔고, 부산에 와서도 약 7년간 일을 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툰 한국말은 거기서 익힌 거라고. 한국사람을 좋아한다는 기사님, 연신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말이 마음을 따라와주지 못했다. 어느새 도착한 숙소. 차에서 내려 일일이 악수를 청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배웅했다.

 

다음날, 주명수 화가의 자택 겸 작업실에 초청을 받아 갔다. 주명수 화가는 사할린 한인 관련한 작품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몇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사진 작업도 하고 계셨다. 부모님의 생애와 사할린 한인들의 삶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으셨다. 그 삶의 굴곡만큼이나 붓의 놀림은 거칠었고, 색채는 어두웠다. 올해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기 위해 몇 가지 사항을 확인했다. 아무쪼록 올해 한국에서 전시회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저녁 늦은 방문인지라 오래 있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어제의 그 기사님 택시를 불렀다. 그나마 몇마디 통하는 기사님이기에, 민박집에 가기 전 주청사 앞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주청사 앞 욜카(크리스마스 트리)와 전등 장식들이 매우 화려해서 기념으로 사진이라도 찍고 싶어서였다. 기사님 덕분에 우리 일행은 욜카와 화려한 전등 장식을 만끽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해외에서 동포를 만나는 즐거움을 함께한 기사님! 3월 초에도 풍설이 몰아쳤다는데, 항상 안전운전하시길!

 

“그럼 내가 누구요? 러시아 국적도 안받았는데”

 

우글레고르스크에서 유즈노 사할린스크로 돌아온 1월 19일. 5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왔지만, 민박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또다시 길을 나섰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적 확인 소송을 하고 있는 무국적자 김명자 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사할린에 오기 전, 국적 확인 소송을 맡고 있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이상희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에 영주 귀국한 김명자 씨의 오빠를 만나 진술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유인 즉, 상대 측(대한민국)이 김명자 씨의 부모가 한국인임을 추가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명자 씨의 출생증명서에는 부모 이름과 함께 민족이 ‘한국인’으로 되어 있고, 부모 사망증명서에는 출생지가 “한국, 경상남도”로 되어 있는데도, 이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공문에 출생지 한국으로 되어 있고, 오빠는 이미 영주 귀국하여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더 무슨 증명이 필요한 것일까? 


▲  차별과 불편을 감수하고 러시아에서 무국적자로 살아온 김명자 씨.  오른쪽은 국적 확인 소송을 돕고 있는 김복곤 씨.    © 최상구 
 

1954년생.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출생, 아버지 김말수 1977년 사망. 어머니 이분열 1982년 사망. 두분의 묘는 2011년 묘지 조사를 했을 당시 찍은 사진에서도 확인되었다. 1명의 자식 중 3명은 죽고 8남매가 남았다. 그 중 큰 오빠만 한국으로 영주 귀국했고, 오빠 한 명과 김명자 씨, 그리고 남동생 3명은 무국적자 신분이라고 했다.

 

무국적. 국적이 없는 사람들은 가까운 하바롭스크도 허가가 있어야만 갈 수 있다. 은행에서 대출은 꿈도 못꾼다. 월급도 적다. 월급이 적으니 연금도 당연히 적다. 요즘에는 독립국가지역(CIS)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그들처럼 1년에 한 번씩 거주 등록을 갱신해야한다. 그리고 환갑이 다 된 김명자 씨는 선거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왜 이런 어려움과 불편함을 감수할까?

 

김명자 씨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7년간 병상에 누워 계셨다고 한다. 그때 유언처럼 자주 하신 말씀이 ‘소련 국적 받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 지키려고 아직까지 무국적자로 살고 계신다고 했다. 그래도 우린 재차 물었다. 불편하게 살았어도 평생을 여기서 살았는데, 왜 굳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시냐고.

 

“살기 바뿌요(힘들어요), 오빠도 (한국에) 들어가 있고.”

 

또 여쭈어보았다.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하니, 그런걸 왜 묻냐는 듯이 대답하신다.

 

“당연히 한국사람이죠! 까레얀카.”

 

김명자 씨는 당연히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쭈었다. 통역이 끝나자마자 즉각 이렇게 반문하신다.

 

“그럼 내가 누구요? 러시아 국적도 안 받고 살고 있는데. 나는 조선사람이요. 우리들.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내가 누구요?’라는 김명자 씨의 질문에, 대한민국은 어떤 답을 해야할까?

