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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공백의 발견> 12번째 일자리를 찾고 있는 D님
 

경력단절이라는 꼬리표는 왜 여성에게만 붙을까? 여성들은 왜 노동시장으로부터 단절을 겪게 된 것일까? 출산과 양육만이 경력단절의 이유일까?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에서 여성들의 공백(경력 단절)의 문제와 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일하는 여성’들과 만나, 여성노동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짚어보는 인터뷰를 일다와 공동 연재합니다. www.ildaro.com 
 
열한 번째 일자리는 ‘임시직’ 안내데스크 
 
웃는 게 매력적인 친구와 같이 보낸 시간은 그 기억이 밝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자연스레 이어주는 웃음 소리가 호탕한 D님(38세)을 만난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D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네 노동 현실이 팍팍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갈대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D님은 <공백의 발견> 기획을 통해 만난 여성노동자들과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이 때문에 경력 단절을 겪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 10가지나 된다는 점이 그렇다. 지금은 11번째 일, 지역의 한 여성센터 안내데스크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은 안내데스크에서 강좌 접수하러 오시는 분들 접수 받고 설명해드리고, 인터넷 못하시면 도와드리고, 이런 일들 하고 있죠. (계약직인가요?) 네. 3개월간 임시직이에요.”
 
남편도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생계를 위해서 D님도 일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일이 끝나기 전에 다음 일을 준비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고생이 될 것 같은데, 물론 ‘두렵다’고 말씀하셨지만 D님에게서 큰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뭐, 일이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크게 욕심 없어요. 특별하게 하고 싶다거나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그런 것도 없고, 어떤 걸 하고 싶다 이런 것도 없고요. 노동 조건은 급여도 좋으면 좋고, 시간도 그렇게 9시부터 6시 일하면 좋고, 5일 근무면 좋고. 하지만 이런 조건에 다 맞출 순 없다는 걸 지금은 너무나 잘 아는 거죠. 그렇게 요구할 수도 없는 거 같아요. 어느 정도 제가 판단을 하는 거죠. 여하튼 구인업체들 쭉 보면, 이것들 외에 따질 수 있는 조건을 제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따지진 않는 것 같아요.”
 
D님은 무기력한 어조가 아닌, 오랜 시간 다져온 생각과 깊은 내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어떤 일을 어떻게 경험하면서 얻은 결과인 걸까. 그리고 D님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일까. 첫 번째 일자리부터 차근차근 열 번의 마디를 짚어보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뛰어든 노동시장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갔어요. OO전자. 한 3년 정도 생산직으로 이천에서 컴퓨터 모니터도 만들고 카 오디오 이런 거 만들고 핸드폰도 만들고 나왔어요. 그런데 갈 데가 마땅치가 않았어요. 사무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다시 공장에 갔죠. 구로공단에 있는 곳. OO전자에 같이 다녔던 언니가 전에 일했던 공장을 알려줬죠. 공장 일이 단순 업무잖아요. 앉아서 컨베이어벨트 쭉 돌아가고. 어느 순간 답답하더라고요.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만뒀어요.”

▲ 찰리 채플린은 영화 <모던타임즈>(1936)를 통해, 기계식 생산 공정 속에서 인간이 부품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본주의의 폐단을 풍자했다.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기계화되는 노동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가는 기계에 따라 쉼과 출퇴근이 정해지는, 단순하고 답답한 일상이 3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닌 것 같다. D님은 지금의 구로공단인 가리봉 근처에서 두 번째 공장 생활을 한 뒤, 다른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답답증을 주었던 공장 노동을 접으며 시작한 일은 학습지회사의 사무 행정이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이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장 그만 둔 시기랑 맞아 떨어진 거죠. 뛰쳐나가고 싶은 시기에 전화가 와서. 학습지 교사하려면 대학 나와야 하니까, 너 빨리 방통대라도 들어가라. 그래가지고 그때 방통대에 들어갔는데, 너무 경력도 없고 학력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사무실 행정 보는 걸로 맨 처음 들어갔죠. 그때 처음으로 사무 일을 배운 거 같아요. 컴퓨터랑 한글도 못했는데. 한 1년 정도 하다가 학습지 교사도 하게 됐어요. 그건 정말 짧게 한 6개월.”
 
