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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18. ‘감금증후군’ 환자들의 목소리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칼럼.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www.ildaro.com 

삶과 죽음 사이에 머무는 고통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어 자유롭지 못하지만 죽게 되면 영혼은 그 감옥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 오래된 믿음은 아직도 사람들을 사로잡곤 한다.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향유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니까, 몸에 사로잡힌 영혼의 부자유가 제법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록 제한적일지라도 나름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신체적 장애를 얻거나 질병이 생겨 행동에 제약이 생기기 전까지는 육신으로 인한 부자유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체를 통해서나마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신체가 영혼의 감옥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실감하지는 못한다.
 
‘내 잠수복을 열어줄 열쇠는 없나?’
 
그런데 더는 비유가 아니라, 오늘날 산 채로 육신의 감옥에 유폐된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한다. 이 같은 비극적 현실에 처한 사람들을 내 주변에서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남긴 자서전을 통해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장-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 1997) 
 
프랑스 북부, 파 드 칼레(Pas de Calais) 지역의 베르크(Berck)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낸 두 사람, <잠수복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 1997)의 저자 장-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1952-1997)와 <나는 죽을 권리를 소망한다>(Je vous demande le droit de mourir, 2003)의 저자 뱅상 욍베르(Vincent Humbert, 1981-2003)를 들 수 있다.
 
중견 언론인인 보비는 뇌혈관 파열로 20일간 혼수상태를 거쳐 깨어났고, 젊은 소방관 뱅상 욍베르는 교통사고로 9개월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의식을 되찾았다. 둘 다 의식을 찾은 후 사지가 마비되어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지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보비는 왼쪽 눈꺼풀, 욍베르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이들은 불어의 26개의 철자를 상대방이 불러주거나 보여주는 동안 원하는 철자에 신호를 보내면, 즉 눈꺼풀을 깜박이거나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면 상대방이 받아쓰는 방식을 통해 생각을 전달했다. 자서전도 이런 식으로 작성했다.
 
의학적으로는 보비나 욍베르 같은 사람을 놓고 ‘감금증후군’(“locked-in” syndrome) 환자라고 부른다. 살아 활동하는 멀쩡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거의 마비된 몸은 정신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이들 자유로운 영혼은 말 그대로 감금된 것이다. 보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은 나비처럼 날아다니지만, 몸은 열쇠를 잃은 잠수복처럼 갑갑하게 옥죈다.
 
소생술이 양산한 식물인간들
 
‘감금증후군’ 환자가 될 가능성을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는 것에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적은 수이긴 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육신 속에 의식만이 작동하는 끔찍한 삶을 선고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할 수는 없다. 분명 살아 있으니까 죽은 시체로 취급할 수도 없고, 꼼짝할 수 없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니까 살아 있다 말하기도 힘든 사람들. 바로 현대의학의 놀라운 기술, ‘소생술’이 이들을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로 옮겨놓았다.
 
‘감금증후군’ 환자들은 살아서 끔찍한 지옥에 떨어졌다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소생술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보비도 욍베르도 뇌일혈로 쓰러진 그때, 대형트럭에 충돌한 그 때,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소생술이 구한 생명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분명, 생명을 연장해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어 소생술에 감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생술의 발달이 만들어낸 새로운 환자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흔히 ‘식물인간’으로 부르는 사람들이다. 인공호흡기나 음식물튜브, 배변튜브 등에 의지하면서 생명은 유지하고 있으나, 의식은 상이한 단계-즉 의식이 없거나 거의 없는 상태, 의식이 있는 상태-에 속하는 환자들이 그들이다.
 