 

최근 이와는 대조되는 소식이 있었다. 경북 고창의 대창양로원에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부산에 있는 러시아 총영사국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양로원에 계시는 분들 중 여권을 갱신하지 못해 러시아 연금을 못 받는 등 고충이 있는 사람들의 국적 회복을 도왔다. 현재 영주귀국자 중 65세 이상이면 ‘이중 국적’을 가질 수 있는데, 국적 보유로 연금 수령 등 혜택을 못 받고 있던 분들에게 ‘찾아가는 서비스’를 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제 나라 사람이라고 인정해 달라는 재판을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타국에서까지 찾아와서 국적을 회복시키는, 이곳이 대한민국 땅이다. 김명자 씨는 재판(국적 확인 소송)을 끝까지 하겠다고 하셨다. 꼭 국적을 인정받을 수 있기를!

 

‘몸 아프니 얼마나 서러븐지’ 다시 사할린으로…

 

1월 20일, 오후 창밖의 햇살은 따뜻했다. 한인문화센터에서 만나 김춘자 씨. 한국으로 영주 귀국을 하셨다가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오신 분이다. 


▲  영주 귀국을 포기하고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온 김춘자 씨.   © 최상구 
 

김춘자 씨는 1944년 음력 4월 8일 생으로, 브이코프 탄광촌에서 출생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영주귀국을 생각하던 중, 파트너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다시 결혼을 하기로 했다. 마침 영주 귀국을 같이 가지는 전화 연락을 한 사람이 있어서, 2008년 아산으로 함께 영주 귀국을 하였다.

 

재혼한 남편과는 사할린에서는 같이 살지 않았고 전화 통화만 했었다.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 와서였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춘자 씨는 아버지와, 오빠도, 술을 안마셨다고 한다. 사별한 남편도. 그런데 재혼한 남자는 술을 마시고 주사까지 있었다.

 

“술 먹으면요 더러븐 말을 얼마나 해요. 그래서 한 달 살고 별거했어요.”

 

한국와서 한 달만에 별거하고 1년 반 만에 이혼까지 하게 된 김춘자 씨. 어찌할까 하다 마침 인천의 삼산동 아파트로 갈 수 있게 되어, 그때부터 홀로 지내게 되었다.

 

“혼자 살면서 외로버서 못 살겠어요. 친구들은 다 다른 도시에서 살아요. 전화는 하지요. 만나기는 힘들지요.”

 

김춘자 씨는 그런데도 한국 생활이 좋았다고 했다.

 

“그렇지요. 조국이잖아요. 어떻게나 해도. 부모들은 사망해도 없지만도 우리들은 조국에 가면 좋지요. 살기는 좋아요.”

 

뭐가 좋아요? 어떤게 좋아요? 여쭈니 “머시든지 좋아요” 하신다. 조국이라서? “예.”

 

한국에 있을 때 돈이 넉넉하면 집 한 채 사 가지고 자식들을 불러 함께 살고 싶었지만,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자식들과 함께 지내고 싶지만, 아이들은 영주 귀국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오지 못하고, 집을 사기에 형편이 안 되고. 영주 귀국해 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자식들과 떨어져 살았던 거였다고 한다. 2012년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이런 생각이 더 절실해졌다.

 

“2012년에 아팠어요. 일어나지도 못했어요. 얼마나 서러븐지. 물도 하나 줄 사람 없어요. 동네 이웃이 와도 6시면 일어나요. 저녁에는 내 혼자 있지요. 밤 되면 서럽고 외롭데요.”

 

결국 혼자 병치레를 하면서, 죽어도 자식들 옆에서 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자식들은 사할린에서 안 보내 주니, 본인이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2013년, 그렇게 김춘자 씨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사할린으로 왔다. 지금은 따님과 함께 살고 계신 김춘자 씨, 부디 건강하게 지내시길!

 

해방 70년, ‘어머니 나라’는 이들에게 무엇을 했나

 

사할린스키 까레이스키. 사할린의 한인들. 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보다는 한인으로 칭한다. 대륙으로 이주하여 현지화된 사람들과는 달리,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온 그들의 삶에 대한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겨울이 길어 농사도 여의치 않은 환경에서도 텃밭을 일궈 생계를 꾸렸고, 민족 차별을 받으면서도 근면한 직장 생활로 안정적인 정착 생활을 하였다. 현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도 이들의 가슴 한 켠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 동포들에게 한국은 모국이다. 즉,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허나 한국이라는 어머니 나라는 지난 70여년 동안 이들에게 그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올해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이 되는 해이고, 내년이면 해방 70년, 한일협정 50년을 맞는 해이다. 이제라도 그동안의 동포 정책을 점검하고 개선 방안을 찾아 정책에 반영하는 터닝포인트가 되어야할 시점이 아닐까. ▣ 최상구 www.ildaro.com
 
           방랑할 권리! 더 많이,더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 다의 신간 <다정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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