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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17. 지금, 우리는 늙고 있다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칼럼.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www.ildaro.com 


‘죽어야 낫는 병’
 
토요일 이른 아침, 도장에는 여든이 넘은 할머니 도우님 한 분이 몸을 풀고 계셨다. 우리 도장에서는 최고령자로, 18년째 혼자 생활하시는 분답게 자기 관리를 아주 잘 하신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도장에서 수련하고 일주일에 세 번은 잊지 않고 수영장도 찾는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반드시 교회를 찾아 신을 경배하는 신실한 기독교신자다.
 
최근 몇 개월 사이 도우님이 눈에 띄게 쇠약해 보인다. 기억력도 약해진 듯하다. 지난 3주 동안 같은 질문을 세 번 받았다. 나는 그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해드렸다. 하지만 도우님은 질문했다는 사실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하셨다.
 
나는 그 분 곁에 앉아 ‘건강은 좀 어떠시냐’고 인사를 건넸다. 도우님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면서 “내 병은 죽어야 낫는 병이야.” 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왼쪽 눈이 안 보여. 이제는 오른쪽 눈까지 옮았어.” 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눈 때문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한탄을 여러 차례 들어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시력을 잃어가는 동안 얼마나 좌절했는지를 잘 아는 나로서는 도우님의 힘든 상황이 생생히 느껴졌다.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포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자립적이고 똑 부러지는 깔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더는 앞을 볼 수 없게 되면,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슬픈 노년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도우님이 내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리라. 아무리 자기관리를 잘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고 해도,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나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 신체의 기능을 차례로 잃어가는 노화 과정에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죽음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도우님의 늙음에 대한 태도는 예찬도 거부도 아닌, 바로 ‘체념’이었다.
 
90세가 넘어 뇌기능이 약화되어 요양원 침대에 갇혀 살아가는 친구 할머니, 늙음을 죽음만이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보는 도우님, 아들을 먼저 보내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등. 실제로 노년을 관통해온 노인들을 바라보면, 이들에게 노년은 분명 찬사를 보낼 만한 어떤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래 전 남프랑스 베트남 식당에서 만난 할머니 생각이 난다. 그 할머니는 내게 ‘사는 것이 슬프다’고 말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여생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노년에 ‘슬픔’ 이외의 다른 단어를 엮지 못하셨던 것 같다. 아들을 앞서 보낸 우리 할머니 역시 너무 오래 살아서 겪지 않아도 될 험한 일을 겪는다 생각하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눈물로 매일 밤을 지새우셨다. 당시 할머니는 70대 초반이었다.
 
사실,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늙기 싫어도 늙고 죽기 싫어도 죽는다. 늙는 것을 아무리 거부해 본다 한들, 결국엔 대다수가 체념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아니, 늙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오히려 운이 좋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노년예찬>(콜레트 메나주, 정은문고, 2013)이란 책의 제목은 진정성 없는 광고용 문구처럼 다가왔다. 스스로 늙었다고 말하는 노인들에게 있어 노년은 정말로 무엇일까? 흔히들 장수가 복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과연 그런가? 노년을 체념하지 않고 진심으로 예찬할 수 있을지 불현듯 궁금했다.
 
‘난 노인이 아니야’
 
평소에도 60대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많지만, 이 사람들은 ‘당신들이 노인’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70대를 만나면 이들은 스스로를 노인이라고 표현할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런 형편이지만 프랑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만난 60대 중반 여교수도 ‘난 노인이 아니야’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 사이 계단에서 발목 부상을 당해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날 프랑스건 한국이건 60대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인으로 인정할 수 없어 한다.
 
그래서 <노년예찬>이란 책에서도 노년을 테마로 삼으면서 주로 90대 노인들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나 보다. 이 90대들은 스스로를 노인으로 인정하니까. 나는 책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90대 노인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이 노인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노인들과는 차이가 나는,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유명한 노인들은 내가 주변에서 만났던 평범한 노인들과 달리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가운데 노년이 슬프지 않다는 노인도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이 90대 노인들은 노년을 예찬할 수 있는 드문 부류에 속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도 노년의 고통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음은 90대 작가 브누아트 그루(Benoite Groult)의 인터뷰에서 따온 것이다.
 