현대의학은 이들을 4단계로 구분한다. 감각능력도 의식도 없는 ‘혼수상태’, 감각, 반사작용은 있지만, 의식은 없는 ‘식물상태’, 감각도 있고 고통과 같은 감정도 느끼지만, 의식은 미미한 ‘최소의식상태’, 그리고 감각도 의식도 있지만, 사지가 거의 마비상태인 ‘감금증후군’으로 나눌 수 있다. 앞서 보비와 윙베르가 이 ‘감금증후군’에 속한다고 소개한 바 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명령에 반응하는 ‘최소의식상태’의 환자들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 환자들이 정상적인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조차 식물상태와 최소의식상태를 종종 혼동한단다.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식물상태’의 환자와 ‘최소의식상태’의 환자를 혼돈하게 되면, 후자의 경우 의식을 정상적으로 회복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심리학자와 같은 연구자들은 EEG(전기뇌수엑스레이)를 동원해서 두 상태를 구별하려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최소의식상태’의 환자가 정상적으로 의식을 회복한 후 갈 길은 뻔해 보인다. 바로 ‘감금증후군’으로 승격되는 것이 아니겠나.
 
“그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십 분도 못 참겠다는 것을! 움직이고 싶다는 것을! 아프지 않는 데가 없다는 것을! 경련이 심하다는 것을! 숨쉬기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 침대, 이 장소, 이 불결한 병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시각, 후각, 미각뿐만 아니라 운동능력과 말할 능력까지도 잃어버린 욍베르는 이렇게 소리 없이 외쳤다.
 
보비나 욍베르가 죽기 직전 쓴 자서전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들이 겪어낸 심리적, 신체적 고통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의술이 낳은 이토록 잔인한 결과를 그냥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극소수의 사람들이 겪는 일이라면서 마냥 무시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의학이 무슨 권리로 한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형벌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나마 이 두 사람은 사지가 완전히 마비되지 않아 눈꺼풀, 엄지손가락으로 소통을 시도할 수 있어 책으로 자신의 심경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최소의식상태’의 환자들 가운데 밖으로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채 온전히 몸의 감방에 갇혀 감각, 감정, 의식만 파득파득 살아 있는 환자는 없을까? 지독히도 잔인한 상상이지만,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진정으로 육신이 영혼의 감옥일 것이다. 사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나비’처럼 날아 ‘하얀 천국’으로
 
보비는 사고 후 1년 3개월을 살다 사망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르겠다. 1997년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수동적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는 때라서 그가 끝까지 음식물 튜브를 달고 살았는지 궁금하다. 아니면 불법적이지만 공공연히 시행되던 안락사로 삶을 마감했는지 알 수 없다.
 
욍베르는 사고 후 1년 9개월 만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고, 2년이 되었을 때 마비된 몸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의학적 선고를 받는다. 이 선고를 받고 나서 더는 물리치료도 언어치료도 받을 수 없는 다른 기관으로 옮겨야 했을 때 그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대통령에게 안락사할 권리를 탄원해보기도 하고, 자신의 ‘유언장’이 될 책도 쓴다.
 
그리고 사고가 난 날로부터 3년째 되는 날, 그는 자신이 꿈꾸던 ‘하얀 천국’으로 떠난다. 어머니와 의사의 도움을 받아 불법인 안락사를 선택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소생술로 인해 생명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 셈이지만, 결국 그들이 원한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보비는 자서전을 이렇게 끝낸다.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복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 나의 자유를 되찾아 줄 만큼 막강한 열쇠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잠수복을 벗어 던지는 길, 육신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던 것이다. 육신이 영혼의 감옥이라면 죽어서라도 몸을 벗어나는 것이 영혼을 자유롭게 할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감금증후군’ 환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육신의 감방에서 풀려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당장 죽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데 비극이 있다.
 
‘죽고 싶다, 죽여 달라’는 욍베르의 처절한 외침이 프랑스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켜 2005년 레오네티(Leonetti) 법안을 탄생시켰다. 즉 치료를 중단하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소극적 안락사’의 합법화는 불러왔지만, 죽음을 곧바로 야기하는 독극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여전히 허용하지 않는다.
 
제대로 살아갈 수도 없으면서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도 없는 사람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지도 죽지도 못해 신음하는 사람들, 의술이 만들어 준 육신의 감옥에 갇힌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 이 땅에는 없을까? ▣ 이경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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