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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스무살 여연의 공상밥상 (14) ‘감 호떡’의 은은한 단맛 


홈스쿨링과 농사일로 십대를 보낸, 채식하는 청년 여연의 특별한 음식이야기. 갓 상경하여 대도시 서울의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스무살 청년의 음식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좌충우돌 실험 속에서 터득한 ‘여연표’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www.ildaro.com  

▲ 하늘은 높고 나무들은 누렇게 변해가고 황금빛 벼가 논바닥에 눕는 가을은 아름답다.  © 여연   

가을은 아름답다. 해는 빛나지만 공기는 차갑고, 하늘은 높고 파랗다. 나무들은 누렇게 변해가고, 풀들은 씨앗을 남기고 서서히 말라 스러져간다. 논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벼는 하나 둘씩 베어져서 한 다발씩 가지런히 줄을 지어 논바닥에 눕는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다. 밤, 대추, 감, 호두, 늙은 호박 같은 열매들은 이름만으로도 고소함과 달콤함을 물씬 풍긴다. 그 중에서도 홍시는 그 어떤 열매보다도 가을의 색을 띠고 있다.
 
내가 감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홍시와 덜 익은 감을 구분할 수 없다면 어떨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발그레한 미소에 속아 땡감이라도 한 입 베어 물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다. 그리고는 처음 느끼는 떫은맛에 화들짝 놀라 바로 뱉어내고 말겠지.
 
‘악, 이게 뭐야!’ 하지만 땡감 조각을 뱉어내고 나서도 몇 분 동안은 혀가 마비돼서 쩔쩔맬 테다. 잘게 뜯어낸 솜 조각을 혀에 가득 뿌려놓은 듯이 입이 바싹바싹 말라서, 거칠거칠한 칫솔로 혀를 박박 문지르고 나서야 개운해지지 않을까.  

▲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다. 그 중에서도 홍시는 그 어떤 열매보다 가을의 색을 띠고 있다.    © 여연  

생각해보면 땡감의 이런 자기 보호는 역시 유난스럽다. 씨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떫은맛으로 보호하는 과일은 흔치 않다. 예를 들어서 덜 익은 사과에는 빨간 사과와는 다른 상큼한 향과 새콤함이 있다. 덜 익은 딸기는 시지만 역시 먹을 만하다. 덜 익은 배와 복숭아는 그저 밍밍할 뿐이다. 하지만 덜 익은 감이라면? 떨떠름한 맛과 입에 달라붙는 기분 나쁜 느낌이 먼저 떠오른다.
 
감의 이런 떫은맛은 ‘디오스프린’이라는 타닌 성분 때문이다. 타닌은 식물이 여러 외부 요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복잡한 폴리페놀이다. 땡감 말고도 도토리묵, 녹차와 홍차, 와인, 밤의 속껍질 등에 들어있다.
 
수용성인 타닌은 침과 만나면 혀의 단백질을 응고시킨다. 그래서 덜 익은 감을 먹었을 때 솜을 뿌린 것 같이 답답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워낙 훌륭한 응고제라서, 타닌이 풍부한 음식을 먹으면 다음 날 화장실에 가기가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 감을 많이 먹으면 변비에 걸린다는 말도 타닌 때문에 나왔다.
 
그렇지만 떨떠름했던 과거를 싹 잊어버린 홍시의 살은 마치 벌꿀처럼 부드럽고 달콤하다. 과일로서는 드물게 A와 B계열의 비타민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비타민 C도 풍부하다. 감을 붉게 물들이는 천연 색소인 리코펜은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들여다보느라 피곤하고 퉁퉁 부운 눈에도 도움이 된다.
 
까치가 콕콕 쪼아 맛을 봤거나, 벌레가 파먹은 감은 이웃 감들보다 훨씬 빨리 물렁물렁해진다. 감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고난을 겪으면 더 빨리 성숙해지나 보다.
  

▲ 감나무 가지는 탄력이 별로 없고 약해서 손을 대고 조금만 힘을 주면 툭툭 부러진다.    © 여연  

감나무 가지는 탄력이 별로 없고 약해서 손을 대고 조금만 힘을 주면 툭툭 부러진다. 꽤 여기저기로 산만하게 뻗어서, 감을 따다가 잔가지를 부러뜨려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신기한 나무다. 몸통에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튀어나온 나무껍질이 투박한 무늬를 이루고 있다. 늙은 나무의 껍질은 푸른 이끼로 뒤덮여 있을 때가 많다. 감나무는 나무껍질도 가지처럼 탄력이 부족하고 쉽게 부서진다.
 