“그럼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리를 덮치는 온갖 종류의 통증이 있겠네요. 항상 새로운 통증이 발견되니까요. ‘이런, 오늘 밤은 오른쪽 어깨가 아프군. 그전에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이런 식이죠. 지금 통증이 사라져도 2주일만 지나면 다시 돌아옵니다. 이듬해는 양쪽 어깨가 다 아프겠지요. 결코 멀쩡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점점 더 나빠질 뿐이죠. 가장 고통스러운 건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입니다. 저는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은 아닌데, 20대때 만난 남자 친구 중 이제 남은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단 사실은 슬픕니다. (…) 제 주위 나무들이 다 베어진 느낌이 드니까요. 자기 나이 또래에서 혼자 남는 것은 슬픈 일이에요.”
 
누구나 신체적 고통이 심해지고 걷기가 힘들고 간단한 행동도 잘 하기가 어려워서 행동의 제약이 생기고 심지어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지면 ‘노년으로 추락했다’고, ‘늙었다’고 느낄 것이다. 게다가 가까운 사람들을 잃은 후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없다면 그만큼 노년의 어려움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도 없고 계속해서 지적 활동이 가능하고 신체적으로도 행동의 제약이 크지 않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나갈 수 있다면, 아직은 늙은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 젊은데…” 라고 말씀하시는 70대 중반의 친구 어머니처럼 말이다.
 
각자 다르게 늙어갈 뿐 

누구에게나 노년이 다 같을까? 지적,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자립이 허용되는 시기가 제각기 다르다. 신체적, 정신적 능력만 감안하더라도 노년을 70세부터다, 80세부터다 단정지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쇠 시기가 다르다. 누군가는 채 50살이 되기 전에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할 만큼 몸, 마음, 정신이 쇠약해지고 퇴행하기도 한다. 그만큼 늙음의 개인차가 크다. 따라서 개개인이 노년으로 자각하는 시간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언제부터 노년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지 모르겠다.
 
평소 나는 내 또래 친구들에게 ‘우리도 늙고 있다’는 말을 하곤 한다. 내가 이 말을 할 때는 실제로 그 어떤 감정도 섞지 않는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왔듯이 어느 순간부터라고 꼬집어 낼 수는 없지만 늙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 말을 듣는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다’, ‘노년이라는 말은 슬프다’ 등, 늙음과 노년에 대해 곧바로 거부감을 표현한다. 실제로 우리는 흰 머리, 주름이 있는 40대 후반이다. 이미 폐경기를 맞은 친구도 있고 기억력도 전 같지 않다. 퇴행성 질환에 시달리는 친구들도 많다. 그럼에도 늙음보다는 젊음에 더 가까이 서 있고 싶은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 늙음은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 될수록 피하고 거부하고 싶은 불청객일 뿐이다.
 
그럼에도 늙음은 어느 날 불시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불청객은 아니다. 많은 노인들이 주장하듯 그 누구도 어느 날 추락하듯, 몰락하듯, 그렇게 갑작스레 늙지 않는다. 늙음은 추락이나 몰락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죽음조차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듯이 늙음도 늙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지혜로워 보인다. 사춘기부터 늙기 시작한다는 과학자의 주장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린 아이가 아닌 이상 다들 죽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이상 늙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도 늙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늙고 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늙어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차분히 바라볼 여유일지 모른다. 늙음을 ‘문턱을 넘어 맞는 노년’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진행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늙음을 특별히 긍정하거나 부정하게 될 것 같지 않다. 늙음은 인생의 여정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짧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길 수도 있는 그런 것. 누군가는 정신이 더 빨리 늙고 누군가는 신체가 더 빨리 퇴행하기도 하는 것.
 
‘죽어야 낫는 병’이라는 도우님의 표현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노쇠’는 다름 아닌 ‘병’, 죽음’만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 이 말 속에 담긴 늙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늙음은 절대 병이 아니다. 그냥 늙는 것일 뿐. 우리가 태어나서 어린 아기였을 때 타인의 도움이 필요로 했듯이, 늙어가다 죽음을 맞기 전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 어찌 자연스럽지 않을까?
 
나이 드는 일이 슬플 수도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를 거꾸로 되돌린다고 슬프지 않거나 행복하지 않을 것도 아니리라. 비록 책 속에서지만 나이 드는 것이 슬프지 않은 노인을 발견해서 다행이다. ▣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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