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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여연의 공상밥상 (11) 채소 샐러드


홈스쿨링과 농사일로 십대를 보낸, 채식하는 청년 여연의 특별한 음식이야기. 갓 상경하여 대도시 서울의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스무살 청년의 음식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좌충우돌 실험 속에서 터득한 ‘여연표’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www.ildaro.com
 

신선, 순수, 영양…화려한 말로 포장된 마트 식품

 

 

후덥지근한 낮이 지나가고, 시원한 바람이 살살 부는 밤에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에 놀러 간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아니다. 새로운 문화를 처음 접한 원시인이 된 기분으로, 한밤중에도 대낮같이 환한 마트 구석구석을 돌아보다가 돌아오곤 한다.
 
적당히 크고 북적거리는 큰 2~3층짜리 대형마트는 심심한 밤에 산책하기 그만이다. 번쩍거리는 상품들이 눈을 자극해주는데다가, 카트에 식품과 생활용품들을 그득그득 채우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일에 빠져있어 스리슬쩍 구경하기 딱 좋다.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이 공간에 다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다.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포장해놓은 상품들이지만 가만 보면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더 많다는 건 더 놀랍다. 나를 가장 골똘한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건 마트에 있는 많은 물건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이다.
 
겉에 써놓은 말만 놓고 보면, 식품들은 “신선”하고 “순수”하고 “자연 그대로”에 “건강”하고 “영양 가득”하다. 하지만 포장지에 써놓은 그럴싸한 말들과 실제 그 물건들이 진열대에 놓이기까지 거쳐 온 과정을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다. 환한 조명, 과장된 언어, 억지스럽게 친절한 판매원들로 이루어진 환상세계를 구경하는 기분도 든다.
 
오늘은 문득 ‘샐러드 코너’라는 간판을 단 냉장진열장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위쪽에는 50g 단위로 포장된 새싹과 어린잎이 놓여있다. ‘종자 원산지: 미국’이라는 굵은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오는 무 싹도 보인다. 심지어 안에 든 새싹 무게와 포장 봉지 무게가 거의 비슷해 보인다.
 
더 아래 칸에는 160g 씩 무게를 달아서 판매하는 샐러드 믹스가 있다. 미리 씻고 썰어서 섞어놓기까지 한 채소들이다. 조각조각 잘려서 포장된 양상추, 치커리, 적채, 브로콜리 등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맛없겠다.”란 중얼거림이 절로 튀어나온다. 게다가 가격을 보니 살짝 질리기까지 한다. 저렇게 비싼 돈을 주고 봉지에 든 채소 조각들을 사 먹다니. 다들 그럴싸하게 ‘oo 샐러드’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화려한 제품명과 포장이 과연 저 채소의 신선함과 맛을 보장해줄까?
 
식탁을 가득 채우는 텃밭채소의 생생한 존재감
 
마트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하천 가를 따라 달렸다. 다시 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강물에서 풍기는 희미한 비린내를 맡으면서, 나는 잠시 집으로 돌아가 무더운 여름날의 밭을 떠올렸다.
 
이른 아침에 엄마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 미적미적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밭으로 나가면,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 밤새 내린 비에 질척질척한 땅. 밭을 촉촉하게 감싸 안은 안개는 아홉시쯤 돼서 해가 등장하면 슬슬 물러간다. 내리쬐는 햇볕, 땀범벅이 돼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작업복, 안경에 묻은 흙먼지. 축축한 흙, 손톱에 낀 새까만 때. 목이 마르면 먼지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오이와 토마토를 따서 옷에 스윽 닦아 입에 넣는다. 미지근하면서도 갈증을 풀어주는, 갓 딴 채소의 달짝지근한 뒷맛.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올 때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면, 식탁 위에 놓인 동그란 도자기 접시에는 샐러드가 가득 담겨있다. 채소 범벅에 가까운 이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갓 따서 싱싱하고 풍성한 채소들이 필요하다.
 
연한 푸른 상추와 붉고 치렁치렁한 치마상추. 상추보다는 갓에 가깝게 생긴 겨자채는 그냥 먹으면 코가 찡해지면서 절로 눈물이 난다. 씁쓸한 치커리, 잠깐 나오다가 장마가 시작되면 녹아버리는 아삭하고 통통한 양상추. 달짝지근하고 향이 강한 순무, 하얗고 살짝 매콤한 래디쉬, 흙냄새가 살짝 나는 붉고 단단한 비트. 특유의 싱그러운 여름 향기를 풍기는 풋고추와 피망, 익으면서 점점 더 달콤해지는 파프리카. 여름 한 시절 동안 ‘폭발’해서 바구니를 몇 개씩 챙겨 가도 다 따오지 못하는 오이와 토마토.
 
양념은 짠맛, 고소한 맛, 신맛, 단맛이 모두 다 느껴지는 간장 드레싱으로 한다. 봄에 심어서 여름에 풀을 뽑고, 가을에 수확해서 겨울에 빚은 메주로 만든 간장은 짭짤한 맛이 강해서 조금만 넣는다. 대나무 작대로 털고 가을 햇살 아래 말려서 기름을 짠 들기름은 전혀 느끼하지 않고 향긋한 향이 솔솔 풍긴다. 마당에 서있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농익은 감을 항아리에서 삭혀 만든 감식초와 숙성이 잘 돼서 향긋한 매실효소로 신맛과 단맛을 낸다.
 