유난히 툭툭 튀어나온 뚜렷한 무늬를 가진 감나무의 껍질이 푸른 이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면, 나는 늙은 용을 떠올리곤 한다. 흔히 상상하는 무시무시하고 위압스러운 용이 아니라, 뒷산 동굴에서 토끼를 잡아먹으면서 살 것 같은 조그맣고 친근한 용이다.
 
동네 여기저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나무는 크기가 꽤 크고 올라가기도 애매한 모양새라 홍시를 딸 때는 보통 긴 대나무 장대를 쓴다. 끝부분은 낫으로 살짝 쪼개서, 쪼갠 부분에 조그만 가지를 끼워 고정시킨다. 유난히 붉고 빛나는 감이 있는 곳을 눈으로 잘 찾아놓고, 후들거리는 팔에 힘을 줘서 장대를 그쪽으로 들어올린다. 이때 장대로 감을 찌르면 안 되니 살짝 피해서, 감꼭지가 달린 가지를 갈라진 끝부분에 정확하게 집어넣는다.
 
앗, 햇살에 눈이 부셔 빗나가고 말았다. 다시 시도한다.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다. 감이 여전히 튼튼하게 매달려 있는 걸 확인하고, 팔목을 살살 돌려서 가지를 부러뜨린다. 조심조심, 침이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간다. 팔에는 묵직한 홍시의 무게가 느껴진다. 뚝! 주홍색 감은 보기만 해도 위태롭게 장대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살며시 장대를 바닥 쪽으로 내린다. 이제 거의 성공했다. 그런데 어이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홍시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나는 망연자실해서 추락의 충격으로 처참하게 으깨진 감을 바라본다. 아직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이 ‘하하하’ 웃으며 살살 약을 올리는 것 같다. 해는 여전히 빛나고, 넓고 새파란 하늘에는 폭신폭신해 보이는 구름이 몇 조각 떠다니며 산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번에는 꼭!’ 다시 장대를 집어 든다.
 
<강낭콩으로 속을 채운 감 호떡 만들기>

* 재료
반죽: 잘 익은 홍시 4알, 통밀가루 4컵, 두유, 소금, 감자전분 약간
속: 강낭콩 3컵, 소금, 설탕  

▲ 강낭콩으로 속을 채운 감 호떡.  바삭바삭하고, 은은하게 풍기는 단맛이 무척 가을답다.   © 여연 

홍시와 두유를 섞어 믹서에 넣고 갈아서 부드럽게 만든다. 통밀가루에 약간의 감자전분을 섞어 체에 내린다. 몇 번을 내린 다음 홍시에 섞어 반죽을 한다. 이때 소금을 반의 반 수저 정도 넣는다. 손에 묻어 나오지 않을 만큼 치대서, 탁구공만한 크기로 동그랗게 빚어놓는다.
 
반죽을 하는 동안 강낭콩에 물을 한 컵 넣고 푹 삶는다.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고, 김이 한 번 오르면 불을 약간 줄여서 콩이 완전히 무를 때까지 삶는다. 물이 다 졸아들면 숟가락이나 방망이를 이용해서 곱게 빻는다.
 
아까 만들어둔 반죽을 손바닥에 놓고,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움푹한 홈을 만든다. 홈 속에 으깬 콩을 채워 넣는다. 두툼한 부분의 반죽을 끌어와서 콩이 보이지 않도록 덮고, 다시 동그랗게 빚는다.
 
팬을 뜨겁게 달궈놓은 다음 일단 불을 줄인다. 손에 기름을 살짝 묻힌 다음 호떡 반죽을 손에서 굴린다. 기름에 코팅된 호떡을 팬에 올린다. 20초 기다렸다가 뒤집으면, 아래쪽이 살짝 단단해져 있다. 달라붙지 않게 조심조심 그 부분을 뒤집개로 누른다. 골고루 뒤집으면서 계속 꾹꾹 눌러주면, 어느새 그럴싸한 작은 호떡 모양으로 노릇노릇 구워져 있다. 기름기 없이도 바삭바삭하고, 은은하게 풍기는 단맛이 무척 가을답다.  ▣ 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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