학습지회사에서 사무 행정을 하면서 컴퓨터를 다루고 일을 배우게 된 D님. 익숙해질 만한 때에 교사로 뛰어야 했단다. 그러나 반년 정도밖에 이어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가르치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영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업은 저랑 안 맞았어요. 이해관계가 딱 걸리잖아요. 이해관계가 걸리면 얘기하기가 권유하기도 껄끄러워지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생각을 못한 거죠. 못 견딘 거죠. 저보고 성격으로는 영업을 잘 뛸 거라고 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제일 좋은 건 수업에 가서 다른 아이를 소개받는 게 좋죠. 그런데 쉽지가 않고,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아요. 아이보다 엄마와의 관계를 훨씬 더 잘해야 하고.”
 
학습지 교사의 일이 표면적으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학습지를 판매할 고객을 끌어오는 영업을 해야만 한다. D님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학습지 교사가 특수고용 형태라서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을 하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잉여 인력’이 되다, 파견의 문제를 절감하다
 
학습지 일을 정리하고 들어간 곳은 작은 시민단체. 전에 일한 학습지회사 지국장의 남편 소개를 받아서였다. 시민단체에서 보낸 2년에 대해 D님은 “막 희열을 느끼거나 쾌감을 느끼거나 한 적은 없는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왜 그만뒀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경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일자리를 찾으면서 책 판매업체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이 때 처음으로 비정규직과 파견 근로의 문제를 체감하게 되었다.

“아주머니들이 책 파는 회사에 행정직으로 일했어요. 그나마 전에 행정 경험이 있으니까. 2002년인가에 그때는 아웃소싱 용역회사들이 엄청 드러난 시기였던 것 같아요.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고 파견도 생기고. 나를 고용한 건 A업체인데, 이 업체에서 나를 책 파는 회사 영업국에 파견을 보내는 거죠. 그렇게 처음으로 그 개념을 알게 된 거에요.”
 
일하던 영업국은 영업 실적이 좋지 않아 다른 곳으로 합병이 되고 인력이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합병을 주도한 회사 쪽에서는 코드가 잘 맞지 않았던 D님을 퇴사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D님은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본사로 거의 퇴출되다시피 했다.
 
본사로 들어갔지만, 당시의 자신의 상황을 ‘잉여 인력’이라고 표현했다. 아마도 해고 통보 대신 책상을 빼버리는 방식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할 일이 없었어요. 출근했는데 시키는 것도 없고. 자괴감이 들었죠.”
 
책 판매업체에서의 일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그러고 나서 카페를 차린 언니를 잠시 도왔다가 인터넷으로 찾은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회사라고 볼 수도 없는데. 거기는 제가 일명 ‘사기 치는 데’라고 해요. 회원권 거래소였어요. 처음 알았어요. 그런 직업이 있는지. 콘도, 골프 이런 회원권을 중개하는 회사인데 5일 근무, 칼 퇴근하고 외근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않고 바로 퇴근하고, 괜찮았어요. 급여도 125만원 주고 밥값에 교통비 주고 했으니까 적진 않다. 열심히 다니자. 오래 다니자. 이런 마음으로 갔죠. 그랬는데 돈 백 만원도 안 되는 회원권을 오백 만원이라고 팔고. 이게 뭐 하는 거야? 마음에 안 드는 거죠.”
 
아무리 생계가 걸려있더라도 반나절 이상 보내는 회사에서 일의 의미를 찾기 어렵고 더구나 정당하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건 지속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일이 아닌 사기였다고 반추되는 회사에서 일했던 D님. 급여나 근무 조건이 다가 아니었다. 일 자체에 의미가 붙어있는 건 아니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노동의 가치는 달라진다.
 
“이제 자격증 시대가 된 것 같아요”
 
십대 때부터 남다른 정치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D님은 이후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하다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참, 그 사이 결혼을 했고,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남편도 일을 하지만 D님에게도 일이 필요했다.
 
“이력서에 쓸 게 없어요. 창피해요. 할 줄 아는 게 없고 나이도 걸리는 거에요. 사실 소개받아서 가는 거 아니면 안 되고. 소개받아 가더라도 제가 아직 애가 없는데 ‘안 낳을 거냐’고 묻죠. 안 낳을 건 아닌데, 안 생기면 안 낳을 수 있고, 그건 장담할 수 없는 거잖아요. 애가 생기면 그만 둘 수도 있지 않냐면서. 어떤 업체에서는 이 정도 나이에 애가 어느 정도 커서 그만 둘 일이 없는 직원이었으면 하는데, 저는 그 조건이 안 맞는 거에요. 면접 봤는데 퇴짜 맞았죠.”
 