텃밭에서 갓 따온 신선한 바질, 딜, 펜넬, 로즈메리, 파슬리, 박하 따위의 허브를 잘게 다져서 섞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야채를 큰 볼에 담아 드레싱을 부어 섞은 다음 접시에 옮겨 담고, 맨 위에는 귀한 참깨를 살살 뿌려준다.
 
식탁을 가득 채우는 샐러드의 저 생생한 존재감! 늘 ‘도대체 저걸 한 끼에 다 먹을 수 있을까’의심하면서 젓가락을 들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그 많던 채소들이 온데간데 없다. 밥상 위로 온통 채소를 씹는 “아삭아삭” 소리가 퍼져나가면 나른하게 늘어지던 대화들도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신선함 그 자체를 먹을 수 있다는, 여름 밥상이 가진 특별한 매력이다.
 
파릇하지만 어설픈 시절, 반짝반짝 빛나는 말들
 
나는 올 여름에 집에서 샐러드를 먹는 대신 서울에서 샐러드 같은 20대의 첫해를 보내고 있다. 말 그대로 ‘Salad days'다. 네이버 영어 사전에서 'Salad days'를 검색해보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1. 경험 없는 풋내기 시절 2. 젊고 활기 있는 시절, 전성기.
 
원래는 1623년 출간된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처음 쓰인 말이다. “샐러드 같은 나날들, 나의 판단력은 초록이었다(My salad days, When I was green in judgment).” 중년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함께 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짧은 말은 아름답지만 미숙하고, 활기와 에너지가 가득하지만 어쩐지 아슬아슬한 그녀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게 만든다.
 
갓 딴 상추, 오이, 피망처럼 파릇파릇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시절을 나는 잘 보내고 있는 걸까? 분명 생생한 경험들을 바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수많은 말, 말들 사이에 파묻혀서 길을 잃어버렸다.

충고하는 말, 위로하는 말, 설명하는 말, 비난하는 말, 설파하는 말, 칭찬하는 말, 순간적으로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말, 의미심장한 말, 시시하고 내용 없는 말, 화려하지만 경험과 삶이 빠진 말까지. 곳곳에서 너무나 많은 말들이 들려온다. 미숙한 판단력을 가진 나는 쉽게 휘청거리면서 유혹당하고, 그 와중에 내가 쓰는 언어들도 마치 냉장고 속 야채들처럼 싱싱함을 잃어간다.
 
하지만 분명히 그중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말들이 있다. 어떤 말들은 머릿속에서 불꽃이 번쩍 튈만큼 정확하게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어떤 말들은 바늘같이 날카롭지만, 찔린 자리를 소독하는 건 진실이라는 소독약이다. 또 어떤 말들은 나를 일어서게 만든다. 춤추게 만들고, 행동하게 만들고, 하루 종일 행복하게 만든다. 부끄럽게 만들고, 결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샐러드 같은 나날들. 내가 하고 듣는 말들은 비닐봉지 속에 든 채소조각일까, 탱탱하게 물기를 머금은 여름채소일까.  

 

▲ 신선한 채소에 허브 드레싱을 얹은 샐러드     © 여연 

 
샐러드 만들기
 
-채소: 오이, 토마토, 비트, 겨자채, 순무, 양파, 피망, 파프리카, 완두콩, 양배추
완두콩은 통째로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껍질을 깐다. 나머지 채소들은 드레싱이 잘 베어들도록 가늘게 채썰어놓는다.
 
-드레: 간장 2, 참기름이나 들기름(혹은 올리브유) 2, 식초 1, 매실효소 2, 통깨 약간, 말리거나 말리지 않은 다양한 허브들(취향에 따라 조절. 나는 주로 바질, 딜, 로즈마리, 라벤더, 파슬리를 쓴다.) 준비한 양념들을 모두 섞는다.
 
채소에 드레싱을 뿌려서 버무린다. 바로 먹어도 좋지만 시원한 곳에서 한두 시간 놓아두면 단단한 뿌리채소에도 양념이 배어들어서 맛있다. 온갖 야채를 넣어서 만든 샐러드에 묵이나 국수를 곁들이면 든든하고 화려한 요리로 변신한다.
 
연금술의 대가인 식물은 다른 식물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미생물과 해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갖가지 효과를 내는 물질들을 합성해낸다. 그 물질들은 그리스어로 ‘식물’이라는 뜻의 'phyton'과 ‘화학물질'이라는 뜻의 'chemical'이 합쳐진 ‘피토케미컬(Phytochemical)’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고추의 매운맛과 겨자채의 톡 쏘는 냄새, 각종 허브의 다양하고 독특한 향기는 모두 이렇게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화학물질에서 나온다.
 
식물의 알록달록한 색 또한 단순한 색소가 아닌 피토케미컬이다. 잘 익은 토마토와 빨간 파프리카의 붉은색을 내는 ‘리코펜’이라는 색소는 자연에 약 500종이 존재하는 카로티노이드의 한 종류이다. 호흡과정의 부산물로 만들어져서 신체구조를 공격하고 세포를 파괴하는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비트의 검붉은 색을 내는 ‘베타시아닌’이라는 색소 역시 항산화물질로 알려져 있다. 

           - 여성 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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