이렇게 되자 취업을 하기가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업을 할까 고민도 했다. “언니 가게를 같이 했던 경험도 있으니까, 가게만 괜찮으면 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초기 자본이 사실은 많이 들죠. 최소한 몇 천 만원 있어야 하니까. 좀 만만치 않은 거죠.”
 
뜨는 일자리들 중에 상당수가 창업이지만, D님의 이야기처럼 만만치 않은 일이다. 결국 다시 찾은 일은 학교 급식조리원이다. 학교는 방학이 있으니 중간 중간 쉬면서 여유 시간을 가지면서 다시 일하는 패턴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단 근무기간 3일을 찍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학교 급식을 갔어요. 3일 하다가 나왔어요. 개판이어서. 12명 정도 조리사, 조리원들이 있었어요. 2천5백명분을 저희가 하는 거더라고요. 고등학교 공고를 보고 갔는데, 중학교도 같이 하는 거에요. 이런 대규모 급식은 삽질을 해야 해요. 솥 단지 들어야 하고. 뭘 볶거나 국을 젓는다고 해봐요. 진짜 국자가 삽이야. 저녁에 야자하면 석식도 한단 말이죠. 힘들 거라고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생각을 못한 거고. 그러다 보니 한두 사람씩 빠지는 거에요. 일해본 아주머니들은 감이 오는 거겠죠. 계속 일해야 하는지 아닌지. 그래서 안 나오시는 데, 학교에서는 사람을 안 채워주는 거에요. 경험을 쌓아서 초등학교에 가라, 초등학교는 수월하고 괜찮다는 얘길 듣기도 해서 경험상 더 있어보자 생각했는데. 열이 확 받죠. 난 더 이상 이렇게는 일을 못하겠다.”
 
급식은 먹어만 봤지 어떻게 만들어지는 줄 잘 몰랐다. 급식이 맛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D님은 급식 노동자의 노동 조건에서 답을 찾았다. 몇 천 명분의 밥을 하는데 10여명의 인력으로 만들다 보면 정성이 아닌 힘밖에 담기는 게 없을 거란 건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D님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3개월짜리 임시직이다. 앞으로 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우선 고민은 뭐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거죠. 뭐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복지사를 한다고 해도 사회복지사의 분야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여하튼 자격증이 있어야 뭐라도 하게 될 때 낫겠다 싶어요. 그러니까 자격증 시대가 된 거 같아요. 너무나 많이. 이거라도 있어야 명함이라도 내밀고 뭐라도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계속 교차되는 키워드는 경력, 나이, 자격증 이렇게 세 가지이다. D님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온 경력 단절 여성의 전형은 아니지만, 이 키워드로 만날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의 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에 내밀 수 있는 경력이 없는, 젊지 않은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라는 티켓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큰 욕심이 없으면 도시를 떠나는 것도 괜찮아
 
공백이라기보다는 여러 ‘마디’들을 경험한 D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화 <레드마리아>에 나온 일본인 노숙여성 이치무라가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의 노동시장을 ‘돈 있는 자들의 파워게임’이라고 보고, 일이 가진 폭력성에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아가 일을 하지 않겠노라고 선택했다.
 
D님의 모습에서 이치무라 이야기가 떠오른 건, 우리의 일상 속에 노동이 어떻게 스며들어야 하는 걸까 고민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시를 떠나서 사는 것도,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떠날 수 있을 거 같아요.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했던 친구가 돈벌이가 많지는 않은데, 친구남편도 아마 복지 쪽 일을 해서 급여가 얼마 안 되긴 하지만 둘이 마음이 맞아서 홍천으로 갔어요. 월세로 집 빌려서 살더라고요. 크게 빚이 없고 먹고 사는 데 욕심이 없으면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노동으로 잠식되어버리지 않는 하루를 만들 수 있는 건 ‘생각의 전환’으로 가능해지기도 한다. D님의 이야기가 귀촌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여태까지 해왔던 경험의 맥락 속에서 받은 느낌 때문이리라.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일을 한다. D님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주어진 일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고, 그 속에서 자율성을 잃지 않으며 ‘일하는 나’와 ‘사회 속의 나’를 번갈아 가며 돌아보는 건 모두에게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D님의 다음 일의 경험과 행보가 무척 궁금하고 기대된다.  (강선미)

※ 이 기사는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womenlink19